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482
#닥터 플레이어 482화 – 외전 30
성왕이 일으킨 기적은 셀 수도 없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였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다른 고위 힐러들이 부유한 자들만 치료하는 것과 다르게 일반 평민이나 백성들에게도 치료의 손길을 베풀었다.
성왕 또한 성인이란 칭호에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몬드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고작 몇 년이지만, 그동안 레이몬드가 살린 환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으니까.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숫자의 환자를 치료함은 물론 힐러로서 숱한 재앙을 해결했다.
단적으로 이번에 철의 제국 황도에서 벌어진 좀비화 사태를 예로 들 수 있다.
레이몬드는 이런 커다란 기적을 숱하게 일으켜 왔다.
‘……비교할 수조차 없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였다.
뜻밖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 항목의 승패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레이몬드 폐하의 승리입니다.]성왕이었다!
성왕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하였다.
[레이몬드 폐하께서 지금껏 얼마나 많은 환자를 살렸는지, 얼마나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힐러로서의 삶은 레이몬드 폐하에 비하면 부끄러울 정도이지요.]레이몬드는 당황하였다.
사실이긴 하지만, 결투의 상대인 성왕이 저렇게 말하니 당혹스러웠다.
‘뭐지?’
순간, 면사로 가려져 흐릿하게 비치는 성왕의 눈이 보였다.
레이몬드는 성왕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웃고 있어?’
레이몬드는 눈을 크게 떴다.
왠지 성왕은 즐거워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울려 퍼지는 음성에서도 그러한 감정이 느껴졌다.
[다음 항목도 제 패배입니다. 힐러로서의 이상, 힐러로서 만인을 이롭게 하는 것에 관해서 전 감히 레이몬드 폐하께 비할 수가 없지요.]성왕은 감탄이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레이몬드 폐하께서 환자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상을 실천해 오고 있는지 익히 들어왔습니다. 레이몬드 폐하야말로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빛이란 호칭에 어울리는 분입니다.]장내가 고요해졌다.
성왕이 레이몬드를 완전히 인정한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성왕이 레이몬드에게 마치 경외심을 품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내용이었다.
‘무슨 의도이지?’
레이몬드와 진홍의 성녀는 성왕이 왜 저러는지 파악하지 못해 주춤하였다.
성왕이 레이몬드에게만 들리게 음성을 보내었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저는 이전부터 폐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니까요.]“……그 말은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럴 수는 없지요.]성왕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지금껏 위대한 길을 걸어오셨음은 알지만, 그래도 폐하의 능력이 저보다 뛰어남을 확인해야겠습니다.]성왕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찬란한 빛이었다.
[고작 저조차 뛰어넘지 못한다면, 저는 폐하께 어떤 기대도 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레이몬드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게 무슨 이야기야? 나한테 기대하긴 뭘 기대해?’
성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기면 무슨 꿍꿍이인지 다 실토하게 할 수 있겠지.’
레이몬드는 오르비아에게 눈짓했다.
“……그러면 마지막 항목을 진행하겠습니다. 힐러의 실력, 치료 결투입니다. 두 분이 환자를 치료하면, 점수화하여 다른 두 개의 항목 부분과 종합해 승자를 결정하겠습니다.”
이것도 레이몬드의 꼼수였다.
성왕은 분명히 대단한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레이몬드는 솔직히 성왕보다 대단한 치료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점수화하기로 한 거지. 성왕이 100점을 맞아도 나도 90점은 챙겨갈 수 있게.’
만약, 승자 패자로 나누기만 하면 성왕이 모든 스코어를 가져가게 되지만, 이렇게 하면 레이몬드는 패하여도 엇비슷한 점수를 가져갈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앞의 두 항목과 합쳐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몬드다운 꼼수였다.
‘문제는 내가 엇비슷한 정도의 기적이라도 일으켜야 한다는 건데.’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준비해 온 건 있었지만, 과연 성왕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잘하자.’
레이몬드는 곧 다가올 슈퍼 리치의 미래를 꿈꾸며 파이팅을 하였다.
“그러면 성왕 전하께서 먼저 치료를 하시겠습니까?”
오르비아의 물음에 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요. 준비한 환자를 데려오도록.]곧 파리한 안색의 인간 환자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저 환자는?”
[아국에서 큰 죄를 짓고 장기 복역 중인 죄수입니다. 옥에서 심장 발작이 일어나 숨을 거두려고 해 이번 기회에 치료하기 위해 데려왔습니다.]원래 이런 학회장에서 치료 시범을 보일 때 대상은 인간형 몬스터를 주로 사용한다.
다만, 가끔 진짜 인간을 상대로 시범을 보일 때도 있었는데, 저런 식으로 큰 죄를 지은 죄수 환자를 대상으로 한다.
‘거의 심장이 멎기 직전의 환자야.’
환자의 상태를 알아본 레이몬드는 놀란 눈을 했다.
