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2
2화
수도권 제1외곽순환도로.
조금 전 일산 나들목에서 차를 올려, 본 궤도로 진입했을 때였다. 저도 모르게 가속기를 밟은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들입다 밟으면 의정부 나들목까지 15분이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입꼬리가 귀에 가서 걸렸다.
후, 잘하면 한 콜 더 탈 수도 있겠는데. 이런 생각에 도취해 있을 때였다. 낮게 깔린 안개가 밀물처럼 엄습했다.
속도 게이지가 순식간에 100km를 넘겼다.
도로 위에 그려진 차선들이 예리하게 날아와 꽂히는 통에 마른침을 꿀컥 삼키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구레나룻을 둘러싼 커다란 근육들이 각을 세우며 경직된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속도 게이지가 150km를 넘겼다. 습관적으로 시계에 시선이 갔다. 디지털 시계가 01시 20분이다.
시야엔 곡선이 느껴지는 넓은 도로만 펼쳐져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180km 아니, 200km를 넘겨도 충분해 보인다.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조금 전 통일로 나들목을 지났다. 갑자기 도로 위에 안개가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운전하는 데 크게 지장은 없어 보인다.
잠깐 사이에 세상이 새하얀 안개에 휩싸였다.
설상가상, 오전엔 수련생 모집 전단지 뿌리고 오후엔 수련생들 상담하고 가르치느라, 눈 한 번 못 붙인 탓에,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함!
최대한 작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소리도 최대한 감췄다. 혹, 고객이 알면 불안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운전에만 집중해야 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뜬금없이 작년 요맘때 아버지와 나눴던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아들, 이 악물고 야무지게 해.”
“아버지, 1년만 기다려 주세요.”
“아무 걱정 말고, 일에만 집중해. 아비는 오직 김 관장이 잘되기만 바랄 뿐이야.”
“아버지…….”
“눈물 거둬! 꼴 보기 싫으니까.”
“눈물 아닙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아서……. 그리고 아버지… 저, 정말 잘해서 체육관 차리느라 대출해 주신 빚 다 갚고 효도할게요. 1년만 기다려 주세요.”
“대출 문제는 신경 쓰지 마. 대출은 아비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얼른 자리 잡고 장가갈 생각이나 해.”
“지금 결혼이 중요한가요, 뭐? 결혼이야 언제든 하면 되죠. 그보다 결혼하면 가족들 먹여 살릴 기반부터 마련해야죠.”
“그거야 내외가 뜻만 맞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그러니 아비 말 잘 새겨듣고 결혼부터 서두르도록 해. 알았지?”
“아버지, 그건 때 되면 알아서 될 일. 저는 그보다 빚 갚는 게 우선입니다.”
“때라니! 네 녀석 나이 서른 하고도 다섯이야. 그 나이에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다고!”
왜 하필 지금.
아직도 귓전을 맴도는 아버지 목소리. 그 때문일까,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아졌다.
이정표 맨 위에 가장 큰 글씨로 보이는 지명, 의정부.
의정부를 향해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사패산터널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터널만 지나면 의정부 나들목이다.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다시 투명해졌다. 아시아 최장 광폭 터널. 잠깐이어도 좋다. 가속기를 힘껏 밟았다.
속도를 높이기 전 조수석을 흘긋 보았다. 하늘이 돕는지 취객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후, 역시 세상은 아직 내 편이야.
일흔은 족히 돼 보이는 노인. 나이도 꽤 들어 보이는데, 웬 술을 저렇게 마셨을까?
구릿빛 피부색. 그리 호감 가는 타입은 아니다. 게다가 자글자글한 주름.
여느 사람에 비해 유독 깊고 또렷해 그의 삶이 평탄치 않았음을 대신 말해 준다.
아무튼 인상적인 사내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용하는 저도 모르게 옆자리 노인에게 잦은 시선을 던졌다.
* * *
사패산터널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얼굴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새하얀 광채(光彩)가 앞을 가렸다. 뭐지, 저건?
처음엔 그냥 안개일 거란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대로 광채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광채에 휘감긴 채 핸들을 놓고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세상이 온통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던가.
서서히 손을 들어 얼굴을 구석구석 더듬어 보았다.
손바닥 하나로 가려질 만한 평평한 이마, 부리부리하면서도 움푹 꺼진 두 눈, 얼굴 한복판임을 알려 주는 적당한 크기의 두리뭉실한 코, 목젖을 향해 경사지게 뻗어 내린 연약한 느낌의 갸름한 두 뺨 등.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옆자리 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살아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문득 함께 타고 있던 고객이 떠올랐다.
허수아비여도 상관없다. 외롭게 걸어야 하는 길, 의지할 사람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예기치 않게 직면한 순간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다.
그사이 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진 걸까? 지금의 이 분위기는 한마디로, 을씨년스럽다! 그뿐이었다.
‘두렵다. 간담이 서늘하다.’
바로 그때였다. 무거운 정적을 깨며 옅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인기척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반색이 앞선다.
“고객님!”
메아리 없는 세상. 두려움과 고독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마침내 때가 되었단 말인가. 무엇이 됐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 못 할 것이 무엇이냐.
조금 전과는 달리 징징거리며 악을 쓰듯 소리쳤다. 사람의 숨결 하나도 아쉽고 답답해서였다.
“고객님! 그곳에 계시면 다시 한번 인기척이라도 들려주십시오. 만에 하나 장난치시는 거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발에 가까웠다. 흠, 이 정도 했으면 성질을 부리든, 치도곤을 내든, 무슨 반응이 오겠지. 실낱같은 기대감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그래, 될 대로 돼라!’
