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101
101
第二十一章 운집(雲集) (1)
가시가 촘촘히 박혀있는 붉은 장(杖)!
혈인장(血人杖)은 존재 자체가 공포를 불러온다. 지팡이에 박혀있는 붉은 가시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
“으……!”
혈인장을 본 사람들은 도망도 가지 못하고 땅에 붙박인 듯 멈춰서 버린다.
혈장(血杖)이 나타났다는 것은 누군가가 피를 쏟았다는 뜻이다.
나무가 피를 머금고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새빨간 핏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면서 요악한 숨결을 토해낸다.
“킥킥!”
노파가 혈장을 짚고 서서 킥킥 웃었다.
촌각 전, 노파의 괴장은 흑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붉디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단지 한 사람을 죽였을 뿐인데. 머리를 으스러트려서 피도 거의 나지 않았는데.
흑색 괴장이 혈장으로 변하는 데는 딱 피 한 모금이 필요했다.
“으으! 요, 용서를…….”
급기야 중년인의 입에서 무인이라면 차마 꺼내기 힘든 말이 흘러나왔다.
“킥!”
노파가 어처구니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용서?”
“…….”
“용서를 그따위로 비냐?”
털썩!
중년인이 체면 불고하고 무릎을 꿇었다.
장창술(長槍術)로 명망 높던 귀주(貴州) 하가(夏家)가 몰락하는 순간이다.
하기는……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다.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가주가 일합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남은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들이 명문정파랍시고…….”
노파가 비웃음을 흘리며 혈장을 거뒀다.
노파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남은 자들에게는 멸시가 가득 담긴 눈길을 던지고.
‘쓸개도 배알도 없는 것들…….’
노파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귀주 제일의 창수를 단 일합에 무너트렸다는 자부심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찾는 것이 있다.
평생을 찾아왔지만 찾지 못했고, 애꿎은 사람만 죽였다. 평범하던 괴장이 혈장이라는 괴물로 변해버렸건만,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는 갈증을 해소되지 않는다.
‘그래도 하가놈은 뭔가 있을 줄 알았는데…….’
노파는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상수(上手)를 찾는 게 아니다. 당금 무림에서 그녀보다 무공이 강한 상대를 찾기는 것은 무척 어렵다. 물론 얼마 전에 검왕에게 박살 나기는 했지만.
그녀가 찾는 것은 불꽃이다.
만약 상대가 창을 들었을 때, 그 모습에서 불꽃을 봤다면, 원하는 것을 찾았다면 결코 하수 따위에게 살장(殺杖)을 터트리지는 않았을 게다.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분노가 살장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하가 놈은 창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제대로 배웠다면 뜨거운 화염을 토해냈을 텐데.
아! 이 세상에 뜨거운 화염을 토해내는 자가 없는 것인가.
또각! 또각!
괴장이 땅에 박혔다가 뽑혀진다.
그러다가…… 문득, 노파가 걸음을 멈췄다.
“큭큭!”
노파가 실성을 한 듯 실소를 터트렸다.
“웬 놈?”
노파가 주위를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다. 하지만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소리가 사방 삼십여 장을 쩌렁 울렸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에 부응하는 화답은 없다.
“킥킥! 쫓아올 수는 있어도 나타날 배짱은 없는 놈이던가. 킬킬! 한심한 작자들.”
노파는 느낌을 무시하고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갈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 헌데!
팟!
노파는 걸음을 떼다 말고 갑자가 괴장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가 습격해 온다. 일시에 그녀를 바짝 긴장하도록 만든다. 마치 빛 한 점 없는 산길을 걷는 중에 갑자기 귀신이 불쑥 나타난 것처럼 깜짝 놀라게 한다.
“킬킬! 어떤 놈이냐?”
그녀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적은 무시할 수 없는 자다. 근본적으로…… 그녀는 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적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적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적이 그만큼 고수라는 뜻이다.
그녀의 이목을 가릴 수 있는 고수라면 누가 있을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자라면…….
그녀의 머릿속에 후딱 스쳐 지나가는 인간이 있다.
‘검왕!’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 검왕만이 이토록 완벽하게 그녀를 속일 수 있다.
“킬킬! 뭘 또 얻어먹자고 이리 납셨나?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늙은이를 희롱이나 하자고 먼 걸음을 했을 리는 없고…… 킬킬! 용건을 꺼내보시지?”
노파는 상대가 검왕이라고 확신했다.
검왕이 아니라면 자신이 이토록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할 리 없다. 그때,
슈욱!
깊은 숲 한켠에서 불쑥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무지막지하게 빠르다. ‘웃!’ 하는 순간에 벌써 코앞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
그 순간, 노파도 혈인장을 후려쳤다.
그녀는 ‘찰나의 승부’에 대한 경험이 많다. 무림에서는 ‘호접쌍투(胡蝶雙鬪)라고 불리는 비무 방법인데…… 몸을 서로 바싹 붙이고, 찰나의 움직임만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초식을 배제하고 순수한 빠름만으로 우열을 정하는 방법이다.
이 호접쌍투에서는 변초가 통하지 않는다. 속임수라거나, 얄팍한 잔머리가 통하지 않는다. 오직 전력을 다한 일초만이 목숨을 지켜줄 수 있다.
노파는 호접쌍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지금 호접쌍투가 터진다. 상대가 눈앞에서 번쩍였다. 자신도 번쩍인다.
깡!
강한 힘이 혈인장을 강타했다.
‘웃!’
