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28
배신이라 함은….
“너도 ‘리클룸’이었구나….”
자수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던 바이지만.
이정혁 본인이 전혀 모르는 ‘리클룸’의 일원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기에.
한민재의 정체는 색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아니, 이진태 당신….
어디까지 설계를 해놓은 거야?
도대체, 이 비극을 어떻게 끝내려는 속셈이냐고!
“으아아!”
– 쿠당탕!
“크윽!”
이정혁이 한민재를 강하게 내팽개쳤다.
윤태오가 황급히 이정혁을 막아섰다.
“침착해야 합니다.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놈에게 놀아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요!”
“…….”
이정혁은 등을 돌린 채, 가까스로 울분을 삼켰다.
윤태오가 쓰러진 한태진을 일으켜 다시 자리에 앉혔다.
“시간 끌어봤자, 피차 좋을 게 없을 것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수를 한 이상, 여길 빠져나갈 순 없을 겁니다. 혼자서 다 뒤집어쓸 생각인가요?”
“협박인가?”
“아니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침묵을 유지한다면, 국회의사당 테러 사건은 물론 여태껏 이진태 일당이 자행한 모든 죄의 처벌을 당신이 받게 될 테니까.”
윤태오가 한민재를 향해 몸을 기울여,
“다 끝났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것만이, 당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범인을 취조하는 냉철한 검사 특유의 눈빛과 음성, 제스처까지.
‘자, 말해. 어서!’
그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빈틈없는 검사의 모습이었다.
이를 본 한민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입을 뗐다.
윤태오는 물론, 등을 돌리고 있었던 이정혁도 어느새 한민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푸, 푸흡….”
어라?
“푸하하하하하하!”
한민재의 입에서 나온 건, 두 사람이 기대하던 말이 아니었다.
비소보다 더 거대한, 아주 가소롭다는 식의 웃음이었다.
잠시 동안 신나게 웃던 한민재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정말 끝이라고 믿는 거야?”
“……!”
“순진하기는.”
“이 자식이 진짜….”
이정혁이 한민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찰나,
– 띵동!
이정혁과 윤태오의 핸드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동시에 울렸다.
117화
두 대의 핸드폰에서 동시에 울린 문자 수신 알림음이 이정혁과 윤태오를 멈칫하게 했다.
눈이 자연스레 마주친 두 사람은 이윽고 각자의 핸드폰 액정에 시선을 내리꽂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이정혁과 윤태오의 눈동자는 이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흡사 미러링 같은 형제의 모습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It ain’t over till it’s over!(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한민재가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머금은 표정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미친 새끼들….”
대놓고 도발을 하는 그에게 꾸준히 존댓말을 하며 검사로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던 윤태오의 입에서 거친 언행이 튀어나왔다.
충격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이정혁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상태였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
정적이 흘렀다.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며, 양 측의 상반된 표정을 생생하게 담았다.
잠시 후,
“컷!”
우승현 PD가 외쳤다.
세계관으로 뒤덮였던 촬영장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그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금일 촬영 종료입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화의 첫 10분을 장식하는 구도의 축,
‘멈추지 않는 자와 막으려는 자들’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 장면이 마무리되었다.
현재 전체 출연진에게 공개된 의 대본 분량.
즉, 1화에서 20화 극 초반부의 콘티까지는 촬영이 모두 끝이 난 셈이다.
이윽고, 금일 촬영 내용을 현장에서 빠짐없이 지켜봤었던 김수림 작가가 중요한 사항을 공지했다.
“배우분들, 스태프분들 고생하셨습니다! 기존에 말씀 드린 대로, 마지막 화 나머지 대본은 아직 배부하지 않았는데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본 유출 방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두 가지 결말을 놓고 고민 중입니다. 이미 완성은 되어있으니, 걱정 마세요!”
“네~!”
“배우, 스태프분들 모두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내일 오전까지 전달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들 3일 뒤에 봅시다!”
김수림은 대본에 관한 공지를 마치자마자 우 PD, 서민경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결말을 두 가지 버전이나 완성했음에도,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니.
김수림이 이번 드라마에 얼마만큼이나 사활을 걸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두 개 중 선택이라….’
우진은 김수림의 말을 되뇌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두 가지 결말이라면, 당연히 ‘해피 엔딩’이냐 아니면 ‘새드 엔딩’이냐를 두고 고민 중이란 소리겠지.
어떤 결말이냐가 궁금한 것이 아니다.
그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
다시 말하면, 금일 촬영분 이후와 결말 촬영 이전을 잇는 브릿지 씬들이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여쭤봐도,
“비밀! 대본으로 확인하세요.”
미소 지으며 끝까지 알려주지 않는 김 작가와 서 작가였으니까.
이강식 선배가 물어봐도 마찬가지였고.
도대체 이진태가 추구하는 복수의 창이 어디까지 뻗길래, 그 역할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에게까지 숨기는 것일까.
폭발하는 궁금증을 애써 누르려니 꽤나 힘이 들지만, 반대로 ‘이렇게 흘러가려나?’라는 추측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버티는 중이다.
“아빠, 수고하셨어요.”
“그래, 아들!”