차분히 기억을 거슬러 사패산터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졸음운전에 의한 교통사고! 그래, 교통사고를 낸 거야. 일순 머리가 쭈뼛해졌다.
“고객님!”
이번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인기척이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인기척의 정체가 노인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옅은 숨소리가 들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로 미뤄 노인이 분명했다.
숨소리만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냄새 때문이었다. 술고래들 입에서 나는 그들만의 독특한 입 냄새.
비로소 안도하며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고객님 맞죠?”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노인이란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둠이 걷히고 본 모습을 드러낸 세상은 변함없이 찬란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눈만 들면 보이던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도로도, 빌딩도, 아파트도.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노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왠지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기분은 상했지만, 한 가지 깨달음이 생겼다. 노인과의 관계. 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미지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제까지 알고 있던 고객과 대리기사의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인지 관계를 하루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래야 서로 의지하고 뜻을 모아 21세기로 돌아갈 방도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제안? 우리가 그럴 사이였던가?”
“언제까지 고객님, 고객님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 제안하려는 게 그거였어? 난 또 뭐라고. 그거라면 나부터 밝히겠네. 난 포천 주금산에 있는 인공사 주지일세.”
“주지라면, 스님이세요?”
뜻밖이었다. 스님이 술에 취해 대리운전을 부르다니. 게다가 입에선 고기 썩는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알았으면 앞으로 스님이라고 부르게. 그게 신분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호칭이야.”
“네, 알겠습니다. 인공 스님.”
“인공은 빼고.”
“네, 스님.”
“그나저나 자네는?”
“저는 서울 변두리에서 검도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 관장이라고 합니다. 김용하 관장.”
“김용하라, 그럼 앞으로 용하라고 부르겠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니,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는.”
자세한 얘기를 듣지 않아도 그의 깊은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변두리 검도 체육관 관장 김용하 그리고 포천 주금산의 땡추 인공.
두 사람은 일단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정보를 모아 볼 요량으로 저잣거리를 찾아 빠르게 걸음을 내디뎠다.
“검도 체육관 관장이면, 검을 잡은 지 얼마나 된 거냐?”
“한 25년 됐죠. 초등학교 때 처음 죽도 잡았으니까.”
“25년이라, 생각보다 고수구먼. 하지만 명심하거라.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고 했어.”
“그런 거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죄송하게도 저는 말입니다. 단 한 번도 칼로 흥해 본 적이 없어 망할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녀석, 농담 받아치는 것 보게.”
“농담 받아친 거 아니고요. 저는 이게 현실이거든요, 팩트!”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언성을 높이고 지랄이냐? 지랄이.”
“이제야 슬슬 본색을 드러내시네. 하는 꼴이 딱 꼰대야, 꼰대. 주제에 스님은 무슨…….”
“뭐, 꼰대?”
한 대 쥐어박을 기세로 덤벼드는 통에 일단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 뒤로 물러섰다.
나름 예상되는 공격권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 우쭐해 있었다. 하지만 인공의 눈에는 그 광경이 한심해 보였던지, 혀를 끌끌거리며 먼 산만 바라보았다.
“노인네, 삐졌구나?”
버릇없다 여겨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보다 한 수 더하며 뒤로 성큼 물러났다. 곧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올 공격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리 거리라도 재고 있었다는 듯, 인공의 일격은 거침없이 정수리로 날아와 정확히 꽂혔다.
―헉, 으윽!
그 충격은 몸을 돌고 있는 기와 혈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름 피한다고 피한 덕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정수리 혈을 내줬다는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러게 왜 까불어, 까불기를.”
인공은 혓바닥을 날름 내밀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어? 독설이라도 마구 퍼붓고 싶었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웬일인지 온몸이 돌덩어리처럼 굳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용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인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인공은 나 몰라라 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되레 딴청만 피웠다.
그 광경을 보는 용하는 절망감이 가득한 눈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무심한 사람 같으니.’
원망의 시간도 잠시, 피부 표면은 살갗이 아닌 화강암으로 변해 갔다. 동공이 서서히 풀리며 초점이 흐려졌다.
지금쯤 투정을 부려도 열 번을 부렸을 애송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인공은 그제야 성큼 다가와 용하를 두루 살피기 시작했다.
“아뿔싸!”
두 눈이 휘둥그레진 인공은 전광석화처럼 혈도를 찍었다.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래고 섬세했다.
잠시 후 화강암처럼 굳어 가던 용하의 얼굴에 핏기가 돌며 생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제야 인공은 크게 안도하며 말했다.
“몸을 움직여 보거라.”
인공이 하라는 대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온몸이 녹슨 기계처럼 뻑뻑했다.
비록 뻑뻑하긴 했지만 조금 전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꿈틀거릴 수 있었다.
“쳇, 까불긴 누가 까불었다고.”
“징징거리는 걸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구나.”
“쳇, 힘만 세면 단 줄 아나 봐. 스님이라는 자가 자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무식하게 힘만 세 가지고.”
“계속 그렇게 까불면 잘난 주둥아릴 아예 못 쓰게 만들어 줄 테다.”
으득! 어금니가 절로 깨물어졌다. 한때 검도 하나로 전국을 석권하고 아시아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 형편없는 땡추에게 애송이 취급받으며 굽신거려야 하다니.
하지만 어찌하랴. 지금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이니. 참고 또 참으며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인공의 말대로 입 조심 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 입 다물라! 그리고 앞으로는 매사에 입 조심 하거라!”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었다. 이번에도 인공은 보란 듯 선수를 쳤다.
눈곱만큼도 정 안 가는 인간. 용하는 잠시 인공에게 두었던 시선을 가져와 정면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잡한 저잣거리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