노파는 미간을 확 찡그리면서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혈인장을 통해 가해지는 압박이 매우 크다. 태산 같은 힘이 몰아쳐 온다.
스스스슷!
상대는 또다시 사라졌다.
‘검왕이 아니다!’
그녀는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으로 그림자가 사라진 곳을 쳐다봤다.
검왕과 싸움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검왕은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아! 어떤 놈이냐!’
검왕과 필적할 만한 자가 나타났다. 일합을 부딪쳤는데, 그녀는 상대를 보지도 못했다.
꾸욱!
그녀는 혈인장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천살마노라는 별호로 무림을 횡행한 지 수십 년이다. 그동안 숱한 자들과 싸워왔고, 때로는 무참히 패배하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솜털이 곤두선 적은 없다.
파라라랑!
가득 끌어 올려진 진기가 혈인장에 담긴다. 순간,
스스스스슷!
눈앞에서 어떤 기류가 흐른다.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감지된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풍경은 변한 것이 없다. 바람도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온닷!’
그녀는 반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눈앞에서 방금 전처럼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번뜩였다.
물론 그녀는 전력을 다해서 혈인장을 후려쳤다. 그림자를 봤고, 그림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감지했고, 그림자의 속도까지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혈인장을 여지없이 그림자를 강타했다. 헌데,
팟!
그녀의 혈인장은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쓸고 지나갔다.
‘위험!’
그녀는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뒤로 쭈욱 몸을 빼냈다.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해올지 알 수 없지만, 그림자를 더 이상 읽어내지도 못하지만…… 공격을 시도한 자리에 계속 머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임을 안다.
당연한 반사 행동이다.
상대는 그녀를 공격해 오지 않았다. 단지 눈앞에 잠시 어른거렸을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가!’
노파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상대가 움직이고 있는데, 형체를 분간해 내지 못하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 정도로 무공이 강한 놈이라면 오직 검왕밖에 없는데.
검성 성주, 혈천성 성주…… 온갖 놈들을 다 떠올려봐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다.
솔직히 말하면 검왕도 이토록 빠르지는 않다. 다만 검왕은 마공관의 마서들을 섭련한 이후, 무공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신장하고 있기 때문에 혹여 검왕이라면 이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자가 검왕이 아니라면…… 누군가!
스읏!
눈앞에서 풀숲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노파도 혈인장을 쳐내지 않았다.
움직임 속에서 의도가 읽히지 않는다. 공격해 온다는 위기감이 감지되지 않는다.
그녀의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환영처럼 희뿌연 형체가 드러났다.
‘아지랑이! 형체 분산! 유지자문!’
그녀는 있는 듯 없는 듯, 안개에 휩싸인 듯한 형체를 보고 즉시 하나의 절공을 떠올렸다.
운중도(雲中刀)!
운중도는 신법이다. 또한 살법이다.
형체를 가리는 구름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몸뚱이가 구름에 가려서 절반쯤은 보이고, 절반쯤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부분도 상대방의 몸뚱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이 구름은 무려 오 장여에 걸쳐서 분포한다.
즉, 상대가 오 장이라는 공간 속 어딘가에 있는데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이 구름 속에 칼이 숨어 있다.
운중도가 밀려오면 방어할 방법이 없다. 방법이 있다면 오직 하나, 즉시즉발(卽時卽發)뿐이다. 어떤 행동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조건에 맞춰서 즉시 응답하는 것.
이 무공은 유지자문의 절대팔공(絶對八功) 중 하나다.
‘유지자문이 왜……?’
그녀는 유지자문이 그녀 앞에 나타난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그녀가 십마 중에 일인이기는 하지만 유지자문이라는 이름보다도 한 수 아래임이 분명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운무가 출렁거린다. 그리고 잔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곡감(穀甘)으로 가라.”
‘마흔 전후반. 젊은 놈이네.’
“솜씨를 보니 영 쓸모없는 늙은이인데…… 어디다 쓸지 모르겠는데, 검왕이 오란다.”
그림자는 천설마노의 자존심을 뭉개버렸다.
“뭐, 뭣! 쓸모가 없어? 어디다 쓸지 몰라? 이런 때려죽일!”
그녀는 막 분기를 토해내려다가 그림자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생각해냈다.
“거, 검왕? 검왕…… 죽지 않았냐?”
스스슷!
그림자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검왕이…….’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봤다.
머릿속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텅 비어져 버렸다.
그녀는 검왕을 만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검왕과는 반대쪽 입장에 서 있다.
그런 그녀를 검왕은 두 번이나 살려주었다. 마공관에서 일격에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았고, 오늘 유지자문의 누군가가 죽일 수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았다.
검왕이 그녀를 만나자고 한다.
검왕이 그녀를 불렀다면 십조잔괴나 강신천마도 불렀을 것이다.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검왕은 십마 모두와 싸웠다. 십마 모두를 한 번씩 꺾었다. 그것도 일대일의 승부가 아니라 삼대일, 사대일의 싸움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꺾었다.
그러나 검왕이 죽인 사람은 오직 한 명, 패갑철마뿐이다.
패갑철마는 일검에 즉사했다.
다른 십마도 일검에 즉사할 수 있다. 그만한 위험에 노출되었었다. 다만 검왕이 손속에 사정을 담아서 검배(劍背)로 치거나, 권각으로 때렸다.
패갑철마 이외에는 죽이지 않겠다는 뜻인가?
‘검왕이 왜……?’
그녀는 움직이지 못하고 깊이 생각했다.
결국은 유지자문의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곡감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