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93
292화 마지막 의무
대신전 내부에 위치한 미궁은 생각보다 길고 또 복잡했다.
레오볼드는 아르마의 안내에 따라 석벽으로 만들어진 좁은 복도를 걸었다.
라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수정의 홀까지는 이제 금방이었다.
그는 홀의 입구 앞에서 잠시 석재에 앉아 쉬기로 했다.
힘들어서는 아니고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여기에 들어올 리 없으니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아마도…….
“레오볼드 님…….”
가쁜 숨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레오볼드는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마르그레타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바라보다 석재에 고개를 돌렸다.
앉으라는 의미다.
“아르마가 보내주던가요?”
“네… 사과하고 싶다고 하니… 그것보다 아까 죄송했어요. 제가 괜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괜한 소리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생각의 변화는 없다는 뜻이군요.”
그녀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에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제가 잘못 판단하고 말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일국의 황녀쯤 되면 주변에서 떠받들기만 하니 판단력이 흐려지기 쉽다.
레오볼드는 그나마 아르마가 있어 정확한 데이터와 진실을 알려 주지만 그녀는 어떨까?
“사과하실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생각이 다른 것뿐이죠. 만 명의 인간이 있다면 만 개의 사상이 있으니까요.”
“만 명의 엘프… 만 개의 사상… 드리즈덴 의원이 한 말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그는 엘프가 사상적으로 뭉쳐야 한다고 했었는데.”
“통치자가 절대 권력을 가지기 위해선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는 게 편하니까요.”
이 대목에서 마르그레타는 물끄러미 그를 쳐다봤다.
사실 밖에서 그녀가 한 말은 욕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 사과하러 온 것인데 그는 감정의 동요가 없어 보였다.
물론 레오볼드라는 인간 자체가 무감정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지갈레온이 뻘짓을 하면 어이없이 웃기도 하고 가끔은 그랜든의 딸과 놀아주며 귀여워하는 등 인간다운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마르그레타가 놀란 것은 그를 저주하고 욕하는 자가 한둘이 아님에도 어떻게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였다.
‘만약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야…….’
실제 그녀는 배반자로 몰린 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운 전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날씬한 몸이 피골이 상접해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상황조차 레오볼드가 처한 입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르그레타가 그걸 언급하자 그는 잠깐 생각하곤 말했다.
“내 고향 지구 얘기를 잠깐 해드리죠. 나는 거기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욕을 먹었습니다. 그곳의 인구는 아스테라보다 훨씬 더 많은 80억이었습니다. 그중 30% 정도는 아마 내 이름을 알 겁니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었죠.”
“좋은 의미가 아니라면 어떤…….”
“아스테라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인 단어를 내 이름 앞에 갖다 붙이면 될 겁니다. 그걸 수십억 명이 내뱉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
그걸 상상해 보던 마르그레타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고 숨이 가빠져오는 것을 느꼈다.
말이 30%지 그의 존재를 모르는, 혹은 의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를 적대시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 전체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러나 레오볼드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게 되더군요. 그게 답니다.”
“정말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어떻게 버티셨나요?”
“버텼다기보다는 그게 내 의무였죠. 나는 인간 최후의 생존자였습니다. 수십억이 사망하고 나 혼자 살아남았죠. 그런 내게 다가온 존재가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나는 그의 도움을 받아 인류를 구할 수 있었고, 마침내 여기에까지 올 수 있었죠. 이제 그가 바로 눈앞에 있는 겁니다.”
수정의 홀을 가리키는 레오볼드의 얼굴 옆모습에서 마르그레타는 가장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신앙을 가졌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게 된 것이리라.
마르그레타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다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너무 경솔했네요.”
“그렇다면 일 하나를 맡아 주십시오.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만 황녀님밖에 적임자가 없습니다.”
“어떤 일인가요?”
“엘프 정착도시를 만들 겁니다. 엘브랑데에서 탈출한 엘프들을 거기에 머무르게 하십시오. 적당한 생필품과 식량 지원은 할 테니 앞으로 거기에서 살면 됩니다.”
제 발로 엘브랑데에서 나올 엘프가 몇이나 될까 의심이 들었지만 레오볼드가 말했다면 근거가 있을 것이다.
마르그레타는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생각했다.
재상부에 소속되어 행정 일을 하고는 있지만 아르마의 지시에 따르는 것뿐이라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배운 것들이 적지는 않아서 아르마 없이도 얼추 해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걸 동족을 위해 쓸 때가 온 것이다.
“엘프 정착지를 맡으라는 말씀이시군요…….”
