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65
264화 모르면 맞아야지
바그란과 갈리스토의 갈등이 극에 달함에 따라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크 황태자는 붉은 편지를 보내 레오볼드에게 경고를 하긴 했지만 전쟁을 멈출 의도는 없어 보였다.
이제 한쪽이 선전포고를 하면 비로소 전쟁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것을 통보하러 온 사람은 자이움이나 갈리스토의 외교관이 아니라 신성교국의 성녀 베로니카였다.
“먼저 바그란의 왕위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머리의 그 헤일로… 신격을 얻으신 모양이군요.”
“성녀께서도 신격을 얻지 않았습니까? 꿈과 환상의 신인 헤르미나가 가르쳐 주지 않던가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헤르미나는 제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계에서 온 용사야말로 아스테라 전체를 바꿀 만한 사람이라고. 그와 협력해야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요.”
“교황과 성녀께서 바라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두 사람의 목적이 다를 것으로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황은 교국의 영향력을 퍼트리지 못해 안달이 난 인간이었다.
신성교국도 어엿한 국가이며 세입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인정할 만도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성교국에서 파견된 사제단과 기사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헌금과 신도 가입을 반 강요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신들이 죄다 소멸해 아무런 권능을 내려주지 못하는데 누가 믿을 것인가.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스테라의 평화입니다. 교황께서도 마찬가지이고 교국 전체가 평화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그거 반가운 얘기군요. 나도 아스테라의 평화를 원합니다.”
“농담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전하의 행보 어디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나요?”
“바그란을 완전히 통일시킨 것에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사제단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알겠지만 바그란의 치안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수입 또한 많으며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죠. 이보다 더한 평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것을 위해 타국을 침략한다는 건 악입니다!”
“침략한 적 없습니다. 그쪽이 일방적으로 나를 적대시하는 것뿐이죠.”
“그렇다면 갈리스토의 외교관에게 상해를 입히고 엘브랑데의 황녀를 시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자는 오만방자한 태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뿐입니다. 후자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눈앞에 마르그레타를 데려올 수도 있겠지만 신성교국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잔소리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로니카 성녀는 뜻밖의 말을 했다.
“…전하의 강함은 잘 압니다. 티렌델을 패퇴시킬 정도니 골리앗 부대로는 상대가 어렵겠죠. 하지만 이번은 다릅니다. 절대 싸우면 안 됩니다.”
“재미있군요. 땅에서 좋은 거라도 캔 모양이죠?”
정곡을 찔린 베로니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녀의 수양은 장난이 아니어서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단지 이 무의미한 싸움을 말리기 위해…….”
“성녀님.”
레오볼드는 자세를 바로 하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신성교국이 왜 갈리스토의 주구가 되어 움직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주구라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성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펄쩍 뛰었고 레오볼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왜 품 안에 팔커스 2세의 친서를 가지고 온 왔습니까? 그 친서가 최후통첩장이라는 것에 모든 것을 다 걸지요.”
“…….”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 안의 친서를 내놓았다.
최후통첩장 겸 선전포고문이었다.
레오볼드는 그것을 슬쩍 본 다음 놓았다.
“이로서 신성교국은 갈리스토, 판그랄 대공과 함께 움직인다고 간주해도 되겠습니까?”
“그 외에도 수많은 왕국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요. 이번 전쟁만은 안 됩니다. 제가 중재를 할 테니 이번만큼은 참으셔야 합니다.”
“당신을 만나는 것은 이번을 끝으로 하지요.”
갑작스런 선언에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번이 세 번째던가요? 맞군요. 아무튼 성녀님과 만나는 시간은 그다지 즐겁지도 이득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더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을 늘 이렇게 대하시나요?”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에겐 정성을 다하죠. 정체불명의 신을 감춘 채 이거 해라 저거 해라라고 요구하기만 하는 사람과는 만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당신께 고향의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필요 없습니다.”
레오볼드는 손을 저었다.
“약점이라도 잡은 듯 나를 조종하려 드는 당신의 태도에 신물이 납니다. 세 번이나 만났는데 교차점을 찾지 못했으니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녀는 단호한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일어서고 말았다.
“머리 뒤의 헤일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편협한 판단이시군요. 실망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실망할 겁니다. 그러니 서로 안 보는 게 낫습니다.”
