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31
11. 이계인 (1)
거부할 수 없는 격차를 마주한 김가원의 눈이 흐려졌다.
이 순간, 그는 내심으로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했다.
고리타분한 옛날 방식의 인간들이 말하곤 하던, 고등한 깨달음을 얻은 무인이 마침내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살검으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김가원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단전에 힘을 주었다.
언제나와 같이 그 과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하단전을 굳히고 거기서 일어나는 수축을 이용해 내공을 중단전으로 올린다.
기맥에 과부하가 걸리면서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고 내공을 발산했다.
더 강하게, 더 날카롭게.
무공이라는 것은 결국 누가 더 강한 검기를 이루느냐의 싸움이다.
그것이 그가 배운 살문의 진의였다.
신묘한 기술 따위는 검기로 베어 버리면 된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가 만들어 낸 살검을 당해 내는 고차원의 고수 따위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김가원이 소리쳤다.
“내가!”
시뻘건 검기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여태까지 그가 보인 그 어떤 검기보다도 크고 짙었다.
이 순간, 김가원은 자신이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베지 못할 것은 없다고!”
살문에서 이르는 살위각성(殺位覺醒)의 경지.
이에 다다르면 능히 살문의 간부가 될 수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니 한 놈.
딱 한 놈만 죽이면 된다.
김가원은 시뻘건 검기를 일으켜 유진을 향해 나아갔다.
그 어느 때보다 악을 쓰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살기를 품었다. 단전이 아플 정도로 기맥을 조였다.
하지만 다시.
그는 절망했다.
그의 앞에 있는 것은 고작 한 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인간의 범주에 드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베는 살인 기술을 배웠지.
산을 가르는 기적을 배운 적은 없다.
무력감을 억지로 떨쳐 내면서 유진의 앞에 도달했을 때, 까마득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막이 펼쳐졌다.
무언가가 깜빡, 떠올랐다.
하나의 별.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적의 기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먼지 한 톨에 가까운 내력.
그것이, 그간 자신이 쌓아 온 모든 무공의 총체보다도 우월했다.
아무리 많은 진기를 쌓더라도 저 한 톨의 내력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었다.
존재로서의 층위가.
격(格)이 달랐다.
“빌어먹을…….”
한 톨의 빛은 곧 유성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저런 것을 벨 수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김가원은 어둠을 허우적대며, 별빛이 자신의 목덜미를 유유히 지나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세상이 기울어졌다.
무언가가 보였다.
채 사그라지지 않은 붉은 검기를 쥐고, 엉거주춤 서 있는 누군가의 몸뚱이가 보였다.
병신 같네.
김가원은 그게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목이 없었으니까.
이내,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어졌다.
***
달려드는 김가원을 유진이 베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의 살검은 유진을 전혀 해하지 못했다. 도리어 너무도 평범한 듯한 베기가 김가원의 목을 떨어뜨렸다.
깨끗한 참수(斬首)였다.
현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김가원의 몸뚱이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시뻘건 검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닥을 구르던 머리가 멈추고 난 뒤.
무너졌다.
바닥에 피가 번져 들었다.
“뭐, 뭐야? 이겼어?”
어리둥절해하는 것은 나상철을 비롯한 용역들이었고.
“대단한 검술…….”
놀라서 눈을 크게 뜬 것은 일부 게이트키퍼들이었고.
“아아아…….”
입을 벌린 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유진을 바라보는 것은, 견장에 수실을 단 장교들이나 그에 준하는 게이트키퍼들이었다.
각자의 경지에 따라 그 감상이 달랐다.
“자…….”
유진은 내려간 칼끝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검신에는 김가원의 핏물이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맑은 검광만이 번뜩였다.
그는 남아 있는 살수들을 보았다.
“계속해야지.”
살수들은 본능적으로 유진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그들은 훈련된 대로 반응하는 사냥개처럼, 유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성이 흐려지자 몸에 각인되어 있던 본능이 반응한 것이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게이트키퍼들이 마주 달려들었다.
