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77
#닥터 플레이어 477화 – 외전 25
아까 말했든 이 내기는 성왕에게도 위험도가 높은 제안이었다.
지면 레이몬드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니까.
만약 레이몬드가 승리하면, 지금껏 철의 제국에서 일어났던 사태를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난 철의 제국에 어마어마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 철탑을 인수하며 새롭게 생긴 빚의 탕감은 물론, 추가 돈까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성왕을 치료 대결에서 이길 수 있을까?’
다른 이도 아니라 성왕이다.
대륙 최고의 힐러.
솔직히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성왕도 본인이 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니 이런 위험한 제안을 한 거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피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가 무리할 필요는 없잖아. 냉정하게 말해 지금 이 사태들은 철의 제국 일이기도 하고.’
레이몬드는 무사 안전제일주의자.
지금껏 로즈에게 많은 도움을 받긴 했지만, 위험한 건 싫었다.
‘공증 마법을 쓰면 무리한 요구를 해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하지 말자.’
그렇게 결정하려는 순간이었다.
레이몬드가 퍼뜩 하나의 꼼수를 떠올렸다.
‘잠깐, 공증 마법으로 맹세를 해도 따르지 않을 방법이 하나 있잖아.’
레이몬드의 머리가 휙휙 돌아갔다.
‘공증 마법의 맹점을 이용해 사기를 치면 돼!’
사기!
놀라운 생각이었다.
공증 마법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조건’과 ‘대가’.
양 당사자들은 내기의 ‘조건’을 걸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시 어떤 ‘대가’를 치르겠다고 마법에 맹세한다.
이때 ‘대가’는 내기의 당사자들끼리 합의해서 정하기 나름이라 천차만별이었다.
‘이 대가를 나한테 유리하게 설정하면 돼! 내가 얼마든지 지불해도 되는 대가로!’
물론 녹녹한 일은 아니었다.
성왕이 보기에 납득할 수 있는 충분한 ‘대가’여야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레이몬드 당사자에게는 전혀 아쉽지 않은…….
‘그런 거 많지.’
레이몬드는 씨익 웃었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고객님?”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공증 마법에서 설정할 ‘대가’를 제 ‘황위’로 해주십시오.”
로즈가 눈을 크게 떴다.
황위!
만약 내기의 조건에 응하지 않을 시 황위에서 물러서겠다는 것이다.
‘황위 따위 나한테 하나도 필요 없는 거야! 이 기회로 황위를 벗어던질 수 있으면 오히려 땡큐 베리 머치지!’
명분도 좋다.
성왕의 간악한 흉계에 맞서려다가 불의의 패배를 당해서 황위에서 물러섰다.
얼마나 깔끔한가?
물러나면 차기 황위는 어떻게 하냐고?
알게 뭔가. 누군가 하겠지.
최대한 자신에게 이득이 될 이를 선정하고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나한테 이런 좋은 기회가 오다니!’
레이몬드는 자신의 천재적인 계획에 웃음이 나왔다.
일부러 내기에서 져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로즈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말했다.
“그건 절대로 안 돼요. 절 위해 그런 무리한 대가를 걸겠다니.”
“로즈 님?”
“아니, 애초에 고객님을 이번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어요. 이건 고객님과 상관없는 제 일이에요. 성왕과의 일은 성국과 전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레이몬드가 로즈의 말을 끊었다.
“로즈 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이지요.”
“……!”
“로즈 님의 일은 제 일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쉽게 로즈가 납득할 것 같지 않아서 한 말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로즈 님이 잘못되면 나도 잘못되는 거니.’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었다.
레이몬드의 빚은 1억 페나가 끝이 아니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십자연맹제국의 황실이 누대에 거쳐 쌓아온 빚도 있었다.
레이몬드가 일평생 노력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빚.
로즈야 레이몬드에게 그 빚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로즈가 물러나면? 다른 이도 그럴까?
물론, 이건 레이몬드 개인의 빚이 아니라 십자연맹제국이 진 국가의 빚이니, 누가 채권자가 되어도 쉽게 상환을 요구할 수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채권자가 십자연명제국 황실이 진 빚의 일부만 상환하라고 요구해도 황제인 레이몬드는 긴축 재정으로 쪼들리며 가난하게 살게 될 게 분명했다.
‘안 돼! 황제가 된 것도 서러운데, 궁핍한 생활까지 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레이몬드 본인을 위해서도 로즈가 만수무강 잘되어야 했다.
“전 꼭 로즈 님을 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일까?
로즈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침묵하였다.
“로즈 님?”
레이몬드가 의아해하는 순간이었다.
로즈가 돌발 행동을 하였다.
돌연, 입을 맞춘 것이다.
“로, 로즈 님?”
로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어, 어떤?”
레이몬드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어어 하다 보니 그는 소파에 기대듯 누워 있고, 로즈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객님이 이길 거라 생각은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된다면?”
“저한테 오세요.”
네?
그게 무슨 뜻? 이라고 반문하지 못했다.
로즈의 입이 다시 그의 입을 덮었던 것이다.
“고객님, 제가 책임져 드릴게요.”
* * *
레이몬드는 성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곧, 성대한 치료 학회가 개최되었다.
성왕을 초청한 명목이 대륙 최고의 힐러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하자는 것이었으니, 학회의 규모와 화려함도 어마어마했다.