“실례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는 접견실 문을 열다 말고 말었다.
“전하께서 어떤 신의 유물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하를 지켜 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신성교국의 성녀께서 이제 협박까지 하는군요. 하지만 이건 알아두십시오.”
레오볼드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했다.
“당신들이 어떤 힘이나 신을 데려오든지 상관없습니다. 전부 다 데려오십시오. 죽여 줄 테니까.”
“이제는 신성 모독까지…….”
“진짜 신성 모독이었다면 지금쯤 내 머리 위에 번개가 내려쳤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자신을 모욕하는 지상의 하찮은 존재를 왜 내버려두는 겁니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이 제대로 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레오볼드의 시선에서는 그렇다.
베로니카는 돌아갔고 그는 아르마에게 당부했다.
“교국의 동태를 감시해. 아무래도 정상적인 놈들이 아니야.”
“교황을 비롯한 중요 인물 36명의 동선을 감시하겠습니다.”
뭘 노리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앞으로 교국의 방해는 더 집요해질 거라는 사실 말이다.
“전쟁을 벌일 때마다 방해질을 해대겠지. 차라리 반응탄 한 발로 깔끔하게 청소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
“발사할까요?”
“…아니,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하자고.”
긴 시간 수련해 온 레오볼드의 인내심은 이 정도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성교국이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를 들고 와서 강요한다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 * *
최후통첩장에는 레오볼드가 해야 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엘브랑데의 황녀를 시해한 건을 국제 무대에 나와서 해명하고 사과할 것.
―갈리스토 사자의 팔을 자른 것을 해명하고 사과할 것.
―판그랄 대공의 경고를 무시한 것을 해명하고 사과할 것.
전부 해명과 사과였고 뒤의 두 개는 판그랄 대공의 공국으로 직접 가야 하는 조건이었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했는지 레오볼드나 지갈레온이 참전할 시 바그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건 미티어 스트라이크를 쳐박겠다는 거 아닌가? 맞지?”
“네. 판그랄 대공 단독으로 미티어 스트라이크 발동이 가능합니다.”
“대놓고 협박을 하는군.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까지 도와준다고 하면 판그랄 대공이 손해 아닌가?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뭐야?”
“어차피 자이움의 주류가 바라크 황태자를 밀고 있으므로 그의 지배를 인정하고 잇속을 챙기겠다는 것 같네요. 그 증거로 노스윈드 연합에 대한 강력한 배제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황태자와 손을 잡고 그쪽을 두들겨 패서 제국을 갈라먹겠다는 생각인가? 뭐 나쁘지는 않아.”
레오볼드만 배제한다면 나름 승산이 있다는 계산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갈리스토는 판그랄 대공을 등에 업고 선전포고를 해왔다.
이제 전쟁은 시작되었고 물릴 수 없었다.
바그란은 전쟁에 앞서서 군을 완전히 재편성했다.
“근위기사단은 해체, 모든 골리앗 부대는 10개의 기동부대에 편성된다.”
레오볼드의 목표는 비행선으로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는 기동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에 에테르폭탄 발사기를 소지한 척탄병 5부대가 새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비행선을 타고 적진에 투입된 후 신속하게 상대의 골리앗을 제거하고 빠져나오는 임무를 맡는다.
골리앗을 주로 쓰기에 정찰이란 개념이 없는 국가를 상대할 때는 꽤 유효한 전술이었다.
관건은 비행선의 숫자였다.
골리앗도 병력도 비행선을 이용하다 보니 숫자가 적으면 이야기가 안 되었기 때문.
다행스럽게도 바그란 동부에선 예전부터 비행선을 건조하고 있었다.
벌써 4척이 건조되었고 이제는 도크를 확장해 1,500톤급의 비행선을 찍어낼 예정이었다.
기존 부유대륙 선단과 합치면 20척이 넘는 숫자가 된다.
아르마는 부유대륙에서 발견한 거대한 배의 수리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배수량은 5천 톤에 육박하며 골리앗을 10대 정도 실을 수 있습니다. 강화된 에테르 캐논을 50문 장착하고 있고 병력은 500명을 수송 가능합니다. 함명은 하이페리온입니다.”
“하이페리온이라, 그람 제국에서 쓰던 건가?”
