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11
10.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성민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액정을 보았다.
‘경훈 선배’
라는 문자가 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앞에 있던 인턴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이 환자 CT 찍으러 보내고 끝나면 호출해.”
인턴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성민은 그대로 돌아서며 전화를 받았다.
“예, 선배님.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고…….”
-오늘 몇 시에 퇴근 가능해?
“오늘요?”
-그래.
목소리가 어둡다. 성민은 문득 머릿속으로 몇 시간 전, 해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두 분 사이가 무지 이상했어요. 혹시 두 분이 사귀는 거, 아녜요? 진짜 딱 그 분위기던데.]새벽부터 경훈이 여자 숙직실로 들이닥쳐 해인을 반 강제로 쫓아내다시피 한 것도 이상한데 그 이유가 한지원과 단둘이 있기 위해서였다는 말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해인이 말로는…….”
-김해인, 입단속 좀 시켜.
“예, 그건 이미 시켰습니다. 아마 별말 하지 않을 겁니다. 근데 진짜 무슨 일이십니까?”
-술 풀 거다. 시간 되는지만 말해.
정말로 심상치 않다.
“됩니다. 몇 시에 뵐까요?”
-마치는 대로. 난 9시부터 껍데기 집에 있을 거야.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성민은 곧바로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4분. 조금 전에 보던 환자 처치하고 급한 일들을 처리하려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9시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성민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응급실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성민은 성급한 손길로 껍데기 집 문을 열었다. 탁한 연기가 자욱한 가게 안을 잠시 살피던 그의 눈길이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경훈을 발견하고 멈추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어? 왔어? 저기 있다.”
할머니가 성민에게 알은체를 하며 경훈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성민은 ‘예’ 하고 대꾸하고 곧장 주방 앞 테이블로 다가가 술잔 하나와 숟가락, 젓가락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경훈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헉, 벌써 한 병 다 마시셨어요?”
경훈이 성민의 놀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 뭔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이다.
“오다가 영규 선배한테 잡혀서 늦었습니다. 싫다는데도 한사코 술 마시자고 붙잡아서 떼놓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그 선배는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밖에서 술 못 마셔서 난리랍니까? 엊그제도 재민 선배하고 술 펐다고 하던데…….”
성민은 쯧쯧, 혀를 차며 수다를 풀어 놓으면서도 경훈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경훈이라면 이쯤에서 영규 선배를 두고 농담을 치고 들어올 만도 한데 오늘은 전혀 아니었다. 농담은커녕, 말 한 마디도 안 할 태세다.
“어, 어. 제가 따르겠습니다.”
경훈이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본 성민이 재빨리 병을 빼앗아 대신 따랐다. 그러자 경훈이 다시 술병을 건네받더니 성민의 잔을 채워 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서너 잔을 마셨다. 말없이 술만 마시던 성민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운을 뗐다.
“그거, 무슨 말입니까? 오늘 새벽, 여자 숙직실 습격 사건이요.”
무슨 대단한 사건이라도 되는 듯 제목까지 거창하게 지어 놓고 묻는 질문에 경훈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성민이다시 파고들었다.
“해인이 말로는 선배님이 다짜고짜 쳐들어오셔서 지원이를 방 안으로 몰아넣었다고 하던데요? 그러면서 해인인 나가라고 하고. 뭐, 그 말 다 믿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해인이가 뭐 하러 그런 거짓말을 지어서 하겠습니까?”
은근히 떠보며 진실이 뭐냐고 묻는 듯했다.
“해인이 입단속은?”
묻는 말에 답은 안 하고 질문으로 대신하는 경훈을 보며 성민이 대답했다.
“당분간은 조용할 겁니다. 물론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지는 장담 못하고요. 뭐, 어쨌든 확인되지 않은 사실 가지고 1년차가 윗년차들에 대해 소문내서 좋을 것 없다고 주의는 좀 줬습니다. 제가 어제 당직이라 새벽녘에 잠깐 눈 붙이러 숙직실 들어가다가 복도에서 해인일 만났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병원 내에 이상한 소문 날 뻔했습니다.”
“훗, 이상한 소문? 그래, 이상하긴 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경훈을 보며 성민이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설마, 정말로 지원이하고 무슨 일 있으세요? 그러니까, 단순한 선후배가 아니라 남녀 간의 뭐 그런…….”
“이성민.”
갑자기 경훈이 얼굴을 들고 성민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성민은 순간 긴장하며 대답했다.
“예.”
