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88
#닥터 플레이어 88화
“대륙의 각 특산 약초들이나 연금술 시약들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랑함 후작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레이몬드는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환자들을 위해 약을 제조하는데, 중간에 폭리를 취하는 이가 많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가고 있고요.”
폭리를 취하는 이들.
페닌슐라 왕국의 상인들을 뜻한다.
휴스톤 왕국의 물류는 페닌슐라 왕국을 통하는 경우가 많았고, 약초나 연금술 시약은 대부분 페닌슐라 왕국을 통해 들어온다.
‘괜히 페닌슐라 왕국이 십자연맹제국 최대 무역국이 아니니까.’
레이몬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죽하면, 페닌슐라 왕국의 화폐인 ‘페나’를 십자연맹제국의 기축 화폐로 사용하겠는가?
어쨌든 그런 만큼 페닌슐라 왕국 상인들의 악독함은 대륙에서 유명했고, 약초를 구할 때도 산지 원가의 몇 배가 넘는 돈을 주어야 했다.
심할 때는 10배 넘게 폭리를 취할 때도 있다.
“음.”
랑함 후작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쉽지 않은 요구였던 것이다.
‘차라리 거액의 돈을 요구했으면 쉬웠을 텐데. 상인들의 폭리를 막아달라, 라.’
페닌슐라 왕국 거상들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애초에 대귀족이 상단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랑함 후작이라도 상인들이 이윤을 취하는 걸 막게 하는 건 곤란했다.
하지만.
“……역시 어렵겠지요? 하아, 오늘도 약초값을 대지 못해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많은데. 안타깝군요.”
수심에 찬 음성을 듣는 순간.
랑함 후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끄럽구나, 랑함아. 저 젊은이는 어떻게든 환자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너는 거상들의 눈치나 살필 생각이나 하다니.’
만약 레이몬드가 본인의 욕심을 위해 이런 부탁을 하는 거면 거절했을 거다.
하지만 레이몬드의 눈빛에는 환자를 위한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저런 이를 돕는 일이라면 이깟 늙은 몸의 권력.
한껏 불사를 수 있다.
“어떻게든 해보겠소.”
“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 보겠소. 그대에게 한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마진을 줄여줄 상인을 찾아보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대박! 설마 이런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다니!’
레이몬드는 속으로 외쳤다.
들어줄 거라고 확신 못 하고 한 부탁인데, 그의 환자를 위하는 모습(?)에 크게 감명받아 승낙한 것 같다.
‘흐흐. 약초값이랑 시약값이 얼마나 비싼데. 이렇게 되면 원가 절감 효과가 얼마야?’
“힘써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진심으로 기뻐 고개를 숙였고, 랑함은 그런 모습에 더욱 감탄했다.
‘약초값을 아껴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렇게나 기뻐하다니. 소문대로 정말 환자만 생각하는 이구나.’
설마 레이몬드가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저렇게 기뻐하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랑함 후작이었다.
랑함 후작은 흐뭇한 눈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훌륭한 젊은이를 봤더니, 기분이 좋았다.
‘페닌슐라 왕국에 저런 젊은이가 있다면, 크게 힘을 보태주었을 텐데.’
만마전(萬魔殿).
페닌슐라 왕국 정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런 끔찍한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페닌슐라 왕국은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이들로 가득했다.
그런 이들만 보다가, 레이몬드 같은 이를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듯했다.
“그러면 또 어떤 보상을 바라시오?”
“네?”
“방금 그것은 응당 내가 내야 하는 치료비. 또 다른 보답을 하고 싶구려.”
랑함 후작은 지그시 레이몬드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이 랑함을 살린 은인이니 말이오.”
꿀꺽.
이미 큰 보상을 약속했는데, 또 보상을 주려고 하다니.
부자 나라 대귀족의 걷잡을 수 없는 호구력에 레이몬드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세상에 이런 호구가 있다니. 또 뭘 바라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엔 권력이지!’
빠르게 계산을 끝낸, 레이몬드는 짐짓 쿨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보상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절 응원해 주십시오.”
“흠?”
“후작님의 응원. 그거면 이번 치료에 대한 대가로 충분합니다.”
응원!
다양한 의미가 함축된 단어였다.
‘귀족의 응원은 단순한 응원을 뜻하지 않지.’
정확히는 지지를 뜻한다.
치료사의 권력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나오니까.
랑함 후작 정도의 거물이 지지하면, 그의 위상은 단번에 훌쩍 상승하리라.
‘흐음.’
그런데 랑함 후작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한 거다.
랑함 후작은 큰 오해를 하였다.
‘응원이라니. 설마 앞으로 벌어질 왕권 다툼에서 자신을 지지해 달라는 뜻인 건가?’
사실 랑함 후작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직접 휴스톤 왕국에 온 이유가 있었다.
세 왕자의 평가를 위해!
‘휴스톤 왕국의 왕자들이 곧 피의 싸움을 벌일 건 명명 백배한 일. 우리 페닌슐라 왕가도 누구를 지지할지 결정해야 해.’
굉장히 중요한 선택이었다.
랑함 후작은 페닌슐라 왕국 국왕의 신뢰를 받는 대신(大臣).
직접 왕자들의 그릇을 눈으로 확인해 은밀히 누구를 지지할지 결정할 예정이었다.
‘3명의 왕자 모두 영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만.’
무식한 4왕자 세이틸은 말할 것도 없고.
3왕자 리머튼, 2왕자 카이른도 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나마 2왕자 카이른이 가장 나았지만, 흡족한 수준은 아니었다.