모이기로 한 이의 면면도 어마어마했다.
온 대륙에서 최고로 꼽는 힐러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최소 SS급이나 SSS급.
그중에서도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여 명성을 얻은 세인트들이 초청되었다.
레이몬드가 내건 ‘대륙 최고의 힐러들의 학술 대회!’란 캐치프레이즈가 먹힌 건지 힐러들은 자신이 이런 영광된 학회에 초청받았다는 것에 감격하며 대부분 초대에 응하기로 하였다.
“두리안 왕국의 삼휘(三輝)급 세인트 유리안 님이십니다!”
“알펜서 왕국의 세인트 메지션 칸센트 경이십니다!”
초청받은 이들이 속속 연회장에 도착하였다.
한 명, 한 명이 유명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와, 대단한 분들 엄청 많아요. 지금껏 이름만 들어온 성자들인데.”
린든이 설렌 얼굴로 초청받은 힐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크리스틴이 묘한 눈으로 린든을 바라보았다.
“린든 경, 저 사람들보다 경이 더 유명해요.”
“네? 그게 무슨?”
“경은 폐하의 직속 수제자시잖아요. 폐하와 수많은 기적을 함께한.”
크리스틴은 차분히 말했다.
“저들은 기껏해야 자기 나라들이나 힐러들 사이에서만 유명한 거지만, 경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대륙에서 거의 없을걸요?”
린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초청받은 힐러들이 그들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린든이 보내던 눈빛과 비슷한 느낌의 시선이었다.
질투와 경계, 경외심.
저들이 내심 자신들보다 린든과 크리스틴을 더 높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에헴, 내가 그렇게 유명해졌다고?’
린든은 우쭐하려다가 곧 다시 푸시시 콧대가 꺾였다.
“하지만 그건 폐하가 대단하신 거지, 제가 대단한 건 아닌걸요. 한슨 선배나 공녀님이면 모를까.”
린든의 자신감 없는 말에 크리스틴이 눈썹을 찌푸렸다.
참고로 레이몬드의 세 명의 수제자는 각각 별명이 있었다.
한슨은 ‘빛을 지키는 악마’.
레이몬드 대신 악역을 자처해 생긴 별명이었다.
크리스틴은 ‘빛의 수술칼’이었다.
그녀의 수술 실력 덕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리고 린든은 ‘빛의 오른팔’이었다.
단순히 서포트를 잘해서 붙여진 별명은 아니었다.
린든은 모든 면에서 두루두루 뛰어났다.
크리스틴이 ‘외과 영역’, 한슨이 ‘내과 영역’에 치우쳐져 있는 것과 다르게,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빼어난 실력이 레이몬드의 오른팔답다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순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실력을 따지면, 린든이 한슨보다도 더 위였다.
“의기소침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린든 경도 충분히 대단하니까요.”
“……공녀님.”
린든이 감동한 얼굴을 하였다.
크리스틴은 같은 동문으로서 영혼 없이 기계적인 위로를 해준 것에 불과했지만, 모태 솔로 린든은 또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저, 정말 크리스틴 경이 날? 어, 어쩌지? 난 평민 출신인데? 장인어른이 허락하시려나?’
크리스틴은 그런 린든의 오해(?)도 모르고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단상 위에 서 있는 레이몬드를 향해서였다.
“…….”
크리스틴의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 레이몬드를 향한 개인적인 감정을 접었다.
아니, 정확히는 접겠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공녀님?”
“린든 경, 그거 알아요? 저 사실 소고기를 싫어해요.”
난데없는 이야기.
레이몬드를 향한 불만을 이야기한 거지만, 린든은 화들짝 반가운 얼굴을 했다.
린든은 크리스틴이 자신과 공통점을 나누려고 소고기 이야기를 꺼냈다고 착각하였다.
“저, 저도 사실 소고기 싫어해요!”
“린든 경도?”
크리스틴도 마주 놀란 얼굴을 했다.
“네! 네! 세상에서 최고로 싫어요!”
“……그렇군요. 저도 싫었는데.”
서로 공통점을 이야기하자 린든은 크리스틴과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린든의 가슴이 주책맞게 설레었다.
‘공녀님과 내가 은근히 잘 통하는구나. 앞으로 결혼하면 식단에서 소고기는 무조건 빼야겠어. 그런데 내가 먼저 고백해야 하나? 지금 분위기 좋은 것 같은데. 공녀님도 내 고백을 기다리고 있겠지?’
쿵쿵 심장이 뛰었다.
분위기에 홀로 취한 린든이 흑역사를 생성하려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자유 도시 연합의 진홍의 성녀님이십니다!”
* * *
Ex급 힐러인 진홍의 성녀의 등장에 연회장이 술렁였다.
“진홍의 성녀님도 오시다니.”
“그러면 대륙 삼성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건가?”
삼성(三聖).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힐러 세 명을 뜻하는 별명이다.
진홍의 성녀, 성왕과 레이몬드를 말한다. 원래는 광휘의 성자였지만,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게 발각되고는 제외되었다.
이전에 봤을 때처럼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등장한 진홍의 성녀가 레이몬드에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십자연맹제국의 위대한 빛, 레이몬드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시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셨는데?”
레이몬드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홍의 성녀는 원래 초청을 거절했다.
그녀가 다스리는 도시에 돌발적인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해결하고 왔어요. 이 학회는 저로서도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