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296
295화 긴 기다림
레오볼드는 아스테라에 도착한 지 5년 만에 인류제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는 아스테라가 본격적으로 통일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동시기 지구는 분열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전성기 12개의 메가시티를 자랑했던 구 인류연합은 동아시아-북태평양을 아우르는 신 인류연합과 UN(연합국), 그리고 기타 세력으로 분리되었다.
기타 세력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것을 생각하면 실질적으로는 신 인류연합과 UN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두 세력의 국력비는 메가시티의 숫자로 따지면 1:2로 인류연합이 크게 불리하지만 캄차카 반도의 대규모 스마트팜과 화성기지 등 굵직굵직한 시설을 다수 보유했다.
그에 반해 UN은 6개에 이르는 메가시티와 아메리카-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영토의 태반이 폐허란 것을 감안한다면 그리 우세하다고는 할 수 없었고 내부에 세력이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여러 메가시티의 위치가 다르다 보니 목적도 앞으로의 정책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의사 결정에 많은 장애를 일으켰다.
그렇다고 신 인류연합은 단합이 잘 되는가 하면 전혀 아니었다.
배성민 대통령은 아웃사이더를 아무런 제한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의회의 건의에 할 말을 잃었다.
아웃사이더란 자격 미달로 메가시티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원래 그들의 숫자는 70억에 가까웠으나 플레이그에 의한 십수 년의 공습 끝에 8억으로 줄어들었다.
태반이 아포칼립스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생활했음을 감안한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이 현 인류연합과 유지하 전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연스레 배성민의 언성이 높아졌다.
“장난합니까? 옛 중국 땅에 있던 인구가 2억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을 어디에 분산 수용합니까?”
상원 인구부동산관리위원회 소속 장자양 의원은 짐짓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대통령님. 곧 선거가 다가옵니다.”
“내 선거니까 잘 압니다.”
5년 전 도입된 새로운 대통령제는 5년의 임기를 가지며 재임이 가능했다.
유지하 전 대통령이 사라진 뒤 몇 개월 동안 혼란에 빠져 있다가 배성민 의원의 주도로 그렇게 확립된 것이다.
당시엔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이 그밖에 없었던 터라 무리 없이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인류연합엔 여러 세력이 생겼고 경쟁자도 많아졌다.
그중 직접적으로 배성민의 입지를 위협할 만한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되지만 갑자기 투표 인구가 확 늘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중국계인 장자양 의원은 바로 그걸 노리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배성민 다음.
그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2억이라고 해도 전체를 들이자는 건 아닙니다. 그 수를 무슨 수로 먹여 살리겠습니까? 우선적으로 2천만 명 정도면 저희도 대통령님께 힘을 실어드리겠습니다.”
“2천만 명이라…….”
“재임하셔야죠. 전 대통령의 유산을 지키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음…….”
배성민은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싫어 붉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류연합을 존속시키기 위해서였다.
비록 전성기의 1/4로 줄어들었지만 상당수의 시설을 확보하고 군단타격함대의 일부까지 보존하고 있으므로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목표는 유지하 전 대통령이 돌아올 때까지 현 세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현재까지는 그럭저럭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함대를 해체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그 함대를 유지해서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싹트고 있었다.
―배 대통령은 타이탄의 자원을 예로 들던데 거기에 있는 자원은 지구 내에서도 얼마든지 캘 수 있다.
―군단타격함대의 순양함 1척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연간 국방 예산의 4%에 달한다. 그 순양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초계나 위력 시위 정도 아닌가? 이게 수지가 맞나?
―마침 연합국 쪽에서도 감축협정을 내세우고 있다. 이번 기회에 함대를 해체해서 재개발에 쓰면 좋겠다.
사람들의 시선은 바야흐로 기존 땅의 재건에 쏠렸다.
메가시티는 안전하고 좋은 시설이지만 너무 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제 플레이그도 사라졌으니 버려졌던 땅을 수복할 때가 왔다고 보는 것이다.
그걸 부추기듯 상원에서도 몇몇 의원들이 서울로 나가 땅을 살펴봤고 많은 시민들이 자리를 선점하기 바빴다.
백미는 반쯤 무너진 은마 아파트였다.
1970년대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몇 차례 재건축 붐이 일었음에도 결국 성사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원 소유주 중 살아 있는 사람이 극히 드물고 기존의 등기가 증발했기에 선점하는 사람이 곧 주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기에 지금 한반도의 서울, 그중에서도 핵심 지역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메가시티 사우스의 시민들이 세력을 형성해 아웃사이더를 몰아내거나 패싸움까지 벌이는 등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배성민 대통령은 이를 막으려 했으나 재산권을 침해하지 말라는 시민들의 반발에 물러나야 했다.