잔뜩 팽창한 경정맥. 헐떡이는 숨소리, 혼미한 의식, 피가 흐르지 않아 창백한 피부.
심각한 심장 부전으로 사망 직전의 상태였다.
‘심장이 복구 불가능하게 상했을 텐데, 저런 환자를 힐만으로 살린다고?’
Ex급 힐.
‘재생’의 권능을 지닌 대단한 힘이다. 즉, 조직이 괴사 손상되었어도 회복할 수 있다.
다만, 한계가 있다.
괴사가 심하거나, 시간이 오래 지났을 때는 상한 조직을 살릴 수 없었다.
같은 Ex급이라도 괴사된 조직을 어떤 범위까지 재생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서 실력 차이가 생긴다.
‘성왕은 과연 어떤 수준으로?’
그때, 성왕이 손을 들었다.
레이몬드는 긴장하는 마음으로 성왕의 시범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파아아앗!
성왕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
레이몬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숭고하디숭고한 빛이었다.
광휘의 성자와 진홍의 성녀가 사용하던 Ex급 힐도 찬란했지만,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격이 달라.’
레이몬드는 직감이 들었다.
저 환자는 살아날 것이다.
환자가 어떤 상태이든 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는 기적의 힘이 담겨 있는 힐이었다.
이윽고 빛이 환자의 몸에 스며들었고, 환자의 상태가 극적인 호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숨결의 상태가 안정적으로 변했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인체 생리학에 박식한 레이몬드는 환자의 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심장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폐울혈이 좋아졌어.’
그뿐이 아니었다.
시체처럼 파리한 안색에 점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심장성 쇼크가 해소되며 혈압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힐 한 번으로 심부전이 저렇게 극적인 호전을?’
한번 상한 심장의 기능은 잘 회복되지 않는다.
심근 경색을 겪고 살아나도 심장의 괴사한 부위는 계속 죽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지구에서도 한 번 심장 기능이 상한 환자는 장기적으로도 심부전 증상을 겪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의학의 한계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기적이었다.
아니, 의학뿐 아니었다.
어떤 힐도 저런 기적을 일으키진 못한다.
“과연 대단한…….”
“역시 성왕 전하이십니다.”
학회장의 힐러들은 감탄성을 뱉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각지에서 최고라 불리는 힐러들. 성왕이 방금 보인 시범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본 것이다.
“그러면 레이몬드 폐하께서는?”
“과연 성왕께서 보여주신 기적보다 더 뛰어난 치료를 보여주실 수 있을지?”
모두의 시선이 레이몬드에게 향했다.
레이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으으, 저것보다 대단한 치료를 보여줄 수는 없는데.’
레이몬드가 준비한 치료는 인공 장기였다.
레이몬드는 일전 인공 심장으로 패왕 노르기언을 살린 적 있다.
하지만 그건 기계로 만든 심장으로 완전한 인공 장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탑과 합동으로 생체 키메라 연구를 하여 인공 장기를 개발해 내는 데 성공했다.
현대 의술에서도 불가능했던 일을 마법의 힘을 빌려 해낸 것이다.
아직 외부에 밝히지 않은 업적으로 이번 기회에 공개하려고 했는데, 성왕의 치료보다 과연 임팩트가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인공 장기도 대단한 거지만, 성왕은 거창하게 인공 장기를 이식하지도 않고 힐만으로 죽은 장기를 살려냈으니까.’
레이몬드는 다른 더 임팩트 있는 치료가 있을지 고민하였다.
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 인공 장기를 선보이고 다른 항목 점수를 종합해 내가 이긴 거라고 우기자.’
치료 부분에서 다소 처져도 어차피 종합 평가를 하기로 했으니, 승리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레이몬드가 앞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폐하께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습니다.]“무엇입니까?”
[제가 지목한 환자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이 결투는 제 패배로 하겠습니다.]“……!”
레이몬드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환자입니까?”
[어떤 환자인지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적이었던 이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베풀 수 있는지요?]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익숙한 질문이었다.
‘그 벙어리 여인이 물었던?’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몬드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성왕이 면사 뒤로 미소를 짓는 게 보였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의 미소.
“혹시 어제?”
[네, 맞습니다.]성왕이 선선히 긍정했다.
어제 후원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여인이 성왕이었던 것이다!
[다시 묻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적이었던 이에게도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제 대답은 어제와 같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그런 걸 물어보는 겁니까?”
레이몬드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절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은 폐하밖에 없으니까요.]“……도움이라니?”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성왕은 적이다.
‘아니, 적이 맞나?’
적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성왕이 거듭 보이는 이상한 태도에 레이몬드는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성왕이 음성을 보내왔다.
[폐하께서 치료하실 환자를 말씀하겠습니다. 바로, 저입니다.]“……그게 무슨?”
[곧 알게 될 겁니다. 벌써…… 반응이…… 오는군요.]레이몬드의 눈이 커졌다.
성왕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왈칵.
성왕이 피를 토했다. 검게 죽은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