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230
#닥터 플레이어 230화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로든 백작을 결박하도록.”
카이른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경비를 서던 기사들이 달려들어 로든 백작을 무릎 꿇리고 밧줄로 묶었다.
“앞으로 데려와라.”
다들 의아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든 백작은 카이른의 최측근 수하.
로든 백작의 뒤에 카이른이 있을 건 자명한 일이었다.
‘무슨 속셈인 거지? 법관의 권한으로 로든 백작을 구하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리 카이른 전하라도 이런 상황에서 로든 백작을 구명할 수는 없을 텐데?’
그때, 로든 백작이 허겁지겁 애원했다.
지금 그가 살길은 카이른밖에 없었다.
“저, 전하……! 저는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이건 음모입니다!”
카이른은 잠시 지그시 로든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난 그대의 충심을 알지.”
“그, 그러니……!”
“하지만 해명이 필요할 듯하네. 모든 걸 솔직히 말해주게.”
“……!”
로든 백작의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솔직히.
지금 카이른의 말뜻은 이거였다.
‘내게 죄를 덮어쓰라는 거야. 그러면 자신이 책임져 주겠다고.’
로든 백작의 머리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선택해야 했다.
카이른의 사주임을 밝히느냐, 아니면 홀로 죄를 뒤집어쓰느냐.
솔직히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나아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카이른도 같이 곤궁에 처하면, 그를 구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무조건 사형당하게 될 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죄를 덮어쓰고 전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게……?’
왕족을 죽인 이상 여기서 사형 선고를 받는 건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카이른이 힘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든 그를 구해줄 수 있었다.
‘정 안 되면, 형이 집행되기 전 사람을 바꿔치기해서라도 날 빼돌려줄 수 있을 거야.’
최소, 살아날 가망성이 제로인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지, 진실을 고합니다. 모두 제가 저지른 짓입니다. 왕국을 혼란하게 하는 페닌 후작을 응징하려는 마음에 그릇된 충성심을 발휘하였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로든 백작이 죄를 인정하자, 법정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로든 백작은 간절한 눈빛으로 카이른을 바라보았다.
‘전하, 제발……!’
그는 최선을 다했다.
이제 카이른이 그를 구해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진범이 밝혀진바, 나 2왕자 카이른이 국왕 전하의 권한을 대행해 판결을 내리겠다.”
순간, 로든 백작은 등줄기가 싸해졌다.
카이른의 눈동자가 지극히 차가웠다.
어떤 온기도 없이.
“저, 전하?”
“죄인 로든 백작에게 사형을 선고하겠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바다.
로든 백작이 바랐던 건, 형이 집행되기 전, 카이른이 힘을 써 어떻게든 그를 구해 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안의 흉악함을 고려해, 지금 곧바로, 즉결 처형을 하겠다.”
“……!”
로든 백작은 물론, 법정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즉결 처형이라니?
‘설마? 카이른의 의도가?’
그제야 사람들은 카이른의 속마음을 깨달았다.
측근인 로든 백작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를 죽여 입막음하려는 것이었다!
“안 돼, 막아야!”
하지만 늦었다.
파앗!
카이른의 검이 그대로 로든 백작의 목을 베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허억!”
“꺄악!”
법정이 경악으로 뒤덮였다.
카이른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은 얼굴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걸로 폐정하겠다.”
그리고 카이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마스터!”
크리스틴이 피고석에 있던 레이몬드에게 달려와 그의 손을 묶은 밧줄을 잘라주었다.
“고생하셨어요. 누명이 풀린 건 다행인데, 저 사이코패스 자식이 빠져나가서…….”
이번 일은 분명 카이른이 사주한 것이다.
하지만 로든 백작이 스스로 죄를 덮어쓴 채 목숨을 잃은 이상, 카이른에게 직접적인 죄를 추궁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네?”
“카이른 놈, 이제 끝났어요.”
크리스틴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든 백작이 죄를 덮어쓰고 죽었지만, 사람들이 믿을까?
어림없다.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다들 진짜 범인은 카이른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더욱 최악은 카이른이 로든 백작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카이른을 따르는 이들은 완전히 와해할 겁니다.”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왕위 계승 후보에서 완전히 탈락하게 된 거다.
“그래도 이걸로는 모자라요. 제대로 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는데.”
“당연히 모자라죠. 그래서 방법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
레이몬드는 품에서 기다란 유리병 하나를 꺼내었다.
굳은 피가 담긴 샘플 병이었다.
“세이틸 전하의 시신에서 채취한 혈액입니다. 이 혈액을 분석해 약물 중독 여부를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레이몬드는 사건 저녁 세이틸의 상태를 떠올렸다.
술이 아닌 무언가 약물에라도 취한 듯한 모습이었다.
‘세이틸의 시종들의 말에 따르면 사건 며칠 전, 카이른이 찾아와 약을 건네었다지.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는 약이라고 하였지만…….’
우울증약은 개뿔.
흥분 효과가 있는 마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이 혈액에서 마약 성분을 검출해 내면, 카이른을 이번 사건에 연루시켜 처벌할 수 있어.’
카이른 놈은 상상도 못 할 거다.