―인류연합의 영토는 어디까지나 세 개의 메가시티와 얼마 안 되는 땅뿐이다. 나머지는 버린 주제에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서울이 괜히 서울이 아니다. 재개발 시작하면 순식간에 땅값이 치솟을 것이다. 정부는 그걸 방해하지 말라.
―그것보다 정부는 빨리 우주선을 해체해서 유지비를 재건축에 돌렸으면 좋겠다. 솔직히 우주에 나가봐야 별거 없잖아?
―화성기지 그거 돈도 안 되는 거 연합국에 팔아버리자. 플레이그도 사라졌는데 우주선 만들어서 어디다 쓸 건가?
하나같이 한심한 발언뿐이었다.
유지하 전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우려해 많은 조치를 해두고 떠났다.
스마트팜을 비롯한 메가시티 운영에 도움이 되는 여러 알고리즘은 물론이고 식량도 충분히 비축했으며 자원을 채굴할 설비도 알뜰히 모아놓았다.
다소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단합해서 우주로 진출했다면 지금쯤은 여러 행성의 자원을 열심히 파먹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구에 안주하는 선택지를 골랐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인공지능도 없이 우주로 진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달콤한 과실을 수확할 수 있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가능성만 믿고 나아가야 하는데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졌던 전 대통령의 부재에 사람들은 혼란과 좌절에 빠져들었다.
실제 그가 사라진 후 몇 개월 동안 12개의 메가시티는 극심한 내홍을 겪어야 했다.
겨우 수습하고 난 후는 3개의 세력으로 완전히 쪼개졌고 우주로 나갈 동력을 거의 상실해 버렸다.
‘이래서야 대통령님을 볼 면목이 없지 않나…….’
그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약속했다.
배성민은 그 약속을 믿고 최대한 인류연합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혼자서 버티기엔 무리가 따랐다.
솔직한 말로 당장이라도 대통령을 사임하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배성민은 끝까지 버티기로 했다.
‘내가 몇 년 동안 먹은 욕을 합쳐 봐야 대통령님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치지. 조금만 더 참아보자…….’
장자양 의원이 그의 표정 변화를 엉뚱하게 해석했는지 옆에 와서 은근히 물었다.
“결단을 내리신 걸로 알고 일 추진해도 되겠지요?”
“…우선 천만 명만 들이고 추이를 관찰합시다. 메가시티의 수용량은 한계가 있고 치안도 생각해야 합니다.”
드론 시스템이 건재했다면 인구가 얼마나 늘어났든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론은 해체되거나 부서졌고 박물관과 배성민의 집무실에 몇 대를 보존하고 있는 정도였다.
아직까지 작동은 되지만 알고리즘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 번도 날아오르지 않았다.
시민들 중에선 언젠가 저 드론이 날아오르는 날 유지하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그런 거라도 없으면 살기가 힘든 게 이 시대였다.
배성민 대통령은 장자양 의원과 천천히 악수를 나눴다.
의원과 달리 대통령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 *
제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및 경제협력기본조약식이 메가시티 아메리카에서 열렸다.
협정이라고는 하지만 인류연합이 다른 메가시티에 뭔가를 양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인류연합은 그 인구에 비해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높았기 때문이다.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인류연합은 너무 많은 것을 내주었다.
메가시티 애틀란틱의 스펜서 캐번디시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서류에 사인하며 말했다.
“이로서 캄차카반도의 스마트팜 일부는 우리의 것이 되었군요. 미래를 향한 올바른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약속은 꼭 지키길 바라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유지하가 떠난 몇 개월 뒤부터 캄차카반도의 스마트팜은 탐욕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 거대한 기지는 몇 개의 메가시티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을 생산할 수 있었다.
육지면적의 50%가량이 황폐화된 지금 시점에서 인구를 늘리기 위해선 그곳의 시설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 스마트팜을 인류연합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되었다.
유지하가 통합대통령으로 있었을 때에는 어차피 그의 소유였으므로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그의 한마디면 모두가 목을 움츠려야 하는데 반항은 전무했다.
하지만 그가 떠난 것이 확실시되자 각지의 메가시티에선 스마트팜의 식량 생산량이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닫고 군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저 기지가 없으면 인구를 늘리는 건 꿈도 못 꾼다. 일부라도 양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배 대통령이 얌전히 내어주려 할지 의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걸 다 아는데.
―우리의 최대 무기를 활용하면 된다.
그 최대의 무기란 여러 우주기지였다.
