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77
#닥터 플레이어 177화
얼음에 둘러싸인 겨울 검이 그대로 그녀의 이마를 강타해 버렸다!
와장창!
얼마나 강하게 충돌했는지, 얼음이 와르르 깨어져 나가버렸다.
묘인족 여인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털썩 쓰러져 버렸다.
[‘거인을 쓰러뜨린 난쟁이’ 업적이 4+로 강화합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울 때 이전보다 ‘조금 더’ 강한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크르르…….”
하지만 강력한 진혈족답게 의식을 잃지 않고, 쓰러진 채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레이몬드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뭐야, 기절 안 했어? 그렇게 세게 맞았는데? 진혈족은 두개골이 돌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래도 다행인 건, 기절만 면했을 뿐, 몸은 전혀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묘인족 여인은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풀려 털썩 쓰러져 버렸다.
‘포로로 잡아야 해!’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는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
“멈춰라! 움직이면 목을 베겠다!”
‘으아아. 힐러인 내가 인질을 잡다니!’
레이몬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투사 본능도 사라져 겁쟁이 본능이 미친 듯 올라왔다.
억지로 두려움을 참고 외쳤다.
그나마 ‘강철의 심장’ 효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강렬하게 외칠 수 있었다.
“다들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이 여인의 목숨은 없다!”
전투가 멈추었다.
“소니아 님!”
“이놈!”
묘인족들은 이를 갈며 레이몬드를 노려보았고,
‘주군! 우리를 위해 저렇게 위험을 감수하다니!’
엘무드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이 못나서 레이몬드가 저런 위험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눈물의 자책을 하였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겠어! 주군의 손끝 하나 더럽히지 않는 기사가 되겠어!’
엘무드는 이날의 일을 계기로 필사적인 수련 끝에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지만, 그건 일단 나중의 일.
포로로 잡힌 묘인족 귀족 여인, 소니아가 섬뜩하게 레이몬드를 노려보았다.
“그냥 죽여라! 내 복수는 일족이 갚아줄 테니!”
상대의 흉흉한 기세에 레이몬드의 심장이 더욱더 오그라들었다.
‘으으. 이런 일, 내 적성에 안 맞아. 난 힐러라고.’
레이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서 이 살 떨리는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전 당신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소니아는 살기를 뿜어냈다.
“무슨 속셈이지? 감히……!”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흰 당신들을 적대할 생각이 없다고요. 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웃기지 마라!”
이렇게 되자, 평화주의자(?) 레이몬드도 짜증이 났다.
‘아,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들어? 확! 한 대 쥐어 박아버려?’
마침,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진상’임을 확인합니다!] [상대의 ‘진상력’은 ‘중간’입니다!] [상대의 진상 패턴에 맞춰 ‘진상 특수기 : 강단 있는 대처’가 발현됩니다!]강단 있는 대처!
마침 지금 상황에 가장 필요한 대처법이었다.
스킬의 도움으로 레이몬드의 말투가 바뀌었다.
“갑자기 저희를 적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니 불쾌하군요. 더구나 전 당신들을 도울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뭐?”
“전 힐러. 당신 일족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무슨?”
레이몬드는 검을 안 든 반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란 듯 힐을 펼쳤다.
파아앗!
과거에 비해 한결 밝아진 빛이었다.
거진 C+급에 달하는 빛!
‘마나 스탯이 올라가며 힐의 등급도 올라갔구나.’
어쨌든 힐의 등급은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가 힐을 펼친 의도는 주의를 환기하려는 것이었으니까.
“…….”
맑고 성스러운 빛에 묘인족들이 주춤 멈추어섰다.
힐은 하늘의 축복.
그래서인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묘인족들의 적대심이 다소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저, 정말 힐러?”
“그러면 우리 일족에게 생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도 사실이야?”
묘인족들이 웅성거렸다.
소니아가 이를 악물며 대표로 물었다.
“이, 일족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이지?”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전 당신들에게 생긴 비극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무작정 저희를 적대하니 어쩔 수 없군요. 도움을 주려는 생각은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수밖에.”
“……!”
레이몬드는 딱딱한 어조로 말을 했다.
“비록 제가 힐러이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까지 당신들을 돕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인질로 잡고 산맥을 내려갈 테니, 환자들은 당신들이 알아서 하십시오.”
묘인족 여인, 소니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지?”
“당장 밑에 내려가 인간들의 영지로 가보십시오. 제 이름, 레이몬드를 대고 물어보면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소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레이몬드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믿기 싫으면 마십시오. 저희가 아쉬울 건 없으니.”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그냥 내려가 다시는 이 산맥에 올라오지 않으면 끝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동족을 잃으며 내 도움을 거절한 걸 후회하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늦었습니다.”
“하, 하지만 네놈의 눈동자는? 분명 그때 수작을 부리던 놈의 눈동자와 같은?”
“이런 색깔 눈동자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인지 아십니까?”
레이몬드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였다.
소니아는 당황해 물었다.
“우리 묘인족이 알기로 그 에메랄드 눈동자는 인간 중 특별한 이들에게만 전해지는 눈동자라고 들었다.”
“전혀 아닙니다.”
인간 중 특별한 이.
페닌슐라 왕가의 성안(聖眼)을 말하는 듯했다.
