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il Returns to School Days RAW - chapter (189)
34. 고대하고 고대했던 순간 (9)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아직 다 올라가지 않은 건설 현장이었는데, 시선을 피하고자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보였다.
휑한 공간.
그 중심에는 윤현민이 있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대동한 그의 모습에, 김현성은 뚜벅뚜벅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마주 보자 윤현민이 말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내가 이 자리에서 널 죽여 버릴 수도 있는데, 군말 없이 따라오다니.”
강남 오피스텔 사건.
그 직후와 비교하면 윤현민의 얼굴은 꽤 상한 상태였다.
눈 밑에 내려앉은 어둠은 그의 불안한 심기를 드러냈고, 방금 내뱉은 말처럼 김현성을 정말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김현성의 폭로 이후 연달아 벌어진 상황. 윤현민으로서도 엄청난 압박이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이렇게 찾아온 것이 진심을 증명했다.
김현성이 주변을 보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공간을 구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죽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많이 불안한가 봐?”
“뭐?”
“예전에는 뭘 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더니. 지금은 날 죽여야만 끝낼 수 있다는 것 같잖아.”
슥.
다시 눈을 바라보았다.
윤현민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찌릿, 전율이 일었다.
김현성이 웃었다.
“죽이려거든 마음대로 해. 내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유서 하나를 썼거든.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 범인은 반드시 윤현민일 것이다. 네가 녹취를 철저히 대비한 덕분에 불법적으로라도 취득한 증거는 없지만, 다행히도 이럴 때를 위한 단 하나의 증거는 확보할 수 있었어. 바로 지금. 내가 누군가에 의해 이동하는 장면을 촬영했거든. 넌 이동하는 도중에 위치 추적이나 녹취의 가능성을 모두 차단했지만, 날 따라붙은 사람들은 아마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서지 않아. 내가 죽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증거의 효력을 발휘할 테니까.”
“……미친 새끼.”
감탄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에도, 김현성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이래서였다.
상대가 일개 고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오랜 세월 구상한 계획처럼 자신의 수를 정확하게 공략하고 받아쳤다. 윤현민은 살면서 그런 무력감은 처음이었다. 권력을 아무리 동원한다고 한들 그에 걸맞은 공격이 들어올 때면, 고등학생을 상대하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넌 이 자리에서 날 죽일 생각도 없잖아. 지금은 시기상 좋지 않을뿐더러, 내가 아는 윤현민은 매우 철두철미한 사람이거든. 네가 이 자리에 있다는 의미는, 네가 살인범이라는 증거를 남길 일 또한 벌어지지 않는다는 의미겠지.”
“푸핫.”
윤현민이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넌 어떻게 날 그렇게까지 잘 알지? 내 아버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데 말이야. 네 말이 맞아. 난 지금 당장 널 죽여 버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살해할 생각은 없어. 궁금하지 않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혼란한 상황에, 내가 널 만나려고 한 이유를.”
슥.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가 지금 그 이유를 말해 줄게.”
* * *
윤현민이 말했다.
“솔직히 놀랐어. 처음 네 존재를 의식했을 때는, 의뢰가 실패했다는 결과에 심기가 불편했을 뿐 일개 고등학생이 나를 위협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 넌 여러 의미로 정말 대단해. 목숨을 내걸고 나를 쓰러트리겠다는 악의나, 권력에 대응하는 네 계략이나. 대체 어떤 방법으로 김판호를, 강동철을, 정한일보를, 그리고 임철형을 포섭할 수 있었을까. 제각기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 너의 무엇을 보고 인생을 걸었을까. 네 의도는 성공했어. 난 벼랑 끝에 밀려났고, 이대로라면 정말 문제가 심각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으니까. 그런데 그뿐이야.”
일련의 상황.
윤현민은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이게 너의 전력이라는 것. 반년이라는 시간을 준비해 나를 무너트리려는 강력한 한 방.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면 너는 온전한 복수를 이루었겠지만, 난 아직도 죄 없는 피해자로서 네 앞에 서 있어. 재밌지 않아? 몇몇 사람은 여전히 음모론을 떠들며 나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경철이라는 명확한 배후가 나타나고는 그들의 목소리는 음모론으로 끝나고 말아.”
툭.
이경철의 등을 떠밀었다.
먹잇감을 원하는 대중들은, 이경철을 뼈까지 씹어 먹고는 포만감을 느끼고 돌아갔다.
“대한민국은 참 재밌는 사회야. 그렇게 열을 내고 들끓다가도, 대표로 누군가가 목숨을 내던지면 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잖아. 물론 이경철의 선택은 자의가 아니야. 그동안 그가 내게 받아 왔던 비리 내역, 그것을 기반으로 이경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 이경철은 가족을 부탁하면서 자살을 택하더군. 본인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생명이 끝난다고 한들, 어쨌든 남은 가족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게 바로 권력이라고. 이경철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을 묻어 줄 권력자들, 사건을 흐지부지 마무리하는 검찰, 여론을 선동하는 세력. 그 삼박자가 서로 완벽한 합을 이루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자리에 멀쩡하게 존재할 수 없었겠지. 김현성. 네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어. 네 폭로로 골든 서클의 존재가 드러나고 상당한 피해를 받겠지만, 이로써 우리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버텨 내는 집단임을 증명해 냈어. 우리는 앞으로 더더욱 깊은 밑바닥으로 파고들어 더 영악한 방법으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것이고, 너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차마 엄두를 내지 못할 거야. 너만큼 하기 힘들 테니까. 너만큼 하더라도 복수가 성공할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너로 인해 우리는 완전무결해졌다는 의미야.”
지금의 이 만남.
처음과 똑같았다.
윤현민은 김현성을 조롱했다.