배성민은 희한하게도 유지하의 유산 중에 우주기지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보수가 힘들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감에도 화성기지를 끝까지 가동 가능한 상태로 두려 했으며 우주선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플레이그가 사라진 지금, 이는 국내 여러 세력의 비판을 받았다.
―마땅한 활용처도 없으면서 우주기지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어디 숨겨둔 금괴라도 있는 건가?
―타이탄에 많은 자원이 있다고? 물론 자원은 있다. 지구에 비해 5배의 비용 상승을 감수하면서 캐내는 자원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배 대통령의 우주기지 집착은 그 유지하에 대한 향수일 뿐이다. 그는 비서실장 출신이기에 유지하와 많은 시간을 공유했고, 그게 독특한 페티시로 나타난 것이다.
―혹시 그렇고 그런 관계가 아닌가?
이런 모욕적인 의문을 제외한다 치더라도 배성민의 정책에 많은 사람이 비판을 가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인류는 이미 우주로 진출할 원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주에서 플레이그와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유지하의 공이었다.
그가 사라진 지금 더 이상 우주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여러 메가시티 지도자들의 판단이었다.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할 이유가 없다.
―지구에도 자원은 많으며 훨씬 쉽고 저비용으로 채굴할 수 있다. 우주에 진출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임펄스 추진기와 핵융합로 등의 선진적인 기술은 우주가 아니라 지구의 인류를 위해 쓰여야 한다.
사실 이들이 처음부터 이런 결정을 내리진 않았다.
2048년과 2049년 즈음해선 태양계 내부의 자원을 찾고 외우주에도 무인우주선을 보내는 등 활발한 탐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부재로 인한 막대한 인력 소모가 발목을 잡았다.
루시아 없이 거대한 우주선을 통제하려다 보니 사고가 속출한 것이다.
여러 알고리즘이 있음에도 인명 피해는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각지에서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잇따랐다.
―우주 개발하다가 사람 잡겠다!
―이렇게 된 건 유지하 때문이다. 플레이그 족친답시고 모든 자원을 그쪽에 투자하지 않았나. 그 뒤의 상황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어야 했다.
당시의 유지하는 플레이그를 분쇄하는 데에만 몰두했기에 다른 분야에는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후유증이 뒤늦게 나타났고 남은 인류는 최소한의 탐사를 제외한 우주 진출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영향력은 군단타격함대와 여타 우주선에 대한 감축협정으로 이어졌다.
메가시티 아메리카의 대통령 티투스 H. 프랭클린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군단타격함대에 대한 감축협정까지 종료되었습니다. 연합국과 인류연합, 그리고 나머지 메가시티는 각자가 보유한 우주선을 70%까지 줄이고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이의 없습니다.”
인형 같은 발언이 줄줄이 이어졌고 배성민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말없이 서류에 사인했다.
유지하의 진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군단타격함대는 가능하면 보존하고 싶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다른 곳의 압박도 상당했고 인간보다 그깟 우주선이 더 중요한가 하는 국내의 비판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우주선 1척당 천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데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말이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울적해하는 그에게 티투스 아메리카 대통령이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유지하 씨는 녹스를 통해 다른 우주로 갔다지요? 우리에게 공개하지 않은 우주선과 인공지능을 데리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유지하가 어디로 떠났는가 하는 주제에 대한 의혹이 워낙 많아서 배성민은 얼마 전 그것에 대해 공개한 바 있었다.
우주선이 미래에서 온 가장 거대한 세틀러호이며 녹스에 워프게이트가 있었다는 것을 제외한 내용들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당연하게도 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유지하가 인류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어떤 변명을 댄다 하더라도 그가 홀로 떠났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우주로 떠났다는 걸 낭만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은 그에 대한 욕을 하기 바빴다.
그래 봐야 유지하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단어 목록에 몇 개가 더 추가된 것에 불과하지만.
티투스 대통령이 웃으며 물었다.
“목적지가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대통령께선 전혀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아는 건 거기까지 50년이 걸린다는 것뿐입니다.”
“50년이나…….”
“그거 참 대단하군요.”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이 흘렀다.
유지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떠났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었다.
티투스 대통령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재차 물었다.
“이유가 뭔지는 아십니까? 우리 모두를 버리고 그쪽에 간 이유 말입니다.”
“대통령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배성민이 단언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에 찬성하지 않을 겁니다만… 하여튼 그 논의는 질릴 정도로 이루어졌으므로 더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때 메가시티 애틀란틱의 스펜서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돌아올 생각은 있답니까?”
“무리지요. 편도 50년이면 복귀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는 말 아닙니까?”
“나이를 감안하면 가다가 사망했다고 봐야…….”