“발가드에 의하면 황실의 기함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그람 왕국의 문장도 이 배의 것을 기초로 합니다.”
“아무튼 멋지군.”
세틀러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현 아스테라 대륙에서는 가장 거대한 비행선이었다.
배에는 케인이라는 소신의 파편이 박혀 있는데 대단한 권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신격이다 보니 에테르캐논이나 마법방어에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르마는 더미를 이용해 하이페리온을 직할령에 끌고 왔다.
계류장에 비행선이 고정되자 다들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크다……”
“저렇게 큰 배가 있었다니…….”
“오오, 하이페리온이군!”
발가드는 예상대로 비행선을 보며 기쁨을 표시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대전쟁 당시 기동함대의 기함으로써 수많은 적을 박살 냈다고 한다.
“지금의 비행선은 비행선이라고 할 수도 없지! 50문의 대구경 에테르 캐논을 맛보면 신이라 할지라도 달아날 수밖에 없을 거요.”
“그런 대단한 배가 어떻게 격침됐지?”
“아무래도 기함이다 보니 적의 공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소. 단독으로 엘브랑데 함대 절반을 상대했다면 이해가 되겠소?”
“그럼 엘브랑데의 나이 든 엘프들에겐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겠군.”
“이번 전쟁에는 안 쓸 거요?”
“쓸 이유가 없지. 척탄병만으로도 갈리스토를 휩쓸 수 있는데.”
발가드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중요한 건 갈리스토군을 물리친 다음이지. 상당히 큰 국가이다 보니 집어삼키다가 목구멍에 걸릴지도 모르겠소.”
“아르마가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뭐 그렇다 칩시다. 이번에 난 뭘 하면 되는 거요?”
“당분간은 할 일이 없어. 각지에 배치된 골리앗 부대를 척탄병으로 박살 내야 하거든.”
“그 후에 갈리스토군이 혼란에 빠지면 곧장 수도로 들이닥친다 이거군. 남은 영주들이 과연 항복할지 의심스럽소만…….”
“지갈레온을 보내서 밟아 버리면 그만이야.”
본색을 드러내기로 한 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갈리스토, 판그랄 대공, 더 나아가 자이움과 신성교국까지 거치적거리는 건 전부 밟아버리고 엘브랑데까지 박살 내면 된다.
거기까지 이루면 대륙 통일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나머지 왕국들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기 때문.
발가드는 이 구상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시원시원해서 좋군. 그런데 골리앗은 더 안 쓴다고 하지 않았소?”
“쓸 이유가 없지. 내 입장에서 골리앗은 비효율적인 병기니까.”
“골리앗을 퇴출시키면 나는 실업자가 되겠군. 뭘 하고 살아야 하나…….”
“당분간 그런 걱정은 접어 둬도 괜찮을 거야. 신성교국에서 뭘 할 예정이거든.”
“뭘 말이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대전쟁 당시의 신들을 부활시킬 계획이라도 꾸미는 것 같더군. 언젠가 자네의 100% 힘을 쓸 날이 올지도 모르지.”
“흐음.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
신성교국의 목적은 아스테라 전체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전쟁으로 신들이 다수 소멸되고 권능이 사라짐에 따라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과거 대륙 전체에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교황의 입장에서 보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만했다.
따라서 그들은 필사적이 되었고 대전쟁 당시의 땅을 발굴해 뭐라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번 테라호크의 파편을 찾아냈을 때에는 교국 전체가 기쁨에 들썩였다고 한다.
그걸 자이움에 제공하고 뭘 받아냈는지는 교황만이 아는 영역이겠지.
하여튼 그 후로 교국은 각지에 사제단과 기사단을 파견해 역사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신나게 땅을 파고 있었다.
파는 족족 과거의 유물이나 전투 흔적이 나오는 걸 보면 그런 걸 찾는 데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레오볼드가 자이움 내에 취득한 영지에 있었다.