“당장은 초라하겠지만 지원이 집중되고 시간이 지나면 크게 발전할 겁니다. 머지않아 자치령 수준으로 변할지도 모르죠. 황녀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셔야겠습니다.”
“제가… 가능할까요?”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 감정적인 부분을 조금 버리셔야 할 겁니다. 그만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에는 숫자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은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었다.
어딘가에 혜택을 베풀면 다른 부분에서 부족하게 되어 있다.
자원이 무한대가 아닌 이상 감정보다는 이성, 즉 숫자에 기반하여 정책을 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레오볼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카밀라와 마찬가지로 마르그레타에게 많은 것을 맡기기 위함이다.
앞으로 위정자가 될 사람인데 감정에 휘둘려 정책을 그르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떠나도, 아르마가 없어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야 돼.’
그건 지구를 떠나면서 배성민 혼자에게 일을 맡겼던 것의 반성이었다.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현 12개의 메가시티엔 그가 남긴 재산을 알뜰하게 쪼개 미래를 위한 양분으로 써먹는 것보다는 당장 먹어치우고자 하는 세력만 남았다.
이해는 간다.
수백 차례에 걸친 플레이그의 공습으로 땅과 바다가 오염되었고 인구는 1/4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급히 외부에서 인원을 수급하다 보니 엄청난 부작용이 불어 닥쳤다.
외부인들이 그동안 버려졌던 것까지 한꺼번에 청구한 것이다.
그 비용이 장난이 아니다 보니 군단타격함대까지 해체할 정도가 되었다.
‘적당히 배제했어야 하는데 표가 중요했나 보군.’
그나마 배성민은 레오볼드의 정책을 이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의회와 싸우느라 진을 다 빼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에테르 오리진이 완성되지 않는 이상은 무리였다.
설령 그게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꼭 지구에 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의무는 21세기의 인류를 플레이그의 위협에서 구해냄과 동시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아스테라를 발전시키고… 선지자를 만나면 내 의무는 완전히 끝이 나는군.’
그때가 되면 비로소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오볼드는 자신을 쳐다보는 마르그레타에게 눈인사를 한 후 일어섰다.
선지자의 흔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그냥 에테르석이잖아.”
레오볼드는 텅 빈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석재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에테르석을 발견했다.
라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수정이라 해서 대단한 걸 기대했는데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목소리만 들리면 뭐 문제는 없을 테니까…….”
에테르석에 손을 대자마자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다가왔다.
그는, 아니, 그녀는 붉은 머리에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옷차림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저건 행성인가? 태양?’
뭔가 평범한 스케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는 너무도 커서 행성이 손에 들어갈 정도였다.
실제 크기가 그렇다는 건 아니겠고 문명의 수준을 따져보면 그 정도라는 이야기겠지.
그 행성들 중에는 지구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아주 많았다.
‘지구는 없군… 라사가 돌보지 않은 문명이라는 뜻인가.’
하지만 선지자의 유물이 분명히 왔었는데.
레오볼드가 행동하긴 했지만 그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인류를 위협에서 구해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참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는데 갑자기 시선이 마주쳤다.
자세한 외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에 호의를 갖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당신을 뵙게 되는군요. 저는 레오볼드라고 합니다.”
―진짜 이름은 그게 아니지요? 우리의 후예여.
선지자쯤 되다 보니 뭐든지 다 알고 있나 보다.
레오볼드는 5년 만에 그 이름을 꺼냈다.
“유… 지하라고 합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요. 실제로 당신은 많은 일들을 해왔죠. 우리가 남긴 흔적을 따라서.
“덕분에 인류를 구할 수 있었죠. 이제 아스테라 일을 끝내게 되면 비로소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제가 해왔던 것들을 검증받고 싶습니다. 만족하십니까?”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라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레오볼드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만족하냐고요? 그 누구도 당신 같은 일을 해내지는 못할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그걸 포기하고 우리가 남긴 흔적을 따라왔군요.
“애초에 저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것이라고 할 수 없죠.”
―시간대가 달라서 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건가요?
“플레이그가 저를 제외한 인류를 절멸시킨 그때, 제 인생의 시계바늘도 멈췄습니다. 21세기의 지구도 아스테라도 제 고향은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봐야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는 않는다.
22세기의 유지하는 인류와 함께 죽었다.
남은 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일종의 알고리즘이었다.
분명 그는 살아 있었지만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걸 감안한다면 알고리즘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리다.
차라리 아르마가 그보다는 인간적일 것이다.
