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82
281화 악마가 나타났다
아스테라에서 악마란 철로 만들어진 공포스러운 괴물을 뜻한다.
그들은 마계의 위험한 주민이며 마왕의 부하로서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아스테라 주민들이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이 위험한 이웃들은 아스테라의 역사서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였지만 악명에 비하면 의외로 출현 빈도는 낮았다.
최근 수십 년에 이르면 가끔 광산에 출현해 광부들을 죽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영주나 왕이 기겁해서는 광산을 폐쇄시켰고 이는 바그란의 사그리스 은광이 폐쇄된 이유였다.
갱도가 워낙 좁은 만큼 골리앗을 들여보낼 수도 없으니 그냥 광산을 포기하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이 악마들은 계급에 따라 덩치와 힘이 정확히 나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인간이나 엘프는 각 개체마다 키나 체중이 천차만별이지만 악마는 일정한 한계선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가장 덩치가 작고 덜 위협적인 그록의 크기는 작은 수레 정도로 절대 상위 계급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녀석들이 상대하기 편한가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전신이 리빙메탈로 이루어져 있어 엄청나게 단단했고 생명력 또한 끈질겼다.
골리앗의 덩치가 훨씬 더 크지만 그록의 숫자가 워낙 많아 토벌은 참으로 어려웠다.
거기에 상위 악마와 군단장, 마왕에 이르면 이건 아스테라 전체가 벌벌 떨어야 하는 지경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아스테라 역사상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거의 없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런 사례가 간혹 있었지만 엘프들이 기록을 숨긴 덕분에 사람들은 내막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정보가 제한된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족을 어떻게 상대해야 되는지 잘 몰랐다.
이는 마족을 가장 잘 아는 엘브랑데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십 년 만에 대규모의 에테르 폭풍이 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이 문은 아스테라 곳곳과 연결되었고 하나는 하필 엘브랑데의 메데아 한가운데에 열렸다.
갑자기 나타난 푸른 문에 젊은 엘프들이 의문을 가졌을 때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게, 게이트다!”
“마족이다! 악마들이 쳐들어온다!”
엘프들이 우르르 흩어지자 게이트에서 악마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하급인 그록부터 시작해서 상위종인 하이펙스, 심지어 지휘관 개체인 타이런트까지 보였다.
이들은 수도 메데아에 도착하자마자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마침내, 우리가 왔다!
척박한 행성인 마레에서 사는 마족에게 있어 아스테라는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대부분의 악마들은 아스테라를 빼앗아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고 이는 상위 개체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마레는 군사를 늘리고 둥지를 확장하는 데에는 이점이 있었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모로 불편했던 것이다.
이런 감정은 마족이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아인종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나의 종족임을 말해 주지만 언제나 그렇듯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휘관 타이런트는 사마귀 형태의 악마였는데 주변의 2층 건물을 내려다볼 정도로 거대했다.
그는 앞발에 달린 블레이드로 건물을 가볍게 부수며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여기는 엘프들의 수도가 분명하다! 여왕께 진상한다면 크게 기뻐하시겠지! 들어라!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죽여라!
그간 루시아라는 새로운 마왕에게 시달리다 보니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여기서 풀 수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수도 메데아를 지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에테르 폭풍으로 인한 게이트 형성은 단발적이고 일시적이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지배를 위해선 영구적인 게이트가 필요한데 그건 마왕 서열 1위 아프록시아조차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악마들이 날뛰자 엘븐 나이트가 출동했다.
이들은 드리즈덴의 직속부대로서 수도방어도 담당하고 있었다.
골리앗에 작으나마 신격을 탑재하고 있어 전투력은 이전의 벨리알급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악마를 죽여라!”
“총통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엘븐 나이트들이 결사적으로 나서자 전선이 형성되었다.
수많은 그록은 확실히 위협적이었지만 덩치가 작았는지라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신형 벨리알급을 당해내지 못했다.
단순히 발로 차는 동작에도 휙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고 대검으로 찍으면 즉사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하이펙스쯤 되는 개체에 이르면 그리 호락호락 당하진 않았다.
그리고 지휘관인 타이런트는 수많은 골리앗과 동시 교전을 치르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전투력을 과시했다.
―너희들을 죽이고 세계수를 불태우리라! 그것이 우리의 숙명!
엘프에게 있어 엘드그라실은 절대적인 존재이자 신앙을 바칠 대상이었다.
