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0
#닥터 플레이어 20화
첫 번째 방문자는 어거스트 백작이었다.
“어거스트 백작이 찾아왔다고?”
개린슨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곧 준엄한 인상의 중년 귀족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거스트 백작이었다.
개린슨 백작은 당황을 감추고 어거스트 백작을 환대했다.
“오랜만이구려, 백작. 반갑소이다.”
“난 별로 반갑지 않소만.”
“……뭐라고요?”
개린슨 백작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 반문했다.
어거스트 백작은 적대감이 명백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소. 레이몬드 경에게 부린 질 나쁜 장난질을 당장 무르시오.”
“……!”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아리라 믿소.”
개린슨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설마 그에게 내린 등급 때문에 지금 이러는 것이오?”
“잘 아는군.”
개린슨은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남부의 대귀족 어거스트 백작이 고작 치료사 하나의 등급 문제 때문에 직접 찾아와 이런 행패를 부리다니?
“치료사의 등급을 결정하는 건 우리 치유의 탑의 고유 권한이오. 기준대로 처리했는데, 무턱대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곤란하오.”
“기준?”
“그렇소.”
어거스트 백작은 피식 비웃었다.
“우습군.”
“……!”
“누가 봐도 그릇된 이유로 수작을 부린 게 빤히 보이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다니. 뻔뻔하구려.”
도를 넘은 말에 개린슨 백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 감히, 그게 무슨 망언이오?!”
“망언? 망언이라면 정확히 설명해 보시지.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레이몬드 경에게 D등급을 준 건지.”
어거스트 백작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끓어올랐다.
기사들이 발현하는 ‘투기’였다.
그는 마치 찍어누르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개린슨 백작을 노려보았다.
“난 남부의 촌놈이라 수도 귀족들처럼 고상하게 이야기하는 법을 잘 몰라. 맨날 하는 게 국경에서 치고박는 거라, 머리도 단순하지.”
“…….”
개린슨 백작은 딱딱하게 굳어 입을 다물었다.
심심하면 적국과의 전쟁터가 되는 남부 지방의 대귀족, 어거스트 백작가의 가주가 내뿜는 기세는 고작 수도의 알량한 정치꾼이 받아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몬드 경은 우리 가문의 은인이자, 친우. 그런 이가 말도 안 되는 수작질을 당해 나는 지금 화가 많이 나 있소.”
“…….”
“어째서 레이몬드 경에게 그런 등급을 주었는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보시오.”
개린슨 백작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납득할 만한 이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눈앞의 어거스트 백작을 아랫사람 대하듯 찍어누를 수도 없었다.
‘제기랄. 고작 그 더러운 사생아 놈 때문에 내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침묵이 길어질수록 어거스트 백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지은 죄가 있는 개린슨 백작은 목이 탔다.
하지만 악몽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거스트 백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나도 궁금하군요. 레이몬드 경에게 어째서 그런 낮은 등급을 주었는지 말이에요.”
개린슨 백작은 어거스트 백작이 나타났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놀라 고개를 숙였다.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소피아!
레이몬드의 배다른 동생이자, 휴스톤 왕국의 제1공주인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일어나세요.”
소피아의 얼굴은 싸늘했다.
인형 같은 외모는 여전했지만,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에서 얼음장 같은 위엄이 뿜어져 나왔다.
“레이몬드 경에게 어째서 D등급을 준 것이죠?”
“그…….”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개린슨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거스트 백작에 소피아 공주까지.
가볍게 생각한 일이 상상도 못 하게 커져 버렸다.
“힐의 등급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제가 쓰려졌을 때 A등급의 치료사분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군요.”
개린슨은 묵묵부답.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소피아 공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쓰러진 이후,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닌지 피로한 안색이었다.
“저는 그만 가보겠어요. 백작께서 현명한 판단할 것으로 믿어요.”
소피아 공주가 등을 돌리자, 개린슨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 어째서 왕녀 전하께서 그런 더러운 사생아를 신경 쓰는 것입니까?”
소피아는 우뚝 멈추어서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 쓰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감히 이 몸을 치료한 치료사가 D등급 따위를 받는 걸 용납하지 못할 뿐이에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오해하지 마세요.”
휙 사라진 소파이를 보며 개린슨 백작은 멍한 얼굴을 하였다.
* * *
어거스트 백작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소피아 공주까지 나선 이상, D등급을 주는 건 무리였다.
‘제길! 애미도 없는 년이.’
개린슨 백작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 그러면 레이몬드 경의 등급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백작님?”
개린슨 백작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정황상 D나 C등급을 주는 건 무리.
B…… 아니, 어쩌면 B+등급을 주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둘 중 어느 쪽을 주어야 할지 도무지 결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황도(皇都)에 연락해.”
“네?”
황도!
십자 연맹 제국의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십자 연맹 제국은 열 개의 나라가 합친 제국이니, 당연히 황제가 따로 존재했다.
물론 십자 연맹 제국을 구성하는 십국(十國)은 서로 동등한 연합국이었으므로, 황제라고 십국을 강제로 지배할 권한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대표와 비슷한 선출직으로, 십국의 왕족 중 가장 명성이 높고, 인망이 뛰어난 이를 선출한다.
어쨌든 그 황제가 머무는 황도에 치유의 탑의 총본산이 있었다.
“난 결정할 수 없으니, 황도에 물어보라고!”
