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you know nothingness? RAW novel - Chapter 37
13. 잘못된 만남 (2)
너무나 자연스러운 한국말에 유진이 깜짝 놀랐다.
“한국말이 유창하군요?”
“오브 콜스.”
“정작 영어 발음은 시원찮은 듯한데…….”
“네가 영어에 대해 뭘 알아?”
제임스는 과연 범상치 않은 무인이었다. 느껴지는 기운이 뜻밖에 정순했다.
중단전을 자극해 살검을 뽑아내는 김가원과 비슷한 부류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실제로는 고절한 도가 문파의 기도를 품고 있었다.
마치 수련이 높은 도인을 마주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안에 든 것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도적.
유진은 눈을 부릅떴다.
“제임스. 실제로는 처음 만나지만, 우리 사이에는 해묵은 은원이 있지요.”
“그때 내 부하를 괴롭히고 떠난 날강도 같은 무인이, 바로 너인가. 과연 뺀질뺀질하기 짝이 없는 낯짝이군.”
“날강도는 그쪽인데 나에게 덮어씌우다니, 과연 뻔뻔합니다.”
유진과 제임스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문답무용(問答無用), 어서 겨루도록 하지요.”
유진은 제임스와 마주하는 순간 알 수 없는 예감을 느꼈다.
이자와 제대로 손을 섞어, 계도(啓導)해야 한다.
“나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계룡산의 지배자는 그런 존재지.”
제임스가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자, 저 위에서 싸우자. 제대로 된 장소가 있다.”
상황이 이 정도로 진행되자 안주희는 어이가 없어졌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계룡산 제임스를 만나고 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같지가 않았다.
그녀가 김비서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홍유진 씨를 믿어 봅시다.”
이내 그들은 계룡산의 깊은 곳에 자리한 제임스의 거처에 다다랐다.
그린 듯이 예쁜 통나무집이 있었고, 주변에는 여러 색깔의 꽃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제임스가 국화 한 송이를 꺾었다.
“도전자, 이건 널 위한 거다. 조의를 표하지.”
“들고 있는 건 당신입니다만.”
“네 무덤에 던져 주지.”
“든 채로 묻히면 되겠군요.”
대결을 앞둔 유진과 제임스는 소소한 트래시 토크를 나누며 공터 한가운데에 섰다.
“여기가 좋겠군.”
“봉분을 만들 장소 말입니까?”
“아니, 널 화장할 장소.”
어느새 소식이 전해졌는지, 계룡산 곳곳에 퍼져 있던 도인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전부 노란 머리띠를 하고 있어서 마치 사이비 종교 같았다.
도인들이 제임스를 응원했다. 열화와 같은 환호가 제임스에게 쏟아졌다.
“저, 저희도 응원할까요?”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비서와 안주희는 뒤에 쭈그러져 있었다.
유진과 제임스가 몸을 풀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는 별것 아닌 싸움 같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컸다.
계룡산의 지배자 제임스는 무인들 사이에 이미 악명이 퍼져 있는 고수였다. 그런 그가 유진에게 패한다면 한국의 무인 업계에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부의 사정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유진과 제임스는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제임스.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합니까?”
“나는 언어에 재능이 있으니까.”
“비자는 있습니까?”
“특별 무인(武人) 비자를 받았지.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에 거주 중이다.”
“미국인이 계룡산에 터를 잡은 연유는 무엇입니까?”
“그건…….”
역린(逆鱗).
누구에게나 역린은 있다.
그리고 유진의 이 질문이 제임스에게는 역린인 모양이었다.
제임스가 눈을 크게 뜨고는 노호(怒號)했다.
“알 것 없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진은 뒷짐을 진 채 제임스의 공세를 지켜보았다. 제임스가 손을 뻗을 때마다 현묘한 무의 이치가 유진을 노렸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주먹이 급소를 겨냥했다.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면, 지워 버리면 된다.
유진은 제임스의 주먹에 대응해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을 이기는 것은 보.
유진은 우주의 이치를 품은 가위바위보의 원리로 제임스의 주먹질을 모두 감싸 안았다.