“이 사마귀 같은 악마놈이!”
“네놈의 배를 가르고 안에 뭐가 있나 보겠다!”
흥분한 몇몇 엘븐 나이트가 나서자 타이런트는 짐짓 놀란 척 뒤로 물러섰다.
신형 벨리알급이 섀도우 스텝을 동원해 다가서는데 땅에서 그록 두 마리가 튀어나와 달라붙었다.
“이, 이거 놔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흐하하하! 죽어봐라!
쾅!
그록 2마리의 배가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폭발을 일으켰다.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골리앗이었지만 그 폭발에는 견디지 못하고 검은 연기를 흩날리며 주저앉았다.
“미, 미친…….”
“저놈들 각 개체마다 지능이 있는 거 아니었나?”
부하를 자폭용으로 쓰는 건 이전의 마족에게선 보이지 않았던 전술이었다.
루시아란 강력한 마왕이 나타나 휩쓸다 보니 그런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하고서도 형편없이 밀렸다는 거지만 엘프들이 알 길은 없었다.
지휘관 타이런트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블레이드를 내밀었다.
―어떠냐, 그록은 아직도 많이 있다.
아직도 열려 있는 게이트에서 수많은 악마들이 몰려나왔고 대광장 전체가 악마들로 가득 채워졌다.
엘븐 나이트들은 그 숫자에 완전히 질려 버렸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메데아 상공에 비행선이 떴고 크리슈나라는 신격까지 동원되었다.
대전쟁 당시에 소멸된 것으로 알려졌던 엘븐 판테온 중 하나였다.
엘프를 빼닮은 거대한 여인이 허공에 등장하자 엘븐 나이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오오오!”
“승리를 위하여! 크리슈나를 위하여!”
수도 메데아에 대전투가 벌어졌다.
* * *
“3등급 에테르 폭풍이 감지되었습니다. 게이트는 약 5분 정도 유지되다 소멸될 전망입니다. 위치 표시하겠습니다.”
아스테라 대륙 곳곳에 푸른 점이 빛을 발했다.
갑자기 열린 이 에테르 폭풍과 게이트 현상은 레오볼드와 아르마조차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간 아무런 전조도 없었기 때문이다.
의심되는 게 있다면 루시아가 들은 오메가 원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의사가 전달되자마자 마레의 에테르가 격렬히 흔들리더니 이윽고 폭풍이 생성되었다.
“의사 전달에 사용된 미약한 에테르로 폭풍을 만들어 내다니 엄청나군.”
“오메가 원이 이전보다 더 강해진 게 확실합니다.”
“대체 어디에서 힘을 기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에테르 우주에 들어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부분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루시아라는 계기가 없으면 들어오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루시아만 확보하고 있으면 오메가 원의 진입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
우려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는데 그녀의 목소리에 루시아가 타락할 가능성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오메가 원의 유혹을 떨쳐내고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또한 수호자라는 단어도 신경 쓰였다.
“플레이그가 수호자라니 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세운 가설이 하나 있습니다.”
아르마가 테라와 마레를 포함한 행성계에 커다란 구를 씌웠다.
“이 에테르 우주는 들어오기는 어려워도 나가기는 상당히 쉬운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개 신격이 생명체의 영혼을 과거로 보낼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 테라호크는 대단한 신이지만 본체도 아닌 유물로 시공간을 뚫고 영혼을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엘드그라실의 힘을 빌렸음이 분명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레오볼드는 이 우주에 들어오기 위해 자그마치 선지자가 열어준 워프게이트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
그 막대한 에너지를 한낱 아스테라의 신 따위가 동원할 수는 없었다
“제가 세운 가설에 따라 에테르 우주의 구조를 그려보면 이렇게 됩니다.”
아르마가 홀로그램에 표시한 건 알이었다.
“계란처럼 보이는데.”
“이 우주 전체가 일종의 인큐베이터로 추측됩니다. 아스테라는 침대로 볼 수 있겠고 현생 종족들은 침대에 누워 울고 있는 아기에 비유할 수 있겠죠.”
“과연…….”
아스테라 신화에서 라사는 수많은 종족을 창조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냥 방치하는 게 아니라 여러 용품을 사고 교육을 준비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준비된 게 바로 아스테라라는 행성이었다.