“네가 보기엔 나란 놈은 어떤 놈 같냐?”
“예?”
“여자 문제에 있어서 최경훈이라는 놈은 어떤 놈 같으냐고.”
처음엔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민은 이내 그 질문이 의미하는 바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혹시, 문희 선배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무거나.”
잠시 망설이던 성민은 그냥 대놓고 말하기로 했다. 문희 선배와 찢어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이름조차 입 밖으로 내놓기를 꺼려하는 건 ‘미련’이라는 단어와 직결이 된다. 그러니까 이젠 대놓고 씹어도 되고 뒷담화를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아무도 없는 것이다.
“제가 솔직히 문희 선배에 대해서는 선배님께 불만 많은 사람 중 1인이었습니다.”
경훈이 피식 웃는 것을 보며 성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선배님도 잘 아시겠지만요.”
선배, 후배 관계를 떠나서 강문희라는 여자는 못돼 처먹은 여자 중에서도 최강이었다. 그래서 경훈이 강문희를 용서하고 받아 줄 때마다 성민은 속이 터지는 줄 알았었다. 매번 경훈에게 꼭 강문희가 아니면 안 되겠냐고 압력을 가했고 나중에는 강문희라는 여자에게는 ‘선배’라는 호칭도 붙이기 싫어서 대놓고 피해 다녔었다.
그러니 경훈은 성민이 얼마나 강문희를 싫어했는지 잘 안다.
“선배님이 그런 쪽으로는 너무 벽창호 기질이 강합니다. 물론 문희 선배가 선배님의 첫사랑이라는 건 압니다.”
“첫사랑 아니야.”
“아닙니까?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미련을 떠셨습니까?”
경훈이 씁쓸하게 웃는다.
“넌 내가 미련 떤 것처럼 보였냐?”
“예. 그렇게 보였습니다. 선배님 군 제대하고 돌아오셨을 때 문희 선배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던 거 다 아셨잖습니까? 그런데 선배님 제대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무신 다시 바로 신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떻게 하셨어요? 전 그때 정말 놀랐습니다. 선배님이 문희 선배를 다시 받아들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그뿐입니까? 선배님이 외과 선택해 버리니까 그 과 메리트 없다고 결사반대하더니 그래도 선배가 고집 안 버리니까 어쨌어요? 그때도 망설임 없이 다른 남자한테 가버리고…… 그런데 나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선배님이 또 받아 주셨잖아요. 전 진짜, 그때 선배님 생각하면 답답해서 숨이 잘 안 쉬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이제야 묻는 건데 정말로, 그렇게 문희 선배가 좋았습니까? 다른 남자한테 몇 번이나 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받아들일 만큼 절절히 사랑했어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던 말이 나중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이 튈 정도로 흥분하며 끝났다. 성민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씩씩거렸다.
“글쎄…… 그게 사랑이었나?”
술을 연거푸 두 잔 마시던 경훈이 문득 중얼거렸다. 성민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경훈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그럼, 아니었습니까?”
“모르겠다. 그게 사랑이었는지는……. 처음엔 사랑이라고 생각했었지. 아마 처음 몇 년간은 사랑이었을 거야. 강문희라는 여자는 지독히 이기적인 여자였고 최경훈이라는 놈은 지독한 휴머니스트였지. 그러니까 우리 둘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똑같이 생각했어. 강문희는 나쁜 여자고 최경훈은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놈이다.”
성민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특히 ‘바보 같을 정도로’라는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그런데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
경훈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성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성민은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배신, 그거 먼저 한 사람은 나였다.”
“예에?”
성민이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렸다. 그러자 경훈이 쿡쿡, 웃는다.
“그러니까, 선배님한테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그 말씀……?”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성민은 차마 말끝을 제대로 맺을 수도 없었다. 그러자 경훈이 씨익 웃는다.
“글쎄, 꼭 다른 여자가 생겨야 배신인가?”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뭐가 배신인데요?”
“상대에게 더 이상 성실할 수 없는 것, 내 삶에서 2순위로 밀어내고 3순위로 밀어내더니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 문희한텐 그게 바로 배신이었을 거야.”
성민은 그 말뜻을 깊이 생각해 보다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선배가 먼저 문희 선배와 헤어지고 싶으셨군요.”
경훈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건 일종의 긍정의 의미였다.
“언제부터요? 군에 입대하기 전부터요?”
그래야 말이 맞는다. 강문희의 방황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영통지서 받고 헤어지자고 말했지.”
“동의하던가요?”