“아, 네, 넵!”
시험관들은 곧바로 원거리 통신 마법을 통해 이번 사안에 대해 물어봤고, 오래지 않아 답이 왔다.
-U등급.
치유의 탑에서 레이몬드에게 내린 등급이었다.
그 뜻은 이러했다.
-Undetermined(결정하지 않음.)
즉, 굳이 일부러 등급을 결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조롱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Unvalue(가치 없음.)
고작 잡술로 얻은 치료사 자격. 등급을 결정할 가치도 없다고.
어쨌든 그렇게 레이몬드의 등급이 결정되었고, 그날부터 U는 레이몬드의 상징과도 같은 문자가 되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은 U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였다.
-Undetermined & Unvalue(결정하지 않음, 가치 없음)이 아니라,
-Untouchable & Ultimate(감히 손댈 수 없이, 절대적인.)로.
그렇게 S등급, SSS등급.
그 위의 초월(Ex)등급조차 뛰어넘는 절대적인 등급이 탄생했다.
물론 아직은 훗날의 이야기였다.
* * *
“합격했다고?”
“정말로?”
그 소식을 들은 벨런드 치료원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돼. 떨어질 줄 알았는데.”
“잡술도 치료술로 인정해 준 건가?”
늘 그렇듯, 치료원의 사람들은 레이몬드의 능력을 폄훼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기쁜 날이었으니까.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네? 시험에 떨어진 드응신이 하는 이야기여서 그러는지.”
“……!”
뒤에서 험담하던 도제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참고로 그들은 이번 시험에 떨어진 이들이었다.
“마, 말씀이 심하십니다, 레이몬드 경!”
“뭐라고? 낙방한 드응신의 이야기라 안 들리는데? 시험에 합격하고 이야기해 주지? 아, 영원히 무리이려나?”
“이익!”
도제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사라졌고, 홀로 남은 레이몬드는 환호성을 질렀다.
‘됐어! 드디어 내가 해냈어! 치료사가 됐다고! 지긋지긋한 도제 생활도 이제 끝!’
야채 스프도, 딱딱한 빵도 이제 끝이었다.
앞으로는 스테이크 길만 걸어주리라!
“이깟 더러운 벨런드 치료원 따위! 치료사가 된 이상 더는 볼일 없지! 당장 불태워 버리자!”
“……뭐 하세요, 선배?”
한슨의 얼떨떨한 음성에 레이몬드는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한쪽 손에 장작을 들고 있었다.
“……어, 추워서.”
“지금 여름인데.”
합격에 정신이 잠깐 나갔다 보다.
방화범이 될 뻔한 레이몬드는 큼큼 헛기침을 하였다.
“축하해요, 합격.”
“어, 너도.”
한슨도 같이 시험을 쳤고, 합격했다.
랭크는 C등급.
그냥 평범한 일반 치료사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정식 치료사로 취직?”
“글쎄요. 메이플 치료원에서 연락이 오기는 했는데.”
치료사 자격을 딴 이후 길은 2개다.
작은 치료원을 차려 독립하거나, 치료원에 취직하거나.
요즘은 대부분 취직을 한다.
수도의 경우, 유수의 치료원들이 이미 환자를 다 장악하고 있어 그 틈새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플 치료원? 거기 수도 3대 치료원 중 하나잖아? 일반 평민 구역의 치료를 대부분 독점하고 있는? 잘됐네. 축하해.”
“…….”
분명 좋은 기회였건만, 한슨의 얼굴은 영 어두웠다.
고개를 갸웃한 레이몬드는 호탕하게 외쳤다.
“어쨌든 오늘은 맛있는 것 먹자! 내가 쏜다!”
“선배가요? 돈 있으세요?”
참고로 도제는 거의 무보수 열정 페이다. 당연히 가난하다.
“치료사 자격증 따자마자 대출받았지! 힐러 론(Healer Lone)에서! 어차피 다른 데 쓸데도 있어서.”
“…….”
“하여튼 오늘은 마시자!”
한슨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뭐라 타박을 하지는 못했다.
기쁜 날이었으니까.
특히 5년이나 도제로 설움을 당해야 했던 레이몬드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으리라.
“서, 선배. 그렇다고 쳐도 너무 많이 마시지는…….”
“괜찮아! 내가 다 쏜다!”
그렇게 둘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은 메시지가 전해졌다.
정식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유수의 치료원 두 군데서.
* * *
한 곳은 몽트 치료원이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전통이 있는 곳.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라울 치료원.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놀랐다.
‘수도 3대 치료원 중 하나이잖아. 사실상 수도 최고의 치료원.’
수도에는 3대 치료원이 있다.
헬리엔 치료원. 라울 치료원. 메이플 치료원.
그중 최고로 꼽는 곳은 헬리엔 치료원이다.
하지만 이곳은 트리플 A급 치료사인 헬리엔 백작이 운영하는 곳으로 왕족이나, 최고위 귀족만을 상대해 일반적인 치료원으로 볼 수 없었다.
일반적인 치료원 중 최고는 라울 치료원으로 꼽았다.
그런 곳에서 레이몬드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넣은 것이다.
“아시겠지만, 굉장히 좋은 기회입니다. 영광으로 생각하셔도…….”
“거절합니다.”
“……네?”
라울 치료원에서 나온 직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지금 뭐라고……?”
“거절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