“그런데 플레이그가 수호자라는 건 그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이 알을 외부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한 역할이 아닌가 하는 거죠. 원래는 그런 역할을 맡았으나 어떤 계기로 변질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변질이라… 오메가 원 본인은 그걸 변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아스테라의 신격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일종의 알고리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무언가가 끼어들어 알고리즘에 버그가 일어난 거죠.”
“그게 라사는 아니겠고…….”
이쪽에서 알지 못하는 정체불명의 무엇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메가 원이 거짓말을 했다면?
“단순히 루시아를 꾀어서 문을 열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30% 정도…….”
“무시할 수 없는 수치로군.”
어쨌든 당장 루시아가 타락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목소리의 유혹이 잦을수록 그녀 안의 레오볼드가 커지는지 둥지 안에 조각상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저게 단순한 충성심이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루시아가 인간이었다면 받아주면 되겠지만 리빙메탈로 만들어진 생명체이다 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아르마는 그녀와 약속한 것이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말했다.
“현재 우리의 기술로도 이 게이트는 간단히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우리에게 유리할 것 같아?”
“닫지 않는 쪽이 훨씬 낫죠. 우리 일을 대신해 줄 테니까요.”
“그럼 놔둬.”
21세기 지구에서 그러했듯 레오볼드는 적당한 혼란을 원한다.
그것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혼란이 아니었다.
언제든 중단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통제된 혼란이라면 그의 계획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자이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이번 일을 계기로 가뜩이나 낮은 황제에 대한 충성도가 바닥으로 내려갈 것이다.
반면 레오볼드가 있는 바그란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므로 상당한 민심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평민들은 가운데에 끼여 피해를 입겠지만 아스테라 전체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피 없이 진정한 변혁을 이루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레오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항상 무언가를 저울질해야 하는 삶을 빨리 끝내고 싶은데 말이야.”
그는 원래 플레이그와 싸우는 군인이었다.
어쩌다가 인류 유일의 생존자가 되어 독재자로 살았고 이제는 판타지로 와서 황제 흉내까지 내려 하고 있었다.
수십 년째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다 보니 많이 지쳤고 가끔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단지 마지막 의무를 다하기 위해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르마가 보기에 레오볼드는 지배자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절대적인 기준점이 될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레오볼드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포기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그를 부른 것도 아마 그래서이리라.
‘포기할 용기가 없다면 무언가를 가질 자격 또한 없는 거야…….’
하지만 그가 자신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인공지능의 바람이었다.
하여튼 플레이그의 아스테라 침공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다.
엘프들은 이게 다 레오볼드 때문이라며 거품을 물겠지만 한 대 맞으면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레오볼드는 자이움의 황도에 나타난 플레이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슬슬 가보자고.”
그나저나 루시아가 나타나면 어쩌지?
일단 싸우는 척은 해야 할 텐데 어쩌면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도 몰랐다.
* * *
자이움의 황도에 나타난 악마들은 제국 신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엘프들은 그럭저럭 마족에 대한 지식이라도 있었지, 이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이들에게 악마란 평상시에 볼 일이 없는, 대전쟁과 같은 먼 과거에 출현한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놈이 게이트에서 한둘도 아니고 수백 마리나 튀어나왔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으아아악!”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다!”
“몸이 철로 되어 있다! 마법도 안 먹히는 놈들이라고!”
하이 나이트는 물론이고 친위대까지 출동했으나 이들을 모두 틀어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숫자에서도 밀렸지만 대 악마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악마들은 목숨을 도외시하고 밀어붙이는데 기사들의 전술이란 골리앗의 덩치를 믿고 전열을 형성해 힘겨루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상대가 같은 골리앗이라면 통하겠지만 악마들은 기습을 하는 병종도 있는 게 문제였다.
두두두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관도가 파헤쳐지더니 급기야 골리앗 부대의 배후에서 그록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이 녀석들의 앞다리는 삽 모양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땅굴을 파서 배후를 기습한 것이다.
“뒤다! 뒤가 뚫렸다!”
지휘관이 경악해서 소리쳤고 그록 몇 마리가 후다닥 골리앗에 달라붙었다.
콰쾅!
폭발음과 함께 골리앗 부대가 형성한 진형에 구멍이 생겼고 그 틈을 하이펙스가 난입해 닥치는 대로 찍어 눌렀다.
친위대에는 블랙 나이트도 두어 기 섞여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진형이 파괴되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힘이라면 악마들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1선에 나선 골리앗 부대가 전멸하자 악마들은 저 멀리 장엄하게 솟아 있는 황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곳에 왕이 있다. 죽여라.