“아니.”
그럴 줄 알았다. 성민이 아는 강문희는 최경훈을 목숨같이 사랑하던 여자였다. 모두들 의아했었다. 최경훈이 먼저라면 모를까, 강문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아니, 적어도 그 둘을 지켜보는 3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었다. 강문희가 바람을 피우고 최경훈에게 상처 준 것처럼.
그런데 실상은 최경훈이 먼저 돌아선 거였다.
아마도 그랬던 걸 거다. 처음 시작부터 그랬던 것처럼 강문희는 최경훈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1년을 쫓아다니며 경훈을 연인으로 만든 강문희는 자신의 심장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남자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훈이 술잔에 든 술을 빙빙 돌리자 잔 속에서 투명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성민은 새롭게 안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내내 강문희에 대해서 욕만 해댔었다. 그런데 불쌍한 여자였다.
성민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어쩐지 경훈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문희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왜 그녀에게 그토록 아픈 존재가 되었는지, 자신의 어떤 태도가 그녀에게 미련을 주었는지, 끝났고 해놓고 그녀가 희망을 품을 어떤 행동을 했던 건 아닌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제대 후에 다시 돌아온 문희에게 끝났다고 분명히 말했더니 시간을 달라고 했었다. 그는 상관없었다. 아마 시간도 여유도 없었던 인턴 생활에만 전념하느라 문희라는 존재는 잊었었던 것 같다.
“좀 더 강하게 끝내 주지 그러셨어요.”
성민의 말에 경훈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난 문희를 친구처럼 생각했어. 그녀도 같은 생각인 줄 알았었고. 굳이 우리가 나서서 사람들에게 우리 관계는 연인이 아니라 친구로 바뀌었다고 떠들고 다닐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흘러갔지. 그런데 그게 내 착각이라는걸 알게 됐지.”
“문희 선배가 선배님 외과 선택할 때 난리 피웠었죠.”
성민의 말에 경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전 그때까지도 의심 안 했습니다. 문희 선배는 그때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선배님의 연인이었으니까요. 두 사람이 곧 결혼할 거라는 소문도 여기저기서 들리고… 어쨌든 그때 당시에 문희 선배가 선배님의 외과 선택을 결사반대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요.”
“실수였던 것 같다. 문희가 받아들이지 못해도 진즉 끝냈어야 했는데. 문희가 그렇게까지 미련을 품기 전에 단호하게 끝냈어야 했는데…….”
경훈이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툭 내뱉었다.
“내가 나쁜 놈이다.”
경훈이 씁쓸하게 웃는 것을 보던 성민이 빈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뭐, 다 지난 일인데 뭘 그러십니까? 문희 선배는 시집 잘 갔고 선배님은 이렇게 훌륭한 싱글로 돌아오셨고. 이게 바로 훈훈한 결말 아니겠습니까?”
성민의 말이 위로가 돼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가끔 걸어오는 전화의 발신자가 강문희라는 사실은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부담이 되어 버렸다. 문희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이 목 안의 가시처럼 남아 개운하지가 않았다. 거기다가…….
한지원…… 그 자식이 생각하는 최경훈은 절대로 강문희를 먼저 배신하지 않은 남자인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최경훈은 최강 휴머니스트에 절대적인 의리파라고.
“난 전혀 아니야.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인도적이지도 않고 개인적인 이익 앞에서는 의리도 버릴 수 있어. 한때나마 사랑했던 연인에게 한없이 잔인할수도 있고 같은 꿈을 키워 온 동기를 밟고 올라갈 준비도 돼 있는 놈이야.”
“그래서 저는 선배님이 좋습니다. 훨씬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욕심 없고 야망 없고 희생만 하는 사람이 어디 사람입니까?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는 광고 문구도 있지만 아니, 까놓고 말해서 사랑이 왜 안 변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쉽게 변하는 게 바로 사랑 아닙니까? 그걸 못 받아들이는 상대가 좀 힘들어서 그렇지,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경훈은 쿡쿡, 웃었다. 맞다. 성민의 말이 전부 옳다. 그런데 가슴이 허하다. 세상에서 가장 변하기 쉬운 것이 사랑이라는 말에 문희에게 느끼던 미안한 감정은 흐려지지만 지원의 말에 대해 부정했던 확신도 함께 흐려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 언젠가는 사라지는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때까지 저와 연애하실래요? 제가 선배님을 좋아하는 마음도, 선배님이 절 좋아하는 마음도 모두 지겨워지고 지루해질 때까지 연애만 하실 수 있으세요?]오늘 새벽,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강하게 부정했었다. 비록 말로는 내뱉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강력하게 부정했었다.
