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303
302화 아스테라 통일
친위기사단과 중앙군 일부를 흡수한 인류제국군은 거침없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자이움의 병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규모가 거대하고 위압적이다 보니 죄다 항복하거나 도망치고 말았다.
악마 사태가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병력이 분산 배치된 게 문제였고 바라크 황제의 거듭된 숙청으로 지휘권이 희미해진 것도 골칫거리였다.
기사들은 책임을 지기 싫어 현 위치를 고수하려고 했고 덕분에 인류제국군은 단 한 번의 전투도 겪지 않았다.
황도 제롬에는 상당한 숫자의 경비부대가 남아 있었지만 친위기사단장 하메른의 경고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들에게 책임을 묻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책임을 지고 싶은 자들은 없었는지라 경비부대는 그들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북상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제롬에 인류제국군이 들어섰다.
신민들이 거리로 나와 황궁으로 향하는 그들을 불안하게 지켜봤다.
“저 깃발은 인류제국의… 아무도 막는 자가 없단 말인가?”
“질 게 분명한데 누가 나설지…….”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친위기사단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은데.”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하메른 남작마저 인류제국에 포섭됐다면 이 나라도 거의 끝난 거지 뭐.”
“프로잔 후작의 깃발까지 있는 것 같은데 진짜 망하는 건가?”
최근 물가 폭등과 악마 사태 등으로 자이움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과 타국군의 진입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자이움은 대전쟁 이후 200년 동안 자국 영토에 타국의 군대를 허락한 적이 거의 없었다.
사실은 엘프들이 그럴 가치를 못 느껴서라는 게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황궁으로 향하는 인류제국군은 자이움 제국의 신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대부분은 한탄, 또는 좌절했고 일부에선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기 위해 행렬에 접근하기도 했지만 경고를 받곤 물러났다.
그걸 막아야 할 비행선 함대는 하이페리온호를 포함한 100척이 넘는 인류제국 함대에 질려 도망간 상태였다.
황궁으로 통하는 도로가 뻥 뚫렸고 티렌델과 발가드의 골리앗이 먼저 진입했다.
레오볼드가 화려하게 장식된 홀에 들어서자 도망가지 못한 수십 명의 시종과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이미 재상에게서 은밀한 지시를 듣고 마음의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주인이 바뀐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목숨 건사하고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다행히도 레오볼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부드러운 권력자였다.
“긴장할 것 없소. 여러분에게 해가 되진 않을 거니 자기 위치로 가서 할 일 하시오.”
사실 레오볼드 같은 지배자에겐 말단 시종이나 시녀들은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하여튼 목숨을 보장해 주겠다는데 괜히 거슬릴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발가드가 피를 닦으며 다가왔다.
“잠깐 소란이 있었소만 이젠 조용할 거요. 저쪽에 바라크 황제가 있소.”
“여기에서 대기. 잠깐 이야기나 나누고 오지.”
가벼운 말투였지만 거기에 아스테라 대륙의 운명이 달렸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레오볼드는 기사 두 명의 안내를 받아 황제의 침실로 들어섰다.
선홍빛 카펫에는 술병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찢어진 옷가지도 가득했다.
그리고 바라크 황제는 침대의 끝에 앉아 술에 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고 불투명한 시선에서 절망이 묻어났다.
“…너무 늦었군 그래. 난 조금 더 빨리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술 좀 남았나?”
“하하하… 이거라도 들라고.”
바라크 황제는 손에 쥔 술병을 레오볼드에게 건넸다.
꿀꺽꿀꺽.
탁한 술이 목구멍으로 타고 넘어갔다.
절망으로 감싸여 있던 바라크 황제의 눈동자에 기대와 희망이 깃들었다.
사실 그가 들고 있던 것은 독버섯의 즙이 섞인 술이었다.
레오볼드의 성향상 자신과 담판을 지을 것을 알고 황궁의 주방을 독촉해 겨우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술을 몇 모금이나 넘긴 레오볼드는 멀쩡해 보였다.
지금쯤이면 호흡이 탁 막히고 마비가 와야 하는데도.
“꽤 독한 술이군. 평범한 사람이 마셨다간 그 자리에서 쓰러지겠어.”
“…….”
독주라는 걸 알면서도 마신 건가?
사실 레오볼드의 육체는 인간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그 어떤 암살 수단도 통하지 않으며 우주공간이라도 꽤 장시간 버틸 수 있었다.