레오볼드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보석 같은 눈동자에서 보이는 것은 수많은 행성들이었다.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나면 쉬려는 거군요. 이해해요. 당신은 많은 일을 했고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켰어요. 충분히 쉴 권리가 있죠. 하지만 당신은 쉬어선 안 돼요.
“무엇 때문입니까?”
―왜냐하면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죠.
그녀의 눈동자가 확대되며 우주가 펼쳐졌다.
아주 먼 곳에 거대한 구조물이 보였다.
흔히 다이슨 스피어라고도 불리는 항성 전체를 감싸고도 남는 링 같은 형태였다.
선지자가 만든 것으로 짐작되었는데 불행하게도 플레이그 퀸이 그곳에 있었다.
“오메가 원… 어디에 있나 했더니…….”
링 월드를 침식한 그녀의 둥지는 매우 혐오스러워 보였다.
수많은 플레이그들이 주변을 돌고 있었는데 명왕성 주역에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규모가 큰 것 같았다.
레오볼드가 아스테라로 와서 에테르 오리진을 만든 것처럼, 오메가 원 또한 착실히 전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기를 어떻게 알고 갔을까?
선지자는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저들의 운명은 저게 아니에요. 지금의 저들은 임무를 망각하고 폭주하는 위험한 존재에 불과하죠.
“수호자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의미는 뭡니까?”
―수호자…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수많은 문명을 지키기 위한 존재들… 요람을 보호하는 지킴이이자 숲의 파수꾼…….
“그런 존재들이 왜 타락했을까요?”
그녀는 말 대신 레오볼드에게서 떨어졌다.
―당장 우리가 개입하긴 어려워요. 그러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플레이그를 족치는 건 저의 의무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때가 되면 우리는 동등한 위치에서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요.
지금 하고 있는 건 대화가 아니란 뜻이다.
레오볼드가 고개를 숙이자 그녀의 목소리가 와닿았다.
―지금의 수호자들은 예전보다 더 강해졌어요. 그러니 당신에게도 힘이 되어줄 만한 것이 필요하겠죠. 적당한 것을 보냈으니 곧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죠.
“꼭 만나러 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레오볼드는 수정의 홀 가운데에서 정신을 차렸다.
“아르마, 뭔가 달라진 거 있어?”
「마스터의 바이오칩에 항해도 데이터가 들어왔습니다. 신전에 있던 것과 같은 종류입니다.」
“진짜 선지자의 고향으로 안내해 주는 항해도인가 보군. 거기에 오메가 원이 있어.”
「선지자와의 대화를 통해 유추해봤을 때 현재의 전력으로는 승산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본격적으로 함대를 만들어야겠어. 아직 이쪽에 들어오지는 못하는 모양이니.”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선지자는 왜 우리라는 단어를 썼는가.
왜 수호자는 타락해 플레이그가 되었는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단 족치고 나서 풀어보면 되는 문제였다.
레오볼드는 오랜만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 구석구석에 상쾌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간접적으로나마 선지자를 만나서 그런가? 뭔가 안개 속에서 길을 찾은 기분이야.”
「다행이네요. 요즘 마스터께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풀어 드리려 노력하던 중이었는데요.」
그게 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레오볼드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마르그레타와 함께 신전 밖으로 나왔다.
마지막 의무라 생각했던 선지자를 만났지만 그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해왔던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답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맙다는 말은 진짜 만났을 때 해야겠군.’
전보다 강해진 오메가 원과 플레이그를 상대해야 하지만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아르마에게 지시를 내렸다.
“선지자의 고향을 점령한 플레이그를 족쳐야겠어.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선지자의 선물이 기다려지네요.」
곧, 이라고 했으므로 조만간에 올 것이다.
레오볼드는 부모에게서 선물을 받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 * *
자이움의 바라크 황제는 엘브랑데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며칠 뒤에야 접했다.
그렇게 늦어진 건 관료들이 정보의 정확성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락 좀 안 되는 걸 가지고 멸망했다고 헛소리를 하는 놈들은 대체 누구야?
―엘프들 자존심 알잖아? 그놈들은 멀쩡했을 때에도 연락 안 했어. 이쪽이 황궁을 내세우면 들어주는 척을 했을 뿐이지.
엘프 특유의 꼬장꼬장한 자존심은 의사소통에 많은 장애를 가져왔다.
그래서 자이움이 엘브랑데와 연락을 하기 위해선 무작정 기다리거나 황제 혹은 재상이 직접 나서야 겨우 성사되곤 했다.