내 마음은 안 변한다고. 한지원, 너에 대한 내 마음은 영원할 거라고.
하지만…… 그게 정말일까?
경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문희에 대한 마음이 변했듯 지원에 대한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지원이 말하는 그 자유연애라는 거, 해도 되는 거 아닌가?
푹, 웃음이 났다. 한지원, 그 자식의 말에 흔들리고 그 자식을 포기하는 것보다 그 말에 따르고 싶은 욕망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나약함에 비웃음이 흘렀다.
성민은 너무 과하게 술을 마시는 경훈을 뜯어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폭주하는 경주마처럼 경훈은 멈추지를 않았다.
“어어, 선배님. 정신 좀 차리세요. 아파트, 어딥니까? 집을 가르쳐 주셔야 데려다 드리죠. 선배님.”
아무리 흔들어 깨워 물어도 경훈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성민은 할 수 없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놀라는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고 자기 방으로 간 성민은 경훈을 겨우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겨 주었다.
꼬이는 혀로 겨우 내뱉는 그 목소리가 음울했다. 무슨 뜻일까? 물을 먹였다는 말은? 무슨 물을 먹였다는 말일까?
성민은 여러 가지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아무리 짜 맞추어 보려고 해도 잘 맞춰지지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안 강문희와 최경훈의 숨은 진실에 놀라고 한지원이 최경훈을 물 먹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성민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일련의 사실들에 결국 머리를 흔들고 말았다.
“젠장,술 깨면 물어보는 게 낫겠다. 대답이나 해줄지 모겠지만.”
침대에 널브러져 자고 있는 경훈을 보며 성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말았다.
탁.
경훈은 소리 나지 않게 아파트 문을 닫으려고 조심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소리가 텅 빈 거실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어쩌지는 못했다. 혹시 지원이 깼을까 봐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하지만 안방 쪽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나지 않는다. 경훈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섰다.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술기운이 속을 긁어댔다. 머리가 아프고 발걸음도 흐트러졌다.
말 그대로 술을 들이부운 지 아직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성민의 방이었고 침대 옆 바닥에서 자고 있던 성민 몰래 집을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30분도 안 걸린 셈이다.
방으로 바로 가려던 경훈은 잠시 갈등하다가 결국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예민한 지원이 깰 수도 있지만 우선 목이 너무 말랐다. 물 한 잔이라도 마시면 어느 정도 정신은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방으로 간 경훈은 컵에 물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단숨에 들이켰다.
달칵.
컵을 싱크대에 올려놓으려던 경훈의 손길이 조심스럽게 들려오는 인기척에 흠칫 멈추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의 눈길이 열린 문틈에 서 있는 지원을 발견하고 가늘게 좁혀진다.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좋아하니까.]한지원이 나를 좋아한다.
그 사실에 행복감에 젖다가도 ‘자유연애, 할 수 있으세요?’라고 묻던 그녀의 표정이 떠오르면 침울해졌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연애. 그의 입장에서 그건 그저 말 그대로 단순한 ‘연애’일 뿐이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미래는 설계조차 할 수 없는,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관계.
유통기한이 있는 관계라는 설정은 최경훈에게 맞지 않다. 그건 그가 극복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술, 드셨어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지원의 질문을 무시하고 경훈은 컵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주방을 나와 거실로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자라.”
“선배…….”
문득 그녀가 다가선다. 경훈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꿀물 한 잔 타드릴게요. 마시고 주무세요.”
서둘러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가 보였다. 그 순간, 경훈은 이성을 놓았다. 아니, 술기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뻗어 나간 손이 그녀의 팔을 휘어잡았다.
“아!”
그녀가 휘청거리며 그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놀란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경훈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겁나?”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도 하지 않는 지원을 보며 경훈은 손을 올려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러면…… 더 겁나지 않아?”
“선배, 지금 취했어요.”
“그래, 취했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이번에는 매끈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하면 더 겁나지?”
엄지가 무섭게 앙다문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마…… 이러면 더 겁날 거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속삭이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경훈은 멈추지 않았다. 긴장된 숨결이 뒤섞였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따뜻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숨결은 심장처럼 냉기가 흐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경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 반응도 없이 굳어 버린 그녀에게 화라도 난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표정 없이 바라보는 하얀 얼굴이 얼어 있었다.