레오볼드는 의자를 끌어와 바라크 앞에 앉았다.
“발악은 이걸로 끝인가? 뭐라도 더 해보지 그래.”
바라크 황제의 입가가 실룩이며 비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국 작위를 받으러 왔을 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면 아스테라 통일이 앞당겨졌겠지.”
“자신감이 넘치는군… 혹시 악마 사태도 네놈의 작품이냐?”
“아쉽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냐. 이용만 했을 뿐이지.”
“그래… 나는 비록 이 꼴이지만 알테마가 남았어… 그녀가 네놈을 징벌할 것이다…….”
“알테마? 미안하지만 악마에게 먹혔어. 지금쯤은 육체를 뺏긴 채 마계에서 활동하고 있을걸.”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황제가 이해하게 설명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라크 황제는 흡사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알테마가… 육체를 빼앗겨……? 악마에게?”
“이 악마 사태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앞으로도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내가 자진해서 은둔한다고 하면 살려 줄 건가?”
“아니.”
단호한 목소리에 바라크 황제는 크게 낙담했다.
레오볼드는 그를 증오하진 않지만 그의 죽음이 필요했다.
“당신을 살려두는 건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거든. 귀족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죽어야 돼. 가족은 적당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할 테니까 걱정 마.”
“후… 후흐흐…….”
황제는 어깨를 떨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확 들고는 레오볼드를 노려봤다.
“이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지… 나는 혼자서 죽진 않는다… 최소한 네놈을 같이 데려가겠다는 말이다!”
“대단한 걸 준비한 모양이지?”
그의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미티어 샤워… 역겨운 네놈들이 황도를 포위하기 전 발동시켰지. 이제 여기로 곧 떨어질 거다. 황도는 절대 포기 못해. 네놈에게 넘길 바에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
“과연.”
각오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레오볼드는 대답 대신 그에게 눈길을 준 후 테라스로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서 운석이 3개나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뒤에서 비웃음이 들려왔다.
“두려운가? 이제 취소시킬 수도 없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동하더니 결국 나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군.”
“혹시 그거 아나?”
“무엇을?”
“지금까지 미티어 스트라이크가 발동된 횟수 말이야. 전부 나를 죽이기 위해 발동되었는데 왜 내가 멀쩡한가도.”
“너, 설마…….”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티어 스트라이크 같은 걸론 날 죽일 수 없어.”
“우주선도 없는 네가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신은 아니지만 아스테라 판테온 정도는 내 상대가 못 돼. 지금부터 그걸 보여 주지.”
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러는 사이에도 운석은 낙하를 계속하여 검붉은 연기와 화염을 마구 토해내고 있었다.
이제 몇 분이면 황궁에 정통으로 낙하할 것 같았다.
바라크 황제가 두려운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뭐, 뭐냐?”
허겁지겁 뒤로 물러서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낙하할 것 같던 운석 3개가 허공에 뚝 멈추는 게 아닌가?
말 그대로 허공에 정지한 상태로 화염과 연기를 내뿜으며 둥둥 떠 있었다.
사람들이 경악해선 하늘을 올려다봤고 그건 바라크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내가 운석을 멈췄다. 왜 그간 발동되었던 미티어 스트라이크가 소용이 없었는지 이해하겠지?”
“…….”
이제 바라크 황제는 레오볼드를 괴물 쳐다보듯 하게 되었다.
신격을 얻은 수준이 아니라 진짜 신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상대에게 반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가 무릎을 꿇으려 하자 타이밍 좋게도 레오볼드의 손이 가슴을 가볍게 터치했다.
“살려달라고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그렇겐 안 되겠어.”
에테르 하트가 산산이 깨져나갔고 바라크 황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크헉…….”
“자이움 제국은 내가 잘 운영할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동안 고생했으니 편히 쉬어.”
레오볼드의 다리를 움켜쥔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황제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 또한 에테르 혈통을 가졌지만 모든 에테르가 봉쇄되었기에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레오볼드는 쓰러진 황제를 외면하고 저 하늘 너머를 바라봤다.
자이움을 점령한 것으로 아스테라 통일 계획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여러 소왕국은 줄줄이 항복, 혹은 복종의 사절단을 보내오고 있었고 그들을 합병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플레이그와의 일전이 남았군.”
그들을 물리치고 선지자를 만나면 그의 여정이 비로소 끝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 *
레오볼드가 옥좌에 앉자 원정군의 수뇌부가 좌우로 도열했다.