알테마와 다수 드래곤의 뼈, 그리고 그들과 분전을 벌이다 소멸된 신들이 남긴 파편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실상 대전쟁의 핵심이었고 현재는 카밀라의 병력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곧이어 모의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번 전쟁에 투입될 척탄병 부대가 골렘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골렘이라고 하지만 중량작업을 위해 개조된 녀석이어서 골리앗급의 덩치와 내구력을 자랑했고 기동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에 맞서는 병력은 경량화 된 갑옷을 입고 있기는 했지만 무장이라곤 에테르폭탄 발사기와 전면전에 내세우기엔 초라한 숏소드밖에 없었다.
오로지 골리앗 파괴를 위한 특수부대인 것이다.
따라서 훈련의 강도는 엄청났고 탈락률도 40%를 넘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이 도망가지 않은 것은 레오볼드의 연설 때문이었다.
“적들은 갈리스토의 귀족이다. 그에 반대 그대들은 작위를 가진 적이 없는 평민이지. 그러나, 작위가 전투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대들이 전장에 나아가 해야 할 일은 귀족이라는 볼썽사나운 존재가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골리앗 1기당 현상금까지 걸다 보니 이번 전쟁에서 한몫 잡아 보겠다고 눈에 불을 켠 상태였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게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모의전투가 시작되었고 골렘들이 지상에 막 내려온 척탄병 부대를 포착했다.
원래는 골렘들이 척탄병을 포착하는 상황조차 꽤 어려운 조건이었다.
병력을 수송하는 비행선에는 인비지빌리티가 광역으로 걸려 있어서 찾아내기가 꽤 까다롭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접근을 눈치채긴 하겠지만 갈리스토가 철저히 박살 난 이후일 것이다.
하여튼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척탄병들은 위치가 드러나는 큰 핸디캡을 갖고 있었음에도 침착하게 산개, 엄폐해 골렘들을 박살 냈다.
에테르폭탄의 위력이 워낙 절륜하다 보니 대충 근거리에서 폭발해도 한 방에 무력화되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골렘 몇 마리가 시나리오대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척탄병들은 뿔새를 타고 녀석들을 쫓았다.
콰쾅!
마지막 골렘이 흉부를 파괴당하곤 천천히 쓰러졌다.
지휘관이 슬쩍 레오볼드를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이 확인된 인상적인 전투였다. 포상금을 내릴 테니 오늘 저녁만큼은 허리띠를 풀고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하라.”
“우아아!”
“국왕 전하 만세!”
척탄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카밀라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병사들로 어떻게 골리앗을 상대하나 싶어 참관했는데 에테르폭탄 발사기의 위력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골렘들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파괴당하면, 골리앗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리빙메탈 장갑판을 달지 않는 이상 한 방에 박살 나겠지. 뿔새를 타고 달아나면 잡는 것도 어려워.”
“그러면 골리앗의 의의는 대체 뭐죠? 또 기사들은요?”
“골리앗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어.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지금까지 써온 것뿐이지. 이번 전쟁은 그걸 가르쳐주기 위한 계기에 불과해. 사실상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
저 척탄병들에게 당해보면 이게 전쟁이냐는 불만이 절로 튀어나올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모르면 맞아야지.
* * *
최후통첩장이 전해진 후로 양국은 사실상 전쟁에 돌입했다.
갈리스토는 자국의 모든 골리앗을 소집해 바그란과의 국경에 배치하는 한편 상당한 숫자의 비행선까지 동원했다.
400기가 넘는 골리앗이 전진 배치되다 보니 후방은 뻥 뚫렸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자이움은 사실상 아군이기 때문이다.
그에 맞서는 바그란은 레오볼드와 지갈레온이 나서지 못하는 핸디캡을 안게 되었다.
호사가들은 그걸 몰랐지만 둘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갈리스토가 해볼 만한 전쟁이라는 평을 내렸다.
―블랙 나이트가 있긴 하지만 수출한 물량이 많아서 기사단 전체에 배치된 것은 아니다. 시기를 절묘하게 찔렀다.
―갈리스토의 골리앗은 400대나 되는데 이는 바그란의 3배가 넘는 숫자다. 성능의 우위로 어떻게 해볼 만한 격차가 아니다.
―신성교국과의 교감도 있었다고 하니 지원을 받지 않았을까? 신성기사의 실력은 결코 엘븐 나이트에 뒤지지 않는다.