나쁜 자식, 피하지도 않는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연애, 그따위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굳건하다. 빌어먹을.
“가서 자.”
경훈은 지원을 놓아주고 홱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향해 곧장 움직였다. 한순간도 뒤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등 뒤에서 그녀가 비틀거리는 것도, 떨리는 숨을 내쉬는 것도 보지 못했다.
“이 상태로라면 경훈 쌤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는 거네?”
“그렇죠. 이번 담낭 절제술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이셨잖아요. 아마 지금쯤 미라클 팀원들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갔을 걸요?”
“어머, 그럼 원철 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요. 아직은 뭐라고 속단하긴 힘들죠. 아직 원철 쌤은 이식외과를 돌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원래 전통대로라면 처음 이식외과를 도는 후보가 팀원이 되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훈 쌤이 만들어낸 성과는 플러스에 플러스를 더한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몰라. 원철 쌤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잖아. 지금 당장은 숨죽이고 있어도 이식외과를 돌기 시작하면 또 무슨 성과를 만들어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지. 내가 볼 땐 두 사람 다 막상막하야. 아니, 어쩌면 인맥 관리 면에서는 원철 쌤이 더 나을 걸?”
“예에? 그건 아니죠. 경훈 쌤이 병원 내에서 얼마나 인식이 좋은데요. 간호사들도 그렇고 동료, 후배 할 것 없이 모두들 경훈 쌤 싫다는 사람 없어요.”
“그게 문제지. 동료, 후배 할 것 없이 다 좋아하면 뭐 해? 미라클 팀에 들 사람은 그 팀원들이 뽑는데. 경훈 쌤은 강 교수님 말고는 별로 지지하는 사람이 없잖아. 반면에 원철 쌤은 그 팀원들 다 구워삶았다잖아.”
“헉, 정말요?”
“그래, 소문이 그래. 그러니까 앞일은 누구도 예상 못하는 거야. 그나저나 염 교수님, 어제 아침 수술실에 또 술 냄새 풍기고 들어가시다가 과장님께 딱 걸렸다면서?”
“정말요? 그 교수님, 왜 그런대요? 세상에, 수술실에 술 냄새가 웬 말이에요? 과장님께 걸렸으면 이번엔 무슨 조치가 있겠다.”
“그럴 것 같아. 과장님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거든. 나중에 경훈 쌤이 진행했던 담낭 절제술 건도 전해 들으신 것 같아. 과장님 실에서 ‘정직’이라는 말까지 새어 나온 걸 보면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아.”
“정직이요?”
놀라는 후배 간호사에게 선배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직이면 다행인 거지. 잘하면 의사 가운 벗어야 될지도 모르는 걸.”
“가운씩이나요? 우와, 그 담낭 절제 수술 하나에 한 사람은 미라클 팀원이 되는 강력한 후보로 급부상하고 한 사람은 잘릴 위기가 되는 거예요? 정말 극과 극이다.”
간호사들이 수다를 떨며 복도 저쪽으로 멀어졌다. 구둣발 소리가 멀어지고 조용해지자 남자 화장실 안쪽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원철이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길이 맞은편에 있는 여자 화장실을 흘깃 바라보더니 다시 복도 쪽으로 멀어졌다.
요 근래, 여자들이나 남자들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모이는 곳곳마다 이슈가 되는 이야깃거리였다.
최경훈과 염승철 교수. 너무나 극과 극으로 벌어진 두 사람의 처지에 원철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최경훈, 이번엔 제법 홈런다운 홈런을 친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홈런 한 방에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커피? 녹차?”
“커피로 하겠습니다.”
경훈이 대답하자 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진한 커피를 따라 왔다. 경훈은 강 교수가 내미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교수가 잠시 커피 향을 음미하더니 경훈을 향해 씨익 웃었다.
“한 건, 했더구나.”
강 교수의 말에 경훈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그거, 염 교수가 못한 거냐? 네가 잘한 거냐?”
허를 찌르는 질문에 경훈의 얼굴에 머물렀던 미소가 단박에 사라졌다. 강 교수가 커피를 또 한 모금 들이켜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번 건은 평가점수에 안 넣는다. 이유는 네가 잘 알 거고.”
“예, 알겠습니다.”
경훈도 알고 있었다. 그 수술에서 염 교수가 제대로 긴장하고 정신을 차렸다면 4년차인 그는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집도하던 수술을 성공리에 마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잘했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칭찬을 해주신다. 강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경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적조차 일어나지 않으니까.”