두 세력이 충돌했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살수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희생이 있었으나, 결국 살수들을 모두 죽였다.
승리였으되, 상처뿐인 승리였다.
마지막 살수가 죽고 나자 유진은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홍유진 씨.”
고광해가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전적으로 유진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유진이 어떤 인간인지 파악했다.
고맙다면서 금은보화를 약속하거나, 게이트키퍼의 대장으로서 어떤 지위를 보장하는 것은 유진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와 같은 진짜 무인들은 범인과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유진은 빙그레 웃었다.
“돈으로 주십시오.”
“예?”
“전부 고광해 씨의 공적으로 가져가시고, 저는 그냥 금전으로 보답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돈 말입니까?”
“섭섭지 않게.”
하지만 뜻밖에 세속적인 요청이 나왔다. 돈을 달란다.
“그, 그게…….”
고광해의 입장에서는 거부하고 싶지 않은 제안이었다.
살문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적이다.
이들을 이렇게나 많이 죽였다고 하면, 어쩌면 말년에 승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년이 연장되는 것이다.
체념한 척 굴긴 했으나 어느 무인이 뒷방 늙은이 신세를 달가워할까.
그리고 연금도 늘어난다.
“제가 어떻게 그런…….”
“제 의사는 분명합니다.”
“금전적인 이득이라니, 저는 고작 공무원입니다.”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물론 방법은 있습니다. 제가 잘 해결해 보지요.”
“예.”
직접적으로 돈을 마련해 줄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가능하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건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어서 사람들을 옮깁시다. 여긴 게이트 너머입니다. 언제 괴물들이 다시 나타날지 모르지요.”
“그럽시다.”
게이트키퍼들이 부상자를 이송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유진은 주변을 도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부디 다음 생에는 성불하시길…….”
유진이 죽은 자들을 애도했다.
그런데, 문득.
그의 품에서 무언가가 진동했다.
몬스터의 몸에서 빼낸 화살촉이었다. 유진은 그것을 쥐었다. 마치 그를 부르듯이, 일정한 주기로 진동하고 있었다.
유진은 화살촉을 꺼내어 손 위에 올렸다.
그러자 나침반처럼 빙글빙글 돌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산맥이 있는 방향이었다.
“흐음…….”
아무래도 누군가가 그를 만나고 싶은 모양이다.
유진은 뒷짐을 진 채 화살촉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
유진은 황재신이 있던 산맥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황재신이 있던 곳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고요하다.
세 번째 진지 주변에는 유달리 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화살촉은 저 멀리, 산맥으로 올라가는 능선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은 바람처럼 움직였다. 운룡낙락의 묘리가 그의 몸뚱이를 깃털처럼 밀어 올렸다.
이내 능선에 이르렀다.
유달리 크고 높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달빛이 전혀 새어들지 않는 숲속이었다.
이계인이라고 했던가.
황재신의 말이 맞았다.
이계에는 괴물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계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발을 늘어뜨린 여자였다. 어둠이 드리워져 있음에도 그 아름다운 용모가 가려지지 않았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듯이 선연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인간에 비해 길고 뾰족한 귀가 도드라졌다.
“안녕하십니까.”
유진이 인사하자, 그녀가 손을 들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활이 흔들릴 때마다 유진이 가지고 있는 화살촉이 공명했다.
그녀가 유진을 부른 것이 맞았다.
유진은 마치 무림에 있었을 때처럼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홍유진입니다. 지구라는 세계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라이예나. 숲을 지키는 자들의 후예다. 인간들은 우리를 엘프라고 부르지.]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낯선 언어가 이해되었다.
유진이 화살촉을 보이며 물었다.
“당신이 나를 불렀습니까?”
자신을 라이예나라 소개한 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럴수록 상쾌한 냄새가 주변을 에워쌌다. 이계의 눅진한 공기가 스러지고 싱그러운 꽃 냄새, 풀 냄새가 났다.