프로잔 후작이 미리 손을 써 두었는지 황도의 수많은 귀족이 그들을 환영했다.
그 환영이 본심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레오볼드는 자이움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가 있다면 저항이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악마 사태와 겹쳐서 자이움의 여러 지방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이르러 있었고 중앙군은 붕괴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각종 지시사항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레오볼드는 중앙군 사령부의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이 순간부터 그대들의 목숨은 내가 가지겠다. 만약 이의가 있다면 지금 나서라.”
“…….”
당연하지만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라크 황제가 죽고 주요 황족이 체포당한 시점에서 자이움의 운명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또 은근히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바라는 세력도 꽤 많았다.
엉망진창인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선 그만큼 극단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선은 레오볼드가 황제로 즉위하더라도 새로운 왕조로 보면 되지 않느냐는 귀족들의 판단에서 시작되었다.
―어차피 자이움도 그람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후계였다. 인류제국의 전신이 된 바그란에도 그람의 혈통이 있는 만큼 둘은 남이라고 볼 수가 없다.
―신민도 그대로, 관료도 그대로, 심지어 지배하는 땅도 그대로다. 황제와 제국의 이름만 바뀌는 것뿐인데 그렇게 반발할 필요까진 없지 않은가?
문제가 있다면 레오볼드의 성향상 작위와 영토를 반납하라는 지시가 내려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현 인류제국에는 귀족이 없으며 측근들도 하나같이 작위를 반납한 지 오래였다.
심지어 황비라고 할 수 있는 카밀라와 아르마도 귀족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자이움의 귀족들 사이에선 작위는 포기하더라도 영지의 지배권만큼은 공고히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땅은 선조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신성한 것이다.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그 땅을 지배할 권리를 침해할 순 없다.
―재산은 보전해 준다고 하니 다른 분야에서 전폭적인 협력을 하는 조건으로 땅까지 확보해 보자.
―다행히 반다스 황제는 피를 아주 많이 흘릴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새로운 황제의 성향이 어떤가는 귀족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간 레오볼드가 펼쳐온 정책을 살펴보면 적에게는 아주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그의 지배하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의외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는 갈리스토와 타소스의 구 귀족들이 받은 대우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잔혹한 숙청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활동도 많이 하고 괜찮은 것 같다.
―기량 테스트란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귀족들이 가능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자이움의 귀족들은 대체로 레오볼드가 새로운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그리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것은 바라크 황제가 워낙 폭정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악마 사태에 겁을 먹었는지 자국민을 무차별로 학살했고 귀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 황제의 지배를 받느니 차라리 능력이라도 있어 보이는 레오볼드가 낫다고 본 것이다.
그들에게 프로잔 후작은 새로운 황제로 통하는 핵심 측근이었다.
황궁에 입성할 때에도 황제와 함께했다니 말 다한 거지.
하지만 그는 영지를 인정받자는 귀족들의 주장에 난색을 표했다.
“유감이오. 폐하께선 아스테라 전체를 직접적으로 지배하실 계획이시오. 그러니 여러분들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요.”
“아스테라 전체를 직접 지배한다고요? 그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알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전성기의 그람 제국도 그 덩치를 감당 못해서 많은 속주국을 두었는데…….”
“이건 황제께서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불평불만이 쏟아졌지만 프로잔 후작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행정의 비효율성을 말하는데, 혹시 인류제국에 가본 적이 있소? 바그란 주에는 반다스라는 작은 도시가 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폐하의 고향이오. 인구는 5만 남짓한 도시인데 거기까지 철도가 깔려 있었소. 비행선 정기선도 다니고 말이오.”
“황제의 고향이니까 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측근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귀족들의 반박에도 프로잔 후작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단지 고향이라서가 아니오. 반다스 시는 대륙 동쪽 끝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오. 거기까지 물류망이 완벽하게 가동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요. 인류제국은 그런 식으로 자국에 위치한 도시 100여 개를 철도로 연결해 놓았소.”
“도시 100개를 철도로 연결했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혹시 하루에 한두 번 정도만 운행하는 거 아닙니까?”
도저히 믿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이에 프로잔 후작은 자신이 직접 듣고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하루에 정기편만 10대가 넘소. 그것도 모자라 비행선도 화물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더군. 모르긴 몰라도 인류제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비행선을 합치면 500대가 넘을 거요.”
“허어…….”
“그건 정말 엄청난 숫자군요.”