수백 마리의 악마들이 황궁으로 달렸다.
친위대는 물론이고 최후의 보루인 황궁 경비대까지 튀어나왔지만 이들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바라크 황제는 잠옷 차림으로 튀어나와 간단한 상황을 보고받고는 급히 지하통로로 향했다.
“악마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아무런 징조도 없이?”
“예! 푸른 문이 열리더니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피해는?”
“1차 방어선이 무너졌고 2차 방어선을 형성했지만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진 않습니다!”
“척탄병 부대는 어찌 되었나?”
“그것이… 아무래도 실전을 겪어보지 못한 병력이다 보니…….”
말꼬리를 흐리는 것으로 봐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버린 것 같았다.
원래 골리앗을 타고 싸우던 기사들인 만큼 그런 괴물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면 몸이 굳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오볼드는 그것을 우려해 골리앗을 동원하면서까지 혹독한 훈련을 시켰지만 자이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투를 치러보기도 전에 부대 전체가 와해되었다.
“정말이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황제는 혀를 차며 기사들을 따라 지하통로를 걸었다.
뒤를 이어 황족들이 줄줄이 내려왔다.
그 행렬에 귀족은 없었고 그것이 바라크 황제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번 일을 가지고 또 난리를 쳐대겠군.’
위급 상황이 생기면 황제가 제일 먼저 피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혼자만 튀어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 상황에서 지도력을 발휘해야만 진정한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바라크 황제는 그런 점에서는 영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
방계라서 권력기반도 취약했고 무엇보다 신하인 판그랄 대공이 죽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레오볼드 그자는 보통 인간이 아니란 말이다.’
이유야 어쨌건 이번 일까지 알려지면 황제의 권위가 실추될 것은 분명했다.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황제가 그렇게 사라지고 나자 황궁에 남은 귀족들과 관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친위대에 의해 지하통로가 봉쇄되다 보니 도망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제국의 황궁은 그 장엄한 모습에 비해서는 접근하는 통로가 터무니없이 제한되어 있었고 이는 카이로스 사태 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미친 엘프에게 황족 대부분이 떼죽음을 당했음에도 황궁의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보니 보수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좁은 통로 문제는 방치되다시피 했다.
덕분에 황궁에서 살던 귀족이며 관료들은 좁은 통로에 한꺼번에 몰렸다가 몇 명이 깔려죽고 통로가 완전히 막히는 대참사를 맞이했다.
그런 아비규환이 펼쳐지는 도중에도 악마 군단은 어김없이 진군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이제 끝장이군…….”
“우린 죽었어! 다 죽었다고!”
“황제가 우릴 버렸다!”
“직계도 아닌 한량을 데려왔을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당신들 전부 반역자야!”
“죽게 생겼는데 반역은 무슨!”
“애초에 바라크 그놈은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어!”
워낙 많은 사람이 입구에 한꺼번에 몰려있다 보니 누가 한 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쪽을 보십시오! 비행선입니다!”
“크다, 크다!”
“저건 바그란의 하이페리온이다!”
자이움의 어지간한 귀족들은 이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활약한 하이페리온급 비행선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여느 비행선의 몇 배나 되는 덩치이다 보니 은근히 시샘도 했고 비슷한 급을 건조하자는 말도 나왔던 것처럼 여러모로 이슈를 몰고 다닌 주인공이었다.
에테르 공학의 극치를 달린 그람 제국의 기함이었던 만큼 현재의 자이움이 건조하기엔 어림도 없었고 판그랄 대공을 쳐낸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받아오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정작 황제는 그 참상에 할 말을 잃고 이쯤에서 덮자는 의사만 전달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정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자이움의 귀족들에게 하이페리온의 등장은 구원과도 같았다.
그러나 정작 함교에 있던 레오볼드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었다.
악마 무리들 중 루시아의 부하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무리와 싸우다가 게이트가 열리자 본능적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옆에 있던 카밀라는 그의 말을 듣고는 놀랐다.
“저 악마들 중 일부가 당신의 부하라고요?”
“정확히는 부하의 부하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 루시아라는 요정이 있었지?”
“있었죠. 그 쬐그만 주제에 자존심만 높았던… 가만, 혹시 그 요정이?”
“쟤네들의 여왕이야. 지금은 마계에 가 있지. 갑자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부하들이 적과 섞여 들어왔어.”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