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81
#닥터 플레이어 481화 – 외전 29
그뿐이 아니었다.
‘성왕을 내 소유로 삼으면 지금껏 죄를 자백시키는 것도 할 수 있어. 죗값도 수월하게 치르게 할 수도 있고.’
사실, 성왕의 죄를 밝혀도 그 뒷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성왕은 성국의 왕이다.
그런데 죄가 밝혀져도 어떻게 죗값을 치르게 한단 말인가?
철의 제국의 일이니 자신과 상관없이 로즈가 알아서 할 일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했다.
성국과 철의 제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십자 연맹 제국도 그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고.
‘안 돼. 전쟁이 일어나면 철의 제국에서 돈 버는 계획도 차질이 생길 거야.’
철의 제국은 이제 그가 지켜야 할 소중한 호구 밭이었다.
‘무엇보다 성왕을 처벌하는 일까지 도와주면,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지.’
생각하면 할수록 로우 리스크에 하이 리턴이다.
아니, 리스크는 없는데 리턴은 무한대였으니 이건 안 하면 바보인 내기였다.
“알겠습니다. 내기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레이몬드가 똑바로 성왕을 바라보았다.
“공증 마법의 ‘대가’로 반드시 조건을 이행해야 할 내용을 걸어주십시오.”
만약 성왕이 자신처럼 사기를 치려는 거면 곤란하다.
“전 제 황위를 걸겠습니다. 대신, 성왕께서는 성국을 걸어주십시오.”
“만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시 성국을 제 개인 영지로 삼겠습니다.”
물론 성국 따위 관심 없었다.
그저 성왕이 내기의 조건을 이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요구한 거였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장내가 경악에 잠겼다.
조건도 경악스러운데, 내기의 대가도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황위와 성국이라니.
“고객님. 전 찬성할 수 없어요. 아니, 무조건 반대예요”
로즈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깨알같이 숭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로즈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내기에서 제가 승리할 시 얼마나 커다란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어쩌면 수많은 피가 흐르는 걸 막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만약 이기기만 하면, 성왕의 음모를 밝혀냄은 물론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성왕을 처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로즈가 여전히 찬성하지 않자, 레이몬드가 굳건한 음성으로 말했다.
“절 믿어주십시오. 로즈 님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
로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성왕이 묘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레이몬드에게만 향하는 음성이었다.
‘뭔 헛소리야?’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성왕은 적이었다.
어제 만남 때는 다소 헷갈렸지만, 오늘 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보니 확실했다.
그런데 적에게 빛이니 어떠니 하는 이야기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치료 대결의 내용 및 승패는 믿을 수 있는 삼자에게 맡겼으면 합니다. 진홍의 성녀님입니다.”
진홍의 성녀!
레이몬드가 준비한 두 번째 속임수였다.
사실상 같은 한패인 진홍의 성녀를 심판으로 정해 최대한 유리한 결과가 나오게 할 속셈이었다.
다행히 성왕은 거절하지 않았다.
[진홍의 성녀라……. 확실히 그만한 인물도 없겠군요. 폐하의 말씀에 동의하겠습니다.]성왕이 면사 뒤로 싱긋 웃었다.
[그러면 학회장으로 이동하시지요.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레이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의학사…… 아니, 대륙사에 길이 남을 치료 결투의 시작이었다.
* * *
학회장은 철의 제국 황궁의 대연회장이었다.
간단한 다과를 즐기면서 이런저런 학술 경연이 진행되었다.
단상에 오르는 이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세인트들.
원래라면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대단한 힐러들이었지만, 학회장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집중하지 못했다.
모두 오늘의 하이라이트, 성왕과 레이몬드의 대결에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두 분의 대결이라니. 이 자리에서 대륙 최고의 힐러가 누구인지 결정되는 건가?”
“누가 이길 것 같나?”
“아무리 그래도 성왕 전하 아니겠나? Ex급 위의 Ex급이라고 불리시니.”
“하지만 레이몬드 폐하도 대단하시지 않나? 지금까지 일으킨 숱한 기적을 보면 성왕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네.”
“그렇긴 하지만, 이건 환자를 치료하는 대결 아닌가? 성왕을 능가할 수 있는 이는 이 세상 누구도 없을 걸세.”
그 말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레이몬드가 대단함은 이제 대륙의 모두가 안다.
하지만 성왕이다.
아무리 레이몬드라도 성왕을 치료 대결에서 이길 리는 없다고 모두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음성이 좌중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리석은 생각이군요.”
“……한슨 경!”
힐러들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하였다.
냉막한 인상의 미청년, 한슨이 싸늘한 얼굴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왕의 승리일 거라 이야기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 레이몬드 폐하께서 뛰어난 힐러인 것은 알지만…….”
“그러면 우리도 내기하도록 하지요.”
“무슨 내기를 말입니까?”
한슨이 손가락을 들었다.
“만약 폐하께서 이기면, 당신들은 폐하의 빛에 승복하여 페닌 치료원의 제자가 되는 겁니다.”
“……!”
힐러들은 주춤하였다.
“지면 어떻게 할 거요?”