허공을 넘어 유진에게 날아들던 제임스의 유도탄 같은 권기(拳氣)가 모조리 스러졌다.
제임스가 미간을 모았다.
“홀리 쉿…….”
“제임스, 한국 생활이 길어서 그런지 영어가 어색하군요. 한국 생활은 마음에 드십니까?”
“왓 더…….”
유진은 의도치 않게 또 한 번 그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제임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부하를 하산시킬 정도의 실력은 있군. 어디서 보냈지?”
“누구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내 의지로 온 것이지요.”
“네 의지?”
“예. 나의 자유 의지로 당신을 벌하러 왔습니다.”
“자유 의지,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나?”
“예?”
제임스가 갑자기 선문답 같은 소리를 했다.
“네 자유 의지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내가 보여 주겠다!”
그리고 제임스는 별안간 통나무집 옆에 지어져 있는 조그마한 별채로 갔다. 갑자기 홀로 연무장에 남은 유진이 도인들의 야유를 받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지? 사연 있는 사람인가?”
이윽고 제임스는 연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선택한 무기는 검이었다.
“저기, 제임스?”
“뭐냐?”
“나도 칼 하나 줘야…….”
“닥쳐라!”
제임스는 혼자 칼을 들고 유진에게 덤벼들었다.
“설마?”
“칼이 필요하다는 네 의지는 나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어떠냐! 나만 칼을 쓴다! 이게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힘이지!”
뛰어오른 제임스는 유진의 머리 위에서 벼락처럼 검을 내리꽂았다.
그 시퍼런 칼날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유진은 깨달음을 얻었다.
어이가 없지만 정말로 얻고 말았다.
칼을 얻고자 했으나 얻지 못했다. 자유 의지가 공격당한 것이다.
그리고 제임스.
자유 의지가 얼마나 허망한지 알려 주려는 제임스의 교훈적인 의도와, 어떻게든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제임스의 비열한 의도가 한데 모여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선과 악.
정과 탁.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제임스의 모습 자체가 혼돈이었다.
이는 곧 유진에게 태극의 원리를 의미했다.
혼원기가 절로 반응했다.
제임스와 손을 섞으면서 연결해 두었던 하단전과 중단전이, 저 스스로 공명하더니 더 큰 기둥이 되어 상단전을 이었다.
천지인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생사현관의 이능이 발휘되었다.
유진의 손에서, 빛나는 검이 솟아났다.
“혼돈을 다스리는 것은 질서이고, 질서를 부수는 것은 혼돈이니…….”
유진의 기검(氣劍)을 본 제임스가 경악했다.
“오, 마이…….”
달려드는 제임스의 검술 자체는 뛰어났다. 그 역시 상단전을 열어 화경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 맞았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검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쉼 없는 수련으로 자신을 완성해 온 고수.
하지만 모자라다.
실력도, 깨달음도, 유진의 밑에 있었다.
이윽고 제임스가 내리꽂는 벼락같은 철검과.
유진이 치켜든 고요한 기검이 맞부딪쳤다.
고수들의 싸움이 그러하듯, 그 결과는 여느 사람들이 기대하는 물리적인 상호 작용을 벗어나 있었다.
“크악!”
두 검이 맞부딪쳤는데 어느 한쪽도 튕겨 나가지 않았다.
베이지도 않았다.
검과 검이 닿는 순간, 빛이 흐릿하게 일었고.
이내 빛이 사그라졌을 때에는, 오연히 서 있는 유진의 발치에 제임스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복하고 있었다.
“크으윽…….”
제임스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제임스, 이래도 자유 의지가 무용하다고 생각합니까?”
“어, 어떻게…….”
“나는 검을 얻고자 했으나 당신은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결코 굴복하지 않는 자유 의지로.”
유진이 자신의 손에 쥐여진 기검을 놓았다.
마치 형광등이 깜빡이듯, 한 차례 점멸한 기검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유진은 마치 세례를 내리듯 부복한 제임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지켜보던 도인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임스가 반발했다.