경훈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지원의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차갑고 얼음 같은 녀석의 얼굴이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 냉기 속에서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 경훈은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 나오던 온기를 기억해냈다.
비록 술에 취해 있었지만 그 온기만은 뚜렷하게 기억했다.
겉으로 보이는 그 차가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속은 따듯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속에는 불처럼 뜨거운 기운을 품고 있으면서 그 불길을 감추려고 차가움으로 무장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마치, 얼음 속에 갇힌 불씨처럼 누군가 그 얼음만 깨어 주면 활활 타오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한지원, 그 녀석을 싸고 있는 얼음을 녹이기 위해 내가 어떤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치고 각자 밀린 차트 정리 좀 해라. 우리 조가 미비 차트율이 제일 높은 거, 알지?”
경훈의 말에 찔리는지 성민과 해인, 우석이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경훈이 성민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선배로서 모범을 좀 보이지?”
“예, 선배님. 앞으로 모범, 확실히 보이겠습니다.”
성민의 넉살에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경훈이 웃으며 지원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저 동조하는 미소일 뿐이다. 삭막한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봄이 오지 않았다.
경훈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며칠은 아파트에서 나올 결심을 했었다. 한지원이라는 여자는 잊고 독립해서 혼자 잘 극복해내리라 했었다.
그런데 다음 며칠간은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고 지원을 잊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한지원을 계속 보고 싶다는 거. 저 자식을 안 보고는 못 견딜 것 같다는 거. 그 이유 때문에 독립은 미뤘다.
그리고 이젠 저 자식을 어떻게 하면 내 마음속에서 지워낼까, 온통 그 궁리만 한다.
저 녀석의 어딘가에는 정 떨어질 만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온통 완벽투성이인 것처럼 보이고, 예쁘게만 보이고, 섹시하게만 보이는 저 자식의 어디 한구석은 정 떨어질 만큼 깨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한지원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앞으로도 찾을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될 정도로 한지원은 그의 심장에 확실히 박혀 버린 것 같았다.
“최 선생님.”
간호사 한 명이 경훈을 불렀다.
“네.”
경훈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간호사가 말했다.
“501호 보호자가 잠시 뵙자고 하는데요.”
“알았습니다.”
경훈이 성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잠깐 갔다가 올 테니까 오늘 일정 체크해.”
“예써!”
성민이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경훈이 의국을 나갔다.
“오늘 당직 누구야?”
성민이 묻자 1년차 둘이 냉큼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성민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니들은 왜 손 들어? 여기서 니들 100일 당직 서는 거, 모르는 사람 있냐?”
그러자 두 사람이 박자라도 맞추는 듯 또 냉큼 내린다.
“접니다.”
때를 맞추어서 지원이 말했다. 그러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늘 안개가 심하다니까 긴장 좀 해야겠다. TA(교통사고) 환자 발생하기 딱 좋은 날씨잖아.”
안 그래도 날씨가 궂어서 ER(응급실)에서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네.”
지원이 성민의 말에 대꾸하자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인턴들과 1년차들이 나가자 성민이 엄살을 떨기 시작했다.
“아, 난 오늘 당직 아닌데도 집에 못 간다. 밀린 차트 정리하려면 날밤 까게 생겼다.”
“그렇게 많이 밀리셨어요?”
성민의 엄살을 그냥 무시하기도 그래서 지원은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어, 말도 마라. 죽겠다, 죽겠어. 이런 거 좀 안 하면 안 되나? 과학이 얼마나 발전을 했는데 말이야, 차트 정리해 주는 로봇은 안 나오나?”
지원은 피식 웃었다.
“의사들이 할 일, 로봇이 다 하면 우린 뭐 하라고요?”
“응? 그런가? 하하. 말이 또 그렇게 되네. 하긴, 차트 채우면서 배우는 것도 많아. 그지?”
그녀가 웃으며 대꾸하지 않자 성민이 문득 물었다.
“너하고 경훈 선배, 요즘 이상하다. 너희 두 사람, 뭐 있냐?”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자 성민이 다시 묻는다.
“지금 네 표정, 내가 제대로 짚었다는 증거야?”
지원은 눈길을 돌려 성민을 마주 보았다.
“아뇨. 저희 두 사람, 아무것도 없는데요.”
성민이 피식, 웃었다.
“네가 생각해도 별로 신빙성 없는 거 알지? 아무것도 없다면서 목소리는 왜 떨어? 자식아.”
그러더니 의국 방을 나서며 슬쩍 돌아보고 말한다.