애초에 엘브랑데가 자이움에 바라는 것이 별로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환경이다 보니 소통도 일방적이었고 엘브랑데 내부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드문 편이었다.
일단 연락이 되어야 이것저것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그래서 연락을 맡은 관료들은 엘브랑데 멸망설을 일축했다.
그 거대한 제국이 갑자기 멸망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연락의 부재가 유례없이 길어지고 무역을 담당하는 기관마저 이거 좀 이상하다고 보고를 올리기 시작했다.
“무역선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분명 이번 달에 에테르석을 공급하기로 했었는데…….”
“이미르 공화국 쪽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운틴포지 포위에 들어갔던 엘브랑데 원정대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바그란에서 거대한 배를 봤다는 이야기가 떠돕니다. 하이페리온호의 수십 배나 된다고 합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는 얘기뿐이었다.
바라크 황제는 직속 조사대를 꾸려 각지에 파견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엘드그라실이 불타오르고 메데아가 증발했음. 수십만 명의 엘프들이 엘브랑데를 탈출하는 중임.
―엘브랑데의 수뇌부는 대부분 사망했고 정부 조직도 마찬가지임. 다른 도시는 비교적 멀쩡하지만 행정망이 붕괴되어 제대로 구실을 하고 있지 못함.
―이번 사태의 주범은 바그란에서 만든 신형 비행선임. 사실 비행선이 아니라 섬이 떠 있는 것 같음.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하군…….”
제국의 여러 기관에서 비슷한 보고를 해오고 있었다.
바그란에 직접 물어보면 편하겠지만 바라크 황제는 레오볼드에게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쯤 되면 바그란은 자이움의 속주국이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바그란의 각종 문화와 지폐 등이 자이움에 침투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 자이움의 사교계는 바그란 산이 아니면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으니 말 다했지.
그렇기에 바라크 황제는 더더욱 레오볼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어전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으나 뚜렷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엘브랑데가 멸망했다는데 뭘 어떻게 할 것인가?
“바그란의 동태는 어떻소? 당장 전쟁을 준비하는 분위기인가?”
“반다스 왕의 발언 모두를 보고하시오. 토씨 하나도 빼놓거나 바꾼다면 그 즉시 철퇴가 내려질 거요.”
“엘브랑데에 정찰용 비행선을 파견하겠소. 직접 가서 보고 오시오.”
얼마 후 나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바라크 황제는 그 거대하던 엘드그라실이 잔해만 남은 것을 보고 휘청거렸다.
메데아는 아예 잿더미로 변했고 주변의 숲은 지금까지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진짜 멸망한 건가……? 대체 어떻게……?”
“목격자들의 증언을 모아 보면 거대한 배… 같은 것들이 와서 공격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마침 바그란에서도 같은 배의 목격담이 있었고요.”
“대체 얼마나 크기에 그런 소문이 나도는 거요?”
“하이페리온호가 그리폰 옆의 독수리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합니다.”
“…….”
바라크 황제는 금방이라도 그 배들이 자이움에 몰려와 닥치는 대로 공격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솔직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레오볼드는 공공연히 영토 확장에 욕심을 드러내었고 갈리스토와 타소스를 기어코 합병했으니까.
자이움에 탐욕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다급해진 황제는 즉시 알테마에게 연락을 취했다.
“목소리가 급하구나. 엘브랑데의 멸망을 본 것이냐?”
“어떻게 하면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곧 있으면 본국에 쳐들어올지도 모릅니다!”
“좋은 방법을 알려주마. 우선 모든 코어를 내게 바쳐라.”
“그거면 되겠습니까?”
“우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두 번째는 쓸 만한 기사와 마법사를 보내거라. 요긴하게 쓸 일이 있으니.”
코어는 그렇다 쳐도 기사와 마법사는 왜 보내라는 걸까?
바라크 황제는 알테마가 새로운 육체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거대한 에테르 하트를 만들기 위해 많은 생명이 필요해졌다는 것도 말이다.
쉽게 말해 에테르 감응력이 뛰어난 인재를 제물로 바쳐서 하나의 육체를 완성시키는 게 목표였고 황제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반다스 그자를 죽일 수 있는 겁니까?”
“라사만 소환할 수 있다면 가능하고말고.”
“그 후엔 제게 신생 그람 제국을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나쁠 것 없겠지.”
대충 둘러대는 말에 바라크 황제는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어전회의를 다시 열어 알테마에게 바칠 제물을 손수 지명했다.
소식을 들은 레오볼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알테마가 소환한다는 라사는 진짜 라사일까?
아니면 그 비슷한 다른 존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