“닥쳐라! 그래, 이 또한 자유 의지의 실패로구나. 계룡산의 지배자가 된 줄 알았지만 나는 또 패배하고 말았다. 나는 세상에게 미움을 받는다. 검을 안 줬더니, 알아서 검을 만들어 내는 말도 안 되는 고수까지 보내어 이런 수모를 겪게 한다. 이것이 운명인가. 나는 패배하도록 운명 지어진 인간인가. 역시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품은 자유 의지는 모조리 패배했다…….”
유진은 순간 가슴에서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헛소리를 늘어놓는 제자를 두들겨 패기 전에 늘 이랬다.
주로 천마 녀석이 그랬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천마가 생각났고, 그 때문에 노기가 두 배로 치밀었다.
유진이 웅혼한 사자후를 터뜨렸다.
─갈!
그의 꾸짖음이 계룡산을 뒤흔들었다.
이는 유진이 지구에 와 터뜨린 사자후 중에 가장 강력했다.
제임스가 망연한 표정으로 유진을 올려다보았고, 주변에 선 도인들은 뇌가 진탕되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김비서는 기막을 펼쳐 자신과 안주희를 보호했다.
“너, 너는…….”
제임스가 손을 뻗어 유진의 배를 쓰다듬었다.
유진은 뿌리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내공이 그리 많지는 않군. 그런데 어찌 이리 쩌렁쩌렁한 사자후를…….”
“공명(共鳴).”
유진이 대답했다.
“규모를 키우는 것은 내공의 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명으로 하는 것입니다.”
“공명이라고 해도 어떻게 이런…….”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습니다.”
“노력? 하하하…….”
유진의 배를 만지던 제임스는 이내 허탈하게 웃으며 뒤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그는 연무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내가 졌다. 이제 계룡산의 지배자는 너다.”
계룡산의 지배자 제임스가 이름도 없는 젊은 무인에게 패했다.
단 두 번의 격돌로 결판이 났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제, 제임스 님!”
“제임스 님!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약해지지 마십쇼!”
“제임스 님!”
도인들이 제임스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이는 진심으로 그를 북돋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룡산에서 산적질을 계속하려면 제임스의 위세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의 등을 떠미는 것에 불과했다.
“제임스 님, 시발! 쓰러지면 안 된다고요!”
“제임스 님! 야, 일어나! 제임스!”
때문에 쏟아지는 응원이 제임스에게는 도리어 모욕이 되었다.
“하하, 하…….”
제임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유진은 그에게 물었다.
“제임스 패트릭, 어쩌다가 계룡산의 지배자가 된 겁니까?”
정말로 궁금했다.
어쩌다가 미국인이 충청도 계룡산에 와 도인연합을 결성하고 산의 지배자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인지.
그리고 왜 그렇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폄훼하는 비관론자가 된 것인지.
계룡산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제임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리하여 제임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힙합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갑자기 힙합이 나왔다.
“그것도 올드 스쿨 힙합을 좋아했지. 나는 우-탱 클랜(Wu-tang Clan)의 팬이었다.”
유진은 혼란스러워졌다.
육체의 주인인 홍유진에게도 힙합에 대한 지식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김비서가 설명했다.
“우-탱 클랜은 미국의 90년대 이스트 코스트 힙합을 대표하는 그룹입니다. 그룹의 이름은 중국 무술 영화의 영향을 받아 무당파(武當派)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번안 과정에서 무당파가 우-탱 클랜으로 소개되었죠.”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우-탱 클랜을 통해 중국 무술 영화를 접했지. 나는 무인이 되고 싶었다. 그것도 무당파의 고수가 되고 싶었다.”
이야기는 더 미궁에 빠졌다.
무당파의 고수가 되고 싶었다는 랩 마니아가 어쩌다 계룡산의 지배자가 되었나.
이는 제임스를 번뇌에 빠지게 만든 지점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열정은 마그마와 같았다. 그래서 무당파에 무공 유학을 가기 위해, 내가 살던 동네의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여행사로 가 무당산에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런데요?”
“쉬운 일이니 걱정 말라고 하더군. 곧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는 비행기를 타고 무당산을 향했다.”
제임스가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과거의 풍경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세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시발점. 시발,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제임스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내가 만난 것은 내가 꿈에도 그리던 우─탱 마운틴, 무당산이 아니었다.”
“그럼?”
“무등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