다양한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갈리스토군은 바그란과 이어지는 5개의 축선을 완벽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축선은 마차가 이동하는 통로로서 두 산 사이에 위치해 있어 매우 중요한 전장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바그란군에는 비행선을 이용한 수송이 있지만 레오볼드와 지갈레온이 나서지 못하는 이상 큰 위협은 아니었다.
―소수 골리앗을 적진에 떨어트려 봐야 각개격파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바그란이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수도에 침입할 게 아니라면 전방의 골리앗 부대를 격파해야 될 텐데.
―수도에 침입할 생각이라면 버려야 할 거다. 갈리스토의 수도엔 대공방어를 위한 에테르캐논이 상당히 많다.
에테르캐논을 이용한 함대전이 최초로 성립된 이후 각국은 위력과 명중률을 늘리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들였다.
지금에 와선 완벽하다곤 못하지만 비행선 상대로는 상당한 명중률을 확보한 상태였다.
수도이고 보면 무슨 수단을 써도 드러난다고 봐야 하고 그것은 곧 격침을 뜻한다.
따라서 갈리스토의 지휘관들은 바그란군이 정면으로 쳐들어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팔카스 2세는 이런 상황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전쟁은 싸우고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고 싸우는 것이오. 장군들은 그 점을 유념하여 비행선을 활용해 바그란군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시오.”
5개의 축선에 배치된 갈리스토군은 진지를 쌓고 마법 함정을 설치하는 등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바그란군은 어찌된 일인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 보니 지레 포기한 것일까?
수뇌부의 의심이 짙어지는 것과 반대로 현장에 나가 있는 병력, 특히 헤이스톤 연락소에 주둔한 기사들이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2주 동안이나 야영을 하다 보니 좀이 쑤신 것이다.
“이 촌구석엔 아무것도 없다고. 하녀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쉿, 그거 들키면 추방으로 안 끝나.”
“추방하고 벌금 좀 내면 끝이지 뭘.”
“그나저나 이번 전쟁은 뭔가 좀 이상한데. 상대가 없잖아.”
“그러게, 이쯤이면 서로 마주보고 인사라도 나눠야 하는데 말이야.”
“벌써 저녁이군. 경계근무도 이제 지겨워진단 말이지.”
“그냥 자도 아무도 모를 거야. 바그란 놈들이 밤중에 쳐들어올 리도 없고.”
골리앗 전투는 야간에 벌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시야석이 설치되어 있긴 하나 대부분의 골리앗은 어둠에 매우 취약했다.
그래서 헤이스톤에 주둔하는 갈리스토군은 야간 경계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핵심 전력이 귀족이다 보니 허드렛일을 하기 싫다는 내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승패를 갈랐다.
어두운 밤, 인비지빌리티와 광학위장망으로 감싸인 비행선 한 척이 주둔지 인근에 도착했다.
비행선에서 내린 것은 20명 남짓한 척탄병 부대와 뿔새였다.
뿔새는 미리 훈련을 받았는지 조심스레 걸었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지휘관인 그랜든은 병력에 지시를 내렸다.
“전방 800미터 지점에 진지 겸 장애물 대용으로 세워놓은 골리앗 5대가 있다. 1분대가 그들을 처리하고 2, 3분대는 좌우로 산개하여 뛰쳐나오는 놈들을 노린다. 4분대는 산을 우회해 후방을 점거하라.”
그랜든은 후방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담당할 예정이었으니 의외로 자청해서 나섰다.
몇 차례 훈련을 참관하고 모의전투까지 해본 결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골리앗으로는 이 전술에 대응할 수 없다. 답은 같은 척탄병을 육성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의문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병사가 주축이 된다면, 뿔새를 타고 그들을 노리는 기사와 마법사도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전장 자체가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랜든의 생각에 이건 발전이 아니라 퇴화였다.
‘그럼에도 전하께선 확신을 가지고 계시다. 그게 뭔지 내 눈으로 확인하겠다.’
산개한 분대들이 발사기 조립을 끝냈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랜든은 에테르 연구소에서 만들었다는 신형 통신구를 쥐었다.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휴대하기 참 편했다.
“발사.”
포포퐁.
귀여운 격발음에 비해 결과는 엄청났다.
장애물을 대신해 우뚝 서 있던 5대의 골리앗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콰쾅!
에테르석이 폭발하자 지축이 흔들리는 충격파와 함께 골리앗들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