그들의 성안은 전 대륙적으로 유명한 심볼이었으니까.
“그들 말고도 에메랄드 눈빛을 가진 이는 많습니다. 당장 어린 시절 제 옆집에 살던 막스 아저씨만 해도 같은 색깔의 눈빛이었고요.”
에메랄드 눈빛이라고 무작정 성안이라니!
묘인족이 인간 세상에 무지해 벌어진 촌극이었다.
‘에메랄드 눈빛 가진 일반인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점에서 에메랄드 눈빛이라고 범인이 페닌슐라 왕족이라고 모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물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만.’
중요한 건, 마정석 광산에 누가 손을 썼다는 것.
그리고 그 범인이 에메랄드 눈빛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건 정확한 조사를 해봐야 해.’
끔찍한 재앙이 벌어진 일이다.
만약 이게 우발적 사고가 아닌, 누군가의 의도적인 수작이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됐다.
‘그러려면 묘인족들의 협조가 필요해. 범인을 목격한 건 이들밖에 없으니까.’
그때, 소니아가 말했다.
“그, 그렇다면 정말 일족을 치료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그렇다면 그 방법을 우리에게……!”
“공짜로요?”
“……뭐?”
레이몬드는 입술을 삐죽 씰룩했다.
‘다짜고짜 공격한 주제에 대뜸 치료법을 내놓으라니. 너무 양심 없는 것 아니야?’
물론 그는 묘인족들을 치료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괘씸해서라도 공짜로는 못 치료해 주겠다.
“어, 어떤 대가를?”
“일단 사과 먼저 하십시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가한 것.”
“…….”
묘인족 여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명백히 그들이 잘못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하다.”
“별로 진심이 안 느껴지는군요. 더구나 전 당신의 아랫사람이 아닌데 말입니다.”
묘인족 여인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그래도 본인들의 잘못을 알아 더욱 공손히 사과하였다.
“미안…… 아니, 미, 미안합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입니다. 일족의 죽음으로 이성이 마비돼 경솔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사과를 받은 레이몬드는 어떤 보상을 받아낼지 고민하였다.
막상 뜯어내려고 하니, 받을 만한 게 없었다. 묘인족들은 돈도 없을 테니.
‘아, 하나 있구나.’
레이몬드는 묘인족들이 보인 용맹한 모습을 떠올렸다.
‘저들이 우리 편이 되면 영지에 큰 전력이 될 텐데.’
레이몬드는 묘인족들을 살펴보았다. 하나하나가 용맹하기 짝이 없는 전사들이었다.
‘지금 모인 이만 50명이니. 마을에 있는 이들까지 하면 100명은 되겠지.’
즉, 거의 100명분 기사급 전력인 것이다!
저들이 그의 편이 되어주면 아주 든든할 것 같았다.
‘영지의 힘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니까.’
“환자들을 치료해 줄 테니, 당신들과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친구?”
묘인족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정확히는 동맹에 가깝겠지요. 앞으로 이런 식으로 적대하는 걸 막고, 서로 도움을 주는 친구 말입니다. 참고로, 저는 라팔드 지방의 제후가 될 자.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소니아를 비롯한 묘인족들은 눈을 깜빡였다.
‘인간답게 굉장히 무리한 대가를 요구할 줄 알았는데?’
무리는커녕 그들에게 도리어 좋은 요구였다!
인간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맺어 불의의 충돌을 방지하는 건 환영할 일이니까.
“좋다. 그 요구를 수락하지.”
“위대한 아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그래, 그렇게 하겠다.”
소니아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몬드는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넘어갔어!’
방금 레이몬드의 제안에는 함정이 있었다.
바로 서로의 위기 때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
‘깊은 산골에 숨어 사는 묘인족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 일이 뭐가 있겠어? 도움받을 일이 생겨도 나한테 생기겠지.’
즉, 그한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물론 레이몬드의 라팔드 지방에도 위기 상황이 생길 가능성은 적었다.
레이몬드는 드로튼 왕국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하지만 강한 힘을 지니는 건 필요해. 묘인족과의 동맹은 큰 도움이 될 거야.’
무엇보다 외부에 커다란 과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우리 라팔드 지방은 묘인족과도 동맹을 맺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수인족이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는 건 익히 유명했으니, 상대측은 묘인족을 의식할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런데, 레이몬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묘인족들이 그의 제안에 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다.
‘뭐야? 왜 저런 반응이야?’
묘인족들이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우리에게 친구라니…”
“저런 인간이 있다니.”
그들이 아는 인간은 두 부류였다.
그들을 적대하거나, 아니면 이용하려 하거나.
그런데 눈앞의 인간, 레이몬드는 달랐다.
그는 자신들과 ‘친구’가 되자고 했다.
저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단순히 우리 묘인족을 이용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친구가 되면, 우리도 안전해져.’
수인족이 깊은 산 속에서 숨어 사는 건 깊은 산 속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인간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제후가 될 저 인간과 친구, 동맹을 맺으면, 묘인족들도 그런 걱정을 덜 수 있게 된다.
‘또한, 필요한 물품들도 교류할 수 있게 될 테고. 자신을 적대한 우리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다니. 저 인간은 도대체?’
소니아는 기품 있고 잘생긴 레이몬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보니 참으로 선한 얼굴이다. 어두운 숲속에서 홀로 빛이 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