권력으로 만들어 낸 지금의 이 결과에, 멀쩡한 얼굴로 김현성의 멘탈을 무너트리고자 했다.
“지금부터는 내 차례야. 여론이 가라앉고 사람들이 이 사건에 무관심하기 시작하면, 나를 저격했던 모두를 파멸시킬 거야. 감히 윤현민을 건드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너와 네 가족, 너를 따르던 사람들. 그들의 절망이 확실한 예시를 남겨 주겠지. 내가 널 죽일 것을 대비했다고 그랬지?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준비를 한 거야?”
윤현민의 눈빛.
악의를 드러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넌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될 텐데.”
* * *
눈앞의 존재.
이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을 개미처럼 짓밟고, 악의를 분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중들 앞에서는 골든 서클 박멸에 앞장서겠다고 말했으면서, 김현성을 만나서는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악마였다.
사화의 악이었다.
김현성은 묘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말했지. 어떻게 네 아버지보다 너를 더 잘 아느냐고.”
윤현민은 알까.
지금, 이 순간.
김현성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한 아이가 있었어. 골든 서클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 아이는, 십수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어. 정말 큰 비극은 그 아이의 정신이 그동안 멀쩡히 살아 있었다는 거야. 19살의 아이가 30살이 되도록, 그 아이는 옆에서 흐느끼는 가족의 울음소리, 가해자들이 성공했다는 TV 뉴스 보도. 그런 것들을 들으면서 정신이 점차 무너져 내렸어. 그래서 상상했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그런 시도조차 없으면, 시간이 완전히 멈춰 버리는 것 같았거든.”
“지금 무슨 소리를…….”
윤현민이 뭐라 반응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김현성은 말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 아이는 생각했어. 골든 서클이라는 단체는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대대적으로 골든 게이트가 터졌는데도 실마리조차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배후는 분명히 철두철미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어. 나이는 몇 살일까? 20대? 30대? 40대? 골든 서클의 역사를 생각하면 20대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다기에는 골든 서클은 고리타분한 단체가 아니야. 현재의 교육 체계를 알지 못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단체. 그 말인즉 골든 서클을 창립할 당시에 학교를 경험했을 나이라고 판단했을 때, 많아야 3~40대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집안도 대단한 인물일 것이 분명했어. 미래투자증권 임철형 대표와 같은 사람과의 연결 고리는, 절대 확신을 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인맥이니까. 그렇게 상상에 상상을 더해 갔어. 멈춰 버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놀랍게도 너와 매우 흡사한 ‘가상의 인물’을 떠올렸던 거야. 오만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 흔히 소시오패스라 불리는 유형의 인간.”
“네게 또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의미인가.”
“아니.”
윤현민은.
예상 그대로의 인간이었다.
이경철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이렇게 찾아온 모습에, 김현성은 온몸에 한 가지 감정이 관통했다.
기뻤다.
예상 그대로의 쓰레기라서.
생각했던 계획을 그대로 이행해도 될 만큼의 쓰레기라서.
“내 이야기야. 내가 생생하게 경험한, 내 이야기.”
의식이 풍덩!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김현성이 기억의 파편 속에서 어둠으로 물든 무언가를 떠올렸다.
회귀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의 기억을.
* * *
무려 10년.
10년이 넘도록 식물인간으로 살았다.
정신이 피폐해졌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고, 김현성은 매번 계획을 되뇌는 하루를 반복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상상 속에서.
현실과는 무관한 가상의 세계일지라도.
가해자들을 찢어발기고 짓밟아야만,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눈앞에 나타난 의문의 인물은, 김현성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네 염원을 말해 다오.”
신이 났다.
꿈일지라도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김현성은 전부를 말했다.
“일단 과거로 회귀하면 박민철 패거리부터 찢어 죽일 거예요. 그 개새끼들의 얼굴을 짓밟고 사지를 부러트리고 완전히 찢어발긴 뒤에, 배경을 끌어들여 저를 압박하려고 한다면 김영철과 오대환 같은 쓰레기들을 포섭해 학교 밖의 현실마저 무너트릴 거예요. 김영철, 오대환도 찢어 죽일 쓰레기지만 그때는 필요할 테니까. 골든 서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니까. 그리고…….”
너무나 행복했다.
누군가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상 속의 일들이 마치 현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아직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가상의 계획이지만, 배후의 파멸이라는 아름다운 결말로 끝이 났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야.
의문의 인물이 말했다.
“너의 염원을 들어준다면. 네가 복수할 수 있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준다면, 넌 내게 무엇을 줄 수 있지?”
눈이 번쩍 뜨였다.
빌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
그런 기회를 쟁취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의문의 인물이 사납게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눈앞의 저 존재는 분명히 악마일 것이라고.
“네 의지가 갸륵해 기회를 주지. 네가 옥상에서 떨어지던 그 날, 사실 너는 그 순간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러니 너를 원래의 시간대로 돌려놓는다면. 너는 복수를 이루는 대신, 반드시 죽었어야 할 그 순간에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내 거래 조건을 받아들이겠나.”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등바등 발악해 복수를 이룬다고 한들, 수능을 앞두었던 그 순간에.
자신은 원래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전제들은 무의미했다.
사람들은 악마라고 표현할 그 존재가, 김현성에게는 하늘에서 빛줄기를 내려 주는 구원자처럼 보였다.
경배했다.
무릎을 꿇고, 그를 우러러보았다.
“예. 그때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절 이렇게 만든 악마들에게 복수할 수만 있다면. 옥상에서 떨어졌던 그 날,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게요.”
김현성이 환하게 웃었다.
살면서 그토록 행복한 미소는 난생처음이었다.
그러고서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짹짹짹.
김현성은 창밖의 싱그러움,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그토록 고대했던 과거의 한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