‘3명의 왕자 중 눈앞의 이 젊은이만 한 이가 없다니, 거참.’
마음만 같아서는 레이몬드를 지지하고 싶었다.
‘문제는 사생아라는 건데.’
랑함 후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본격적인 왕권 다툼이 시작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되는군. 분명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될 텐데.’
아직은 아니었다.
오만한 두 왕자는 천한 사생아 출신의 레이몬드를 적수로도 여기지 않고 있으니까.
하지만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날카로운 바늘이 주머니를 뚫고 살을 찌르는 것처럼, 레이몬드의 존재는 두 왕자를 계속 자극할 것이고 결국 둘은 레이몬드를 적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레이몬드의 끝은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도 권력의 힘 앞에는 무력할 뿐이니까.
결국,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젊은이에게 베팅하고 싶어지는지 모르겠군. 다른 왕자들보다 말이야.’
랑함 후작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훌륭한 성품에 대한 감탄?
아니다.
‘……그는 단순한 선인이 아니야. 마음속 깊숙이 큰 야망을 품고 있어.’
랑함 후작은 만마전이라고까지 불리는 페닌슐라 왕국 정계의 늙은 너구리다.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 데 능했다.
레이몬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야망이 느껴졌다.
‘아마 환자와 다른 사람을 위한 야망이겠지. 이타적인 야망이라니.’
랑함 후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일평생, 다른 이를 위한 야망을 품고 있는 이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너무 대단해 존경심이 들 지경이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한 가지만 묻겠소. 그대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오?”
레이몬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대륙 최고의 치료사가 되는 겁니다.”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이렇게 덧붙였다.
“환자들을 위해서입니다.”
“……환자들을 위해서 대륙 최고가 되겠다, 라.”
랑함 후작은 잠시 침묵하며 레이몬드의 답변을 곱씹었다.
그리고 무슨 결론을 내린 걸까?
지그시 웃었다.
“알겠소. 나 랑함은 그대를 앞으로 응원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레이몬드는 알까?
이 순간 랑함 후작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랑함과 페닌슐라 왕국의 국왕은 3명의 왕자 중 누구도 지지하지 않을 거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레이몬드가 자신의 야망-환자와 다른 이들을 위한 이타심으로 떨쳐 일어선다면.
그때는 그에게 힘을 보탤 것이다.
그게 랑함 후작의 결정이었다.
* * *
“저, 후작님.”
보좌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페닌 준남작은 정말 본국의 리슈테인 왕가와 연관이 없는 자인 겁니까?”
리슈테인 왕가.
그들 왕가의 가문명이었다.
페닌슐라 왕국의 정식 명칭은 ‘리슈테인 왕국’이었으니까.
“왜? 에메랄드 눈빛 때문에 그러나?”
“네, 보면 볼수록 리슈테인 왕가의 성안(聖眼)과 닮은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닐세.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는데, 페닌 준남작의 친모는 평범한 눈동자 색이었다는군. 그냥 우연히 나타난 색인 듯하네.”
랑함 후작은 피식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저런 에메랄드 눈동자를 가진 이가 한둘인가?”
“그것도 그렇지요.”
“리슈테인 왕가 혈족들에게 발현되는 다른 특징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랑함 후작은 단호히 결론 내렸다.
“아니라면, 아쉽군요.”
보좌관의 말에 랑함 후작은 동의했다.
“그러게 말이네. 아쉽군.”
랑함 후작도 진심으로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레이몬드가 마음에 들었다.
* * *
랑함 후작과 헤어진 레이몬드는 이번엔 국왕 오든과 재상 갈먼을 보러 갔다.
상을 받기 위해서다.
‘……이제 상 받는 것도 지겨운데.’
너무 자주 상 받는 것 같다.
어쨌든 안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이유로 왕가의 이름으로 훈장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그래도 포상금이 포함되어 그건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 소고기나 사 가자. 와인도. 아니, 샴페인으로 할까?’
주섬주섬 돌아가려는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나서 말했다.
“왕실 파티시에에게 주의를 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응?”
“‘태양의 눈물 주스’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레이몬드는 차분히 설명하였다.
“랑함 후작같이 콩팥병을 앓는 이에게 ‘태양의 눈물’ 주스처럼 고농축 과일 주스는 독이 될 수 있으니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랑함 후작의 지병은 콩팥병, 즉 만성 신부전이다.
‘대략 만성 신부전 4단계쯤 되었겠지. 5단계였으면 살아 있지 못할 테니.’
4단계.
콩팥 기능이 전부 소실되기 직전의 단계였다.
이런 4단계의 경우 아직 콩팥의 기능이 일부 남아 있어 자연적으로 고칼륨혈증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즉, 외부에서 칼륨이 과량유입되어 인위적으로 고칼륨혈증이 생긴 거다.
‘태양의 눈물 주스가 원인이었을 거야. 거의 칼륨 농축액 주스였으니까.’
그런데 장내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재상 갈먼이 날카롭게 말했다.
“왕실 파티시에가 랑함 후작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건가?”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레이몬드는 애먼 왕실 파티시에를 잡을까 봐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아닙니다. 일반인에게는 별달리 해가 되지 않는 주스니까요. 다만…….”
거기까지 대답한 레이몬드는 입을 다물었다.
혹시 랑함 후작의 지병을 노리고 일부러 그런 주스를 제작한 거면?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왕실 파티시에게 그런 레시피를 전달한 거면?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연회장에서 들으니 새롭게 얻은 레시피라고 하는데, 어떤 경로로 레시피를 얻었는지 확인해 보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