“경훈 선배, 애 먹이지 마라. 선배도 알고 보면 무지 외로운 사람이다.”
탁.
성민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지원은 혼자가 되었다.
무지 외로운 사람? 경훈 선배가?
지원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흘다.
외로움이라는 단어, 최경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라면 몰라도.
“어, 선배님. 보호자 면담 끝나셨어요?”
“그래.”
경훈을 복도에서 마주친 성민은 웃으며 다가섰다.
“어디 가십니까? 의국에 가세요?”
“그래, 인마. 너, 왜 그렇게 웃어?”
의미심장하게 웃는 성민을 보며 경훈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자 성민이 속삭였다.
“지원이, 오늘 당직이랍니다.”
“알아. 근데?”
경훈이 되묻자 성민이 더 음흉한 미소를 흘리며 말한다.
“우와,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후배 스케줄까지 줄줄…….”
“내가 그래도 4년찬데 밑의 놈들 당직 스케줄도 모를까 봐?”
“아하, 그러셨구나. 그냥 같은 조의 후배니까 당직인 줄 아셨구나.”
어쩐지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훈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 자식이 근데…….”
“얼른 가보십시오. 혼자 있습니다.”
성민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훈이 툭 내쏘았다.
“무슨 소리야?”
“지원이요, 지원이 지금 혼자 의국에 있다고요.”
그러더니 경훈이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쌩하니 가버린다.
저 능구렁이 같은 자식이 뭔가 눈치를 챈 거다. 남녀 관계에 감도는 이상기류에 대해서는 기가 막히게 냄새를 잘 맡는 놈이었다. 별명이 달리 ‘개코’가 아닌 것이다.
경훈은 멀어지는 성민을 쳐다보며 고개를 젓다가 의국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의국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혼자네?”
지원은 의국으로 들어서는 원철을 바라보았다.
“오늘 당직이지?”
“네.”
“나도 오늘 밤새야 될 것 같다. 방금 수술한 환자 상태가 영 안 좋아서 밤새 지켜보려고.”
“네에.”
지원은 원철의 말에 대충 장단만 맞춰 주고 고개를 돌려 다시 차트 정리에 몰두했다. 하지만 원철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뭐, 먹으러 잠깐 내려갈까?”
속으로 한숨을 내쉰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생각 없습니다.”
“그럼, 나 먹는데 옆에 앉아 있어 줘.”
지원은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거절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일까? 그토록 분명하게, 그토록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건만 이 사람은 그녀의 의사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처음엔 미안하고 자신을 좋아해 주는 마음에 고맙기까지 했지만 이젠 화가 났다. 당사자의 의사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자신의 고집만 내세우는 그에게 정말 화가 났다.
이기적인 사람.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남에게 피해를 주든 말든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만 아는 사람이었다.
지원은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마주 보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전에도 제가 말했지만 이런 식의 관심은 정말 불쾌…….”
갑자기 지원이 말을 멈추었다. 성큼, 코앞까지 다가온 원철이 갑자기 두렵게 느껴졌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원은 인상을 쓰며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원철이 쿡, 하고 웃는다.
“스킨십.”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원철이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턱 걸쳤다. 지원은 그런 원철의 손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거 치우세요.”
그러자 원철이 순순히 손을 내려놓았다.
“너 진짜 싫은가 보다. 정말 싫어하는 게 느껴져.”
지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싫어할 줄 알면서 이러시는 건 저, 기분 나쁘라고 그러시는 건가요?”
“아니, 내 진심 전하고 싶어 그러는 거다. 네가 내 진심을 너무 왜곡하는 것 같아서…….”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원철과 지원, 두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문을 향했다. 순간, 지원은 얼어 버렸다. 문 안으로 들어오려다 멈춘 경훈을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원철로부터 떨어졌다. 그 모습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지은 죄도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하는 걸로 보였을 것이다.
“왔냐?”
원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인사를 건넸지만 경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원철을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지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웠다. 지원은 그가 오해하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조금 전의 상황이 보는 관점에 따라 오해를 부를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더욱 그랬다.
경훈은 아무 말 없이 의국 안으로 들어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전원을 넣더니 문득 그녀를 부른다.
“한지원.”
“……네.”
지원은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인 후 대답했다.
“컨퍼런스 자료 준비 다 됐으면 좀 보자.”
“네…….”
그녀는 원철을 지나쳐 자료를 정리해 둔 파일을 찾아 경훈에게로 갔다. 그러자 원철이 지원을 향해 말했다.