의상을 갈아입은 뒤, 분장 버스에서 여유롭게 메이크업을 지우고 있던 우진은 뒤늦게 탑승한 이강식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강식이 그의 옆에 앉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떻게 끝날 것 같냐, 아들아?”
“마지막 화요?”
“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방금도 김 작가한테 제발 좀 알려달라고 조르다 왔어.”
“알아내셨어요?!”
“아니, 내일 확인하래. 끝까지 안 알려주데. 궁금한 거 못 참는 성격이라 오늘 잠 못 잘 듯싶으이.”
이강식 선배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요즘 부쩍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이신다.
첫 만남 때는 분명 산군(山君) 같았던 대선배였는데, 친해질수록 친근하고 허울이 없는 선배구나 싶다.
“김 작가, 보통 내공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왜요?”
“아니, 끊는 지점이 그야말로 예술이잖아. 어떻게 끊어도 거기서 끊냐고? 하핫!”
아마 우진과 이강식뿐만 아니라, 전 스태프 또한 같은 생각일 것이다.
스토리 전개 흐름만 다시 정리해보더라도,
1. 전무후무한 국회의사당 테러 직후 자수한 범인, 한민재.
2.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밝혀지는 그의 과거. 게다가, 이진태의 도플갱어인 것처럼 처지가 똑같은 사람이다.
3. 이로써, 한민재가 어떻게 이정혁이 모르는 ‘리클룸’의 조직원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마련되었다.
4. 더불어, ‘아무리 이진태의 세력이 막강한 힘을 지녔다고 한들 한 국가에 대항한 테러가 말이 되는가?’라는 의문도 해소된다. 머리가 하나인 것보다 둘인 게 낫다는 속담이 있듯, 국가를 무너뜨리겠다는 강한 복수심이 최소 둘이니.
5. 그런데, 별안간 자수를 하더니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6. 그와 동시에 울리는 두 주인공의 핸드폰. 이를 확인한 두 사람의 표정이 역대급 충격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와, 그러고 보니 19화 극 후반과 20화 극 초반.
다 합쳐봤자 10~15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 안에, 앞선 내용에서 던졌던 떡밥을 모두, 그것도 단번에 회수해버리네….
이왕 하시는 거, 마저 해주시지.
클라이맥스의 정점을 뚫고 지나갈 만큼 긴장감이 쌓였을 때 ‘빵!’ 하고 터져주지는 못할망정, ‘럭키 세븐’은 어디 가고, 이걸 여기서 끊으십니까!
이강식 선배의 말이 맞다.
영상화 작업에 들어가기 전, 대본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작품을 창작자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읽는 사람은 단연 해당 작품의 제작진.
어찌 보면, 제작진 또한 한 명의 시청자와 같다.
‘김&서(?)’ 조합의 필력은 이런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폭발….
아니, 폭발이 뭐야.
그냥 승천시키는 데에 아주 특화된 능력자들이구나 싶다.
우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식이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이 되기 전에, 내가 한번 맞춰본다.”
“어? 그 말씀은….”
“…콜?”
“당근이죠. 묻고 더블로 가시죠!”
프로덕션 내내 우진과 이강식 둘이서 즐기는 또 하나의 놀이.
바로, 소소한 내기.
“내가 생각하는 엔딩은 말야….”
“…에이~ 아니죠. 제가 볼 땐….”
내기로 시작한 얘기지만.
어쨌든, 그 내용은 결국 작품과 연기 얘기다.
어느새 진지 모드로 돌변한 두 배우는 각자가 생각하는 20화의 기승전결을 소곤소곤 읊조렸다.
“오호~”
“대박! 선배님들, 작가 하셔도 되겠는데요?”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릴 수밖에 없는 우진과 이강식의 대화는 분장팀 스태프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만큼,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절대 금방 끝나지 않을 낌새가 역력한 수다의 장이 또 한 번 펼쳐졌다.
왁자지껄.
분장 버스에 화기애애한 웃음이 가득 찼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컨테이너에도 그 소리가 들렸는지, 의상팀 스태프들까지 대화에 합류했다.
오성철 선배가 한때 그랬었다.
배우는 현장에서 ‘수다맨’이 될 수밖에 없다고.
드라마든, 영화든 할 것 없이.
팀플레이로 움직이는 현장은 사람으로 가득한 곳.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지는 환경이다.
“그나저나 안종훈 걔 생각보단 괜찮더라, 연기가.”
이강식 선배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때는 스태프들끼리 만날 발연기라고 뒷말 나왔었는데, 웬일이래?”
분장팀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괜찮더라고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아까 안종훈의 연기는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상대역으로서,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어색함이나 위화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캐릭터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매치되는 비소가 인상 깊게 남을 정도였다.
다만,
“기본 분량 자체가 적으니, 아직은 모르지. 연기를 잘한 건지, 아니면 잘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던 건지 말이야.”
이강식 선배가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는 말을 읊조렸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별다른 분석이나 연습을 하지 않았음에도, 보는 사람에게 정말 연기를 잘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때.
‘배우의 실제 성격이나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 또는 실제로 경험한 바가 캐릭터의 옷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다.
들 수 있는 예는 많다.
‘보험설계사한테 보험설계사 연기를 시키면?’
‘얼마 전,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을 겪은 사람에게 이별 연기를 시키면?’
애초부터 잘할 수밖에 없도록 조성된 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