설마 시체에서 약물을 검출해 내 자신을 처벌할 증거물로 삼을 거라고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크리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약물 검출은 어떻게 하게요? 마스터께서 직접?”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연금술 지식이 떨어져 무리였다.
‘더욱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마침, 목소리가 들렸다.
“분석은 저희 마탑에서 할 거랍니다.”
라이나였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잠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각하?”
‘……싫은데.’
레이몬드는 삐칠 땀을 흘렸다.
어마어마하게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대화하다가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그때, 라이나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를 꺼냈다.
“‘놈들’에 대해서 각하께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 * *
페닌 치료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라이나는 우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누명을 벗은 걸 축하합니다, 각하.”
“아크 메이지께서 힘써주신 덕분이지요.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저야 각하께서 준비한 증거를 읊은 것밖에 없는걸요. 참…… 각하께서는 보면 볼수록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보배스럽습니다.”
레이몬드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삐칠 흘렀다.
그를 보는 라이나의 눈빛이 점점 탐욕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럴 만한 일이긴 했지만.’
법의학으로 사건 해결!
가히 혁명적인 일이긴 했다.
과연,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법의학 프로파일링?’
[법의학 프로파일링]종류 : 학문 스킬
숙련도 : D
-법의학적 단서를 근거로 범인의 ‘대략적’ 특성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가 올라갈수록 더욱 정확한 추론이 가능합니다!
법의학적 단서로 범인을 추론할 수 있다니.
대단한 스킬이었다!
‘……그런데, 딱히 필요는 없는 스킬 같은데. 이제 나는 범죄 현장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거라고.’
레이몬드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범죄에 연루되는 건 이번 일로 충분했다.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다.
‘난 힐러일 뿐이라고! 범죄는 기사나 수사관들이 전담해야지!’
피하고 싶은 건 범죄뿐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의 라이나도 문제였다.
‘……그렇게 탐욕스럽게 보지 말아달라고요.’
레이몬드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라이나는 세계에서 최고로 비싼 보석을 노려보는 귀부인 같은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날 마탑으로 납치해 가는 건 아니겠지?’
레이몬드는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런데 놈들의 흔적을 밟았다고요?”
“아, 네. 대륙 중부에서요.”
“……!”
대륙 중부.
십자연맹제국의 핵심 국가들 및 자유 도시 연합이 자리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놈들의 이야기를 내가 들어야 하나?’
레이몬드는 슬그머니 생각하였다.
‘……나 같은 소인배가 끼기엔 너무 커다란 스케일의 놈들인 것 같은데. 이런 건 마탑이나 왕국 차원에서 나서는 게 맞지 않나?’
솔직한 말로, 마음이 변했다.
마정석 광산 사건이 벌어진 직후 때에는 정의감에 불타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났더니, 음.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은 남들에게 맡기고 싶었다.
‘……범인을 잡는 데 꼭 내가 관여할 필요는 없으니까. 솔직히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 더 훌륭하고 적합한 사람 많잖아?’
놈들을 잡는 위험한 일은 그 훌륭하고 적합한 분들께 맡기고 본인은 안락하고 행복한, 돈 버는 삶만 살고 싶은 레이몬드였다.
‘일단 듣기만 하자. 듣는다고 내가 뭘 나서야 하는 건 아니니까.’
라이나는 잠시 차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사실 놈들의 흔적을 밟는 건 쉽지 않았어요. 단서가 너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다방면으로 조사하던 중,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
“최근 대륙 서남쪽 왕국들의 수뇌부 중 원인 불명으로 사망한 이가 대단히 많다는 것을요.”
“……!”
레이몬드는 흠칫하였다.
서남쪽 국가들.
4약의 국가와 다른 기타 왕국을 뜻한다.
“대표적인 게 드로튼 왕국이에요. 전대 국왕을 비롯해 수많은 유력자가 원인 불명으로 사망했고, 결국 베라드 대공이 권력을 잡게 되었지요.”
라이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대륙 중부의 국가 한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
“중요 인물들이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연달아 사망했는데, 덕분에 왕권 계승에서 밀려났던 이가 다시금 강력한 왕위 후보로 떠오르고 있어요.”
이게 정말 놈들의 소행이라면 무섭고 섬뜩한 이야기였다.
수많은 나라의 왕위 계승을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니까.
‘도대체 놈들의 정체가 뭐지?’
레이몬드는 놈들이 점점 더 두려워졌다.
‘……나 같은 소시민(?)은 정말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할 것 같은데.’
레이몬드는 일부러 그 중부의 국가가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괜히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라이나가 알아들을 수 있게 조금 더 직설적으로.
“그렇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그곳 왕국의 일은 전적으로 마탑 및 아크 메이지님께 믿고 맡기고, 저는 일단 휴스톤 왕국의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음모는, 난 모르는 일이다.
난 휴스톤 왕국에서 행복한 삶을 살 테니, 잘 부탁한다, 그런 의미의 말이었다.
그런데 라이나가 또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겁쟁이라고 욕하기는커녕, 감탄의 탄성을 터뜨린 것이다.
“역시…… 각하. 앞장서 놈들의 꼬리를 잡으려는군요.”
“……네?”
“휴스톤 왕국에도 놈들의 그림자가 드리운 걸 알고, 앞장서 나서려는 것 다 압니다. 아아, 어메이징. 이렇게 듬직할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