“만약 복귀한다 하더라도 환영받을 생각은 버려야 할 겁니다.”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지하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가 현역일 때에는 죄를 묻는 게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류는 새로운 체제를 구축했고 거기에 유지하의 자리는 없었다.
신 인류연합이 있긴 하나 일부에 불과했고 대중은 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잊지 않았다.
복귀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메가시티 아메리카의 티투스 대통령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1급 살인에다 인종학살, 테러 혐의와 무차별 개인 사찰, 내란선동까지… 어이쿠, 형량이 100년 단위로도 부족하겠는데요?”
“최소한 살아서 감옥을 나오리란 희망은 버려야 하겠죠.”
“우주감옥을 참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 거기에 가두는 건 어떻습니까?”
“그거 재미있겠군요.”
배성민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에 픽 웃었다.
그는 승산 없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는다.
‘아니,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뒤집어 버리지.’
그런 사람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지구에 복귀할까?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일 것이다.
문제라면 그가 떠난 지 겨우 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는 데 50년, 오는 데 50년.
그리고 선지자의 고향이라는 곳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기적이 일어나 그 기간이 획기적으로 짧아질 수도 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걸 보면 회의적이었다.
배성민은 사람들의 웃음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 * *
“큰일이야! 큰일!”
지갈레온이 호들갑을 떨며 레오볼드를 찾아왔다.
“무슨 일인데? 설마 그람 왕국에 거대한 마법진이 만들어졌다는 걸 알리러 온 건 아니겠지?”
실제로 그 말을 하러 왔던 지갈레온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아, 알고 있었어?”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를까. 그나마 눈치는 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젠장, 알면 미리 좀 알려 주지.”
그는 투덜거리며 레오볼드의 옆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려다가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뜨악!”
“황제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지? 그리고 너한테 알려 줬다간 하루도 못 가서 왕궁 안에 퍼질 게 뻔해.”
“나를 뭘로 보고? 이렇게 보여도 인류제국의 수호룡이라고.”
레오볼드는 그를 노려보다가 소파에 시선을 돌렸다.
“저기 앉아. 그나저나 네가 눈치챌 정도인 걸 보니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이군.”
“소환 마법진이지? 저 정도로 큰 규모면 정말 엄청난 존재가 튀어나올 거야. 나는 어, 모르겠지만 대전쟁 당시에도 저런 건 없었어.”
“라사.”
“뭐?”
“그 마법진은 라사를 소환하기 위한 거야.”
“창조신 라사? 걔를 소환해서…….”
대충 내뱉던 지갈레온은 레오볼드의 무시무시한 눈에 찔끔해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평소엔 꽤나 친근하고 잘 대해주지만 선지자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하고 진지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커흠흠! 아무튼 라사를 소환해서 뭘 어쩌려는 걸까?”
집무실 창에 거대한 홀로그램이 표시되었다.
알테마가 펼친 마법진은 그람 왕국 전체를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수많은 사람이 에테르를 빨려 사망했고 이는 기사나 마법사 같은 감응력을 가진 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마법진이 펼쳐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그람 왕국은 죽음의 땅으로 변했다.
그것도 모자라 실시간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레오볼드가 말했다.
“나오는 존재는 아마 라사가 아닐 거야.”
“그럼?”
“그 비슷한… 아니면 전혀 엉뚱한 놈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놈이라는 호칭에서 적대감이 느껴지는데.”
“그럴 거야. 내 숙적이니까.”
“설마 플레이그 퀸인 오메가 원?”
“확률은 70% 정도… 심증으로는 거의 100%야.”
“그거 큰일인데. 지금이라도 마법진을 파괴해야 하는 거 아냐?”
“아닐 가능성도 있으니까.”
“만약 오메가 원이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 우주선을 동원해서 박살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에는 확실히 죽여야 하거든. 전에도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차원으로 도망을 갔으니까. 중요한 건 근원을 알아내서 완전히 뿌리를 뽑는 거지.”
지갈레온은 그의 목소리에서 오메가 퀸에 대한 증오와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오메가 원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죽음을 원했다.
그걸 위해선 다소의 위기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나도 동의하긴 하는데… 그럼 알테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리빙메탈로 만든 육체를 뺏기겠지. 의식은 오메가 원에게 지배당하고 서서히 사라질 거야.”
“오랜만에 부활했는데 좀 불쌍하네.”
“성녀 베로니카도 그렇게 몸을 뺏겼지. 자업자득이야.”
지갈레온은 찔끔해선 입을 다물었다.
얼마 후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마법진에서 진동이 일었다.
그람 왕국 전체가 지진으로 뒤집혔고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빛이 걷히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