라이예나 또한 걸어 나와 유진과 마주 섰다.
둘은 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라이예나가 입을 열었다.
“어땠습니까?”
[놀라웠다. 드물지만, 그대와 비슷한 기운을 가진 인간들을 이따금 본 적 있다. 전부 믿기 어려울 만큼 강했지.]“비슷한 기운이라 하면?”
[영성(靈性)에 눈을 뜬 자들의 기운.]아마도 상단전을 사용하는 상승무공을 말하는 듯했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외에도 상승무공을 사용하는 고수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라이예나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세계는 아직 무사한가?]그 물음은 마치, 무사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근래 마경(魔境)의 마물들이 크게 증식하고 있다. 마경 자체가 커지고 있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야 했지.]“유감입니다.”
[보아하니 그대들의 세계는 아직 무사한가 보군. 여기까지 놀러 올 여유도 있고.]“놀러 온 건 아닙니다만, 예. 아직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조심해라. 세계는 더 가혹해질 것이다.]“어째서입니까?”
[아까 말했듯, 마경의 기운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대들의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겠지. 우리처럼 되지 않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유진이 알기로, 지구에 게이트가 열린 이래 무공과 마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결국 모든 일이 지구와 판타리아가 연결되면서 벌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그리고 판타리아에서 살아가는 엘프라는 종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여태 누구도 만나지 못했을까.
유진의 물음에 라이예나는 흐릿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들 떠났지. 아직 마경에 침식되지 않은 숲도 있지만, 결국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엘프들은 숲을 버리고 살 수 없는데, 마경은 계속해서 제 영토를 늘리고 있다.]“당신의 세계에는 엘프들만 있습니까?”
[다른 종족도 있다. 그대와 같은 인간도 있지.]라이예나의 말에 따르면 판타리아는 엘프, 드워프, 인간, 이 세 종족이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경이 급속도로 팽창하면서 세 종족 모두 위기에 빠졌다.
그 때문에 최근에는 서로의 교류 또한 줄어들었다고 했다.
“라이예나, 당신은 왜 마경에 남아 있습니까?”
[나는 마경을 살피는 정찰병 같은 존재다. 그대들이 우리의 세계를 살피듯, 나 또한 주기적으로 마경을 살피지.]“그랬군요.”
[끝까지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숨어 있던 이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부 떠났다. 여기에는 괴물뿐이다.]유진은 황재신이 오카리나를 불어도 아무런 대답이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떠난 것이다.
황재신의 이야기를 하자 라이예나가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바위와 오카리나라. 드워프들을 만났나 보군. 그들은 땅굴 안에서 오래도 버텼지.]“드워프는 어떤 종족입니까?”
[성격이 급하고, 고집불통에, 아집에 가득 찬 난쟁이들이다. 다만 금속을 다루는 재주 하나는 대단하지.]어쩐지 엘프와 드워프라는 종족의 특성이 지구에 퍼져 있는 속설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드워프들이 떠난 땅굴 앞에 서서 오카리나를 불어 대는 인간이라니, 처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만큼 평화로운 시대가 아니니, 그 인간에게 허튼짓은 그만두라고 해라.]“알겠습니다.”
[그대는…….]라이예나가 불쑥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너무 가까웠다.
그녀가 서로의 숨이 닿을 듯 가까이 서자, 유진은 당황했다.
엘프들은 서로의 거리감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숲의 내음이 나는 그녀의 날숨이 유진의 턱에 닿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말끄러미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예나의 손이 유진의 가슴에 올라왔다.
바람이 불어 들었다. 내공과도, 마력과도 다른 기운이었다. 의지를 가진 듯한 무언가가 유진의 몸을 씻어 내렸다.
“무엇입니까?”
[그대에게 피 냄새가 나기에.]라이예나는 여태껏 표정이 없었다. 계속해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어리자, 마치 꽃이 핀 듯했다.
[그대에게 피 냄새는 어울리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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