“글쎄요? 지실 리가 없으신데, 굳이 질 때의 조건을 걸어야 할지는 모르겠군요.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군요. 폐하께서 혹시라도 패하시면, 당신들에게 페닌 치료원의 제자가 될 기회를 주겠습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요?”
이겨도 져도 페닌 치료원의 제자가 되라고 한다.
무슨 내기가 이렇단 말인가?
하지만 한슨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당신들은 폐하의 빛에 감화될 테니까요.”
“……!”
“스스로 앞다투어 페닌 치료원의 제자가 되기를 청할 테니, 전 미리 기회를 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자, 이제 두 눈을 크게 뜨고 보십시오. 폐하의 빛이 얼마나 위대한지.”
힐러들은 질린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헛소리하지 말라고 받아치지 못했다.
기세에 밀린 것이다.
한슨은 레이몬드를 향한 굳건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물론 한슨도 무조건 레이몬드가 이길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성왕이 상대이니, 아무리 폐하라도 고전할 수는 있겠지. 어쩌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확률로 패하실지도.’
레이몬드라고 무조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한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었다.
레이몬드는 늘 그렇듯 오늘도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음흉한 성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그의 빛은 이곳에 있는 모두를 밝게 감화시킬 것이다.
곧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레이몬드 황제 폐하와 성왕 전하이십니다!”
두 주인공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감탄한 음성을 내었다.
“오오.”
“숭고한…….”
레이몬드와 성왕은 나란히 학회장으로 들어왔는데, 두 명 모두에게서 숭고함이 흘러나왔다.
성왕은 면사에 가려져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저 존재만으로도 숭고한 기품이 흘렀다.
하지만 더욱 압권인 건 레이몬드였다.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껏 살아온 삶이 담긴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레이몬드는 옅게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자애로움이 깊게 느껴져 보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게 가난의 황제님의 숭고함.’
‘대륙의 빛이란 칭호가 부족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레이몬드는 슬그머니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스킬 효과 좋고.’
지금 그는 숭고함을 뻥튀기시켜 주는 스킬로 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성왕보다 더욱 숭고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여론을 가져와야 결투의 승패에 유리해.’
치료 결투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결투와 같지 않다.
서로 싸워 쓰러뜨리는 게 아니기에 누가 더 뛰어난 치료를 하였는지 판정해야 했고, 거기에는 지켜보는 이들의 주관이 작용했다.
그때, 은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단상 위로 올랐다.
“진홍의 성녀, 오르비아입니다. 두 분의 결투의 진행 및 판결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할을 맡게 되어 큰 영광입니다.”
그녀가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결투에 앞서 나 진홍의 성녀 오르비아는 하늘에 맹세코 공정한 결투 진행 및 판결을 내릴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도 제 판결에 따를 것을 맹세하시겠습니까?”
“맹세합니다.”
레이몬드가 잽싸게 답했다.
어차피 진홍의 성녀는 그의 편이다. 맹세야 100번도 넘게 해줄 수 있었다.
[저도 맹세합니다.]진홍의 성녀가 두 명에게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결투는 총 세 가지의 항목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모두가 오르비아를 주목하였다.
“바로 힐러의 본분, 이상, 실력. 이 세 가지의 항목입니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은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원래 치료 결투라고 함은 환자를 누가 더 잘 치료함을 겨루는 것을 뜻한다.
“이번 중책을 맡고 저는 고민하였습니다. 두 분은 대륙에서 최고로 숭고하다고 칭송받는 성인. 그런 두 분께서 단순한 치료 결투를 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게 맞는 건지 하는 것이지요.”
오르비아가 덧붙였다.
“두 분 정도 되면, 사실 환자를 치료하는 실력이야 종잇장 차이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면 치료 결투는 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합니다. 다만 제가 이야기한 힐러의 의무, 이상, 실력 항목을 종합해서 승부를 결정할 겁니다.”
사람들은 아리송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일반적인 치료 결투와 다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흐흐, 이게 바로 내가 준비한 꼼수이지.’
오르비아와 레이몬드의 눈빛이 은밀히 마주쳤다.
결투 전, 둘은 몰래 입을 맞추었다.
레이몬드에게 유리하게 결투 방식을 정하기로!
성왕과 치료 실력으로만 겨루면 질 확률이 높으니 다른 항목을 만들어 점수를 챙기자는 거였다.
성왕도 거절할 명분은 없으리라.
힐러의 의무, 이상은 치료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니까.
“힐러의 의무와 이상이 무엇인지는 다들 알리라 생각합니다. 힐러의 의무는 환자를 살리는 것. 그리고 힐러의 궁극적 이상은 힐러로서 만인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오르비아가 지금 말하는 이야기는 레이펜타이나의 힐러들에게 격언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이었다.
오르비아가 성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정한 판별을 위해 객관적인 수치를 사용하겠습니다. 두 분 중 지금껏 더 많은 환자를 살린 분을 첫 번째 항목, ‘힐러의 의무’ 부분에서 승자로 하겠습니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성왕께서는 무려 100년이나 수많은 환자를 치료해 왔어.’
‘하지만 가난의 성자님에 비할 바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