모두 직할령의 조선소에서 엄청나게 찍어낸 덕분이다.
개량된 에테르 추진기를 탑재하고 있어 속도도 기존의 비행선에 비교할 바 아니었고 무엇보다 설계가 효율적이라서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었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상품은 기차로, 고부가가치 상품은 비행선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인류제국의 물류 공급체계였다.
그 실체를 확인한 제국의 귀족들은 입을 다물게 되었다.
프로잔 후작이 마지막으로 발언했다.
“폐하의 성향을 봤을 때, 반드시 여러분들이 땅을 내놓도록 만들 것이오. 그 방법을 확인하고 싶다면 버텨도 좋소. 하지만 지금까지 버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군.”
“…….”
다들 서로의 얼굴만 쳐다봤다.
잘 생각해 보면 레오볼드는 엘브랑데를 무너뜨리고 자이움까지 점령한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그런 존재가 귀족 몇 명에게 굳이 신경을 써줄 것 같지는 않았다.
병력을 보내 밟아 버려도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니 재산이나마 보전해 줄 때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다만 반항하는 귀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레오볼드는 최후통첩장을 보낸 후 그들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발가드와 티렌델을 보냈다.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잘 됐군. 가서 밟아버려.”
전 황제가 악마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답시고 무차별 학살을 저지른 것에 비해서는 매우 온건한 방법이었다.
발가드와 티렌델은 철저히 귀족만 족쳤고 이는 자이움 내에서 귀족의 세력이 크게 움츠러드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제국 전역에 준동하는 악마들에게도 철저한 철퇴를 가했다.
지갈레온이 토벌에 앞장섰고 수많은 기사들이 그들과 싸웠다.
그리하여 레오볼드가 황궁에 들어온 뒤 두 달여 만에 제국에서 악마는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간 새로운 황제의 정책을 지켜봤던 각지의 유력자들은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새로운 지배 체제가 등장한 이상 숙청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범위를 한정시키고 단호하게 집행한 게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악마 토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것도 모자라 각지에 식량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다. 인류제국의 농작지를 생각해 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걸 해냈다.
―무엇보다 행정에 짜임새가 있다는 점이 좋다. 책임자와 시행자가 명확해서 시민들이 혼란을 겪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새로운 제국도 괜찮을지도?
중앙군 일부에서 반발하는 움직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레오볼드는 미리 싹을 밟아 버렸다.
그리하여 1041년 가을에 접어들자 자이움은 인류제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제부턴 자이움 주와 여러 개의 도시로 불릴 것이다.
황도를 제외하곤 대체로 낙후된 지역이 많아서 엄청난 돈이 들어가게 되었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아스테라 전역에서 캐는 자원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아르마가 전적으로 경제를 관리하고 있어서 물가가 폭등하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때가 되자 여러 소왕국들이 항복을 해 왔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가 되었을 때, 아스테라에 남아 있는 세력이라곤 인류제국과 몇몇 왕국에 불과했다.
아르마가 나서서 그들과 교섭하는 중이라 남은 지역은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대륙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레오볼드는 내정과 에테르 혁명에 신경을 쓰는 한편 루시아에게 관심을 가졌다.
“요즘 통 소식이 없군. 오메가 퀸이 어떤 식으로든 유혹을 했을 텐데.”
“플레이그 퀸 특유의 사이코키네시스 필드로 대화를 나눴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좋은 방향은 아니었겠죠.”
“둥지에 틀어박혀 있는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겠군.”
아마 레오볼드가 지구에서 한 행동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메가 퀸이 적당히 가공을 했을 테니 극악무도한 대량학살자, 인류 전체를 저버린 배신자 등으로 매도되었을 것이다.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도 나한테는 루시아가 필요해.”
이럴 때 중요한 건 대화였다.
루시아 같은 섬세한 개체에겐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아닌 부드럽고 따듯한 대화가 필요했다.
자신은 결국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플레이그 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나저나 둥지가 정말 커 보이는군. 어지간한 플레이그 퀸은 상대도 안 되겠는데.”
“실질적인 전력은 서열 1위 아프록시아와 맞먹을 정도입니다. 당장 싸우면 오메가 퀸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전력으로 나를 배신하기 전에 이야기나 들어 보자고. 여기로 데려와.”
연락을 시도한 아르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싫다네요. 접촉을 거부했습니다.”
“안 오면 내가 간다고 해.”
레오볼드가 직접 갈 경우 마레 전체가 뒤집어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