“아, 너 이번 주에 컨퍼런스 발표 있구나. 바쁘겠다. 그럼 난 나가 볼 테니까 수고해. 혹시 야식 생각나면 콜해. 언제든 난 오케이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원철이 나가자 의국 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지원은 자신이 내민 파일을 읽고 있는 경훈의 옆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마치 벌이라도 서는 것처럼.
“왜 서 있어? 앉아.”
고개도 들지 않고 그가 말한다. 지원은 바로 옆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뇌사 기증자와 환자 부인의 간 일부씩을 이어붙인 생체 간이식을 사례로 들었군.”
“네, 자료를 찾아보다가 2년 전에 그런 방법으로 수술한 경우가 있어서요.”
“생체 간과 뇌사자 간을 가지고 2대 1의 생체 간이식이라…… 잘 골랐네.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아서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네…….”
지원은 계속해서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눈치라도 챘는지 갑자기 눈길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원은 긴장한 채 그를 마주 보았다.
“너, 왜 긴장해?”
“…….”
“긴장할 이유,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런데 왜 긴장해? 원철이 때문이야? 나 때문이야?”
지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김 선생님과의 사이를 선배님이 오해할까 봐 긴장했어요.”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경훈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또 문득 내뱉는다.
“다행이네. 혹시 네가 원하는 그 자유연애라는 것이 여러 남자를 동시에 사귀는 식이라면 어쩌나, 했거든.”
지원은 그가 말하는 의도를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결정 못 내리겠다. 할 수 있다면 널 좋아하는 마음을 지우고 싶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이해합니다.”
너무나 이성적인 대답에 경훈은 짜증이 났다.
“넌 내가 못하겠다고 대답해도 아무 상관도 없나 보지?”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대답을 강요한다면 또 거짓말을 해야 한다. 나중에는 진실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거짓말일 테니까.
‘선배가 그렇게 결정한다면 나도 잊을게요. 잊을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은 절대 실행 못할 것 같은 대답. 8년 동안 못했던 걸 이제 와서 당장에 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 뻔한데도 그녀는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묵묵히 앉아 있는 지원을 잠시 바라보던 그가 파일을 넘겨주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는 일어서는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등을 보이고 의국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원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그가 갑자기 그녀를 돌아본 것은 그때였다.
“너, 김원철한테 거절 안 한 거냐?”
지원의 눈이 커졌다. 김원철 선생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물어보는 것이다.
“어떻게……?”
“본인 입으로, 거절했어? 안 했어?”
못마땅한 눈빛이 그녀를 쏘아보았다. 원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상황을 설명하라는 것이다. 지원은 순순히 대답했다.
“김 선생님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훈의 미간이 모아졌다.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네 제안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면 그 자식부터 처리해야겠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화가 나 있었다. 지원은 그 화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김원철 선생과 그녀, 모두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간다. 수고해.”
“네.”
그가 나갔다. 지원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했더니 제대로 숨도 못 쉬었었다. 제법 잘 견뎌냈다. 어젯밤,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던 숨결을 느낀 후로 그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긴장되고 떨려서 숨조차 잘 쉴 수가 없었다.
정말로 병이 든 것 같다.
지원은 아직도 심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 병은 시간이 흘러도 치료가 되기는커녕 더 깊고 넓게 퍼진다. 도저히 손을 써볼 수 없을 만큼.
“에이, 진짜! 짜증나게! 난 괜찮다고! 안 아프다는데 왜들 지랄이야!”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ER(응급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쪽에서 응급환자들을 돌보고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시선이 모두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환자에게 모아졌다.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폼이 제법 찢어진 것 같았다.
지원은 방금 발이 아프다고 절뚝거리며 들어온 환자를 살펴보고 있다가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술 취한 환자가 피를 흘리며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데 그 옆에서 해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동동거리고 있었다.
지원의 눈길이 주변을 훑었다. 남자 의사들은 전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다. 조금 전, 제법 상태가 심각한 TA(교통사고) 환자 둘이 들어왔었는데 모두들 그쪽 수술실로 몰려간 모양이었다.
지원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해인과 술 취한 환자에게로 향했다. 해인이 환자를 잘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예쁘고 애교만 많지, 아직은 의사로서의 자질은 못 갖춘 그녀다.
지원은 걱정이 되었지만 눈앞의 환자 치료가 먼저라는 생각에 우선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려 환자의 발을 다시 살펴보다가 물었다.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환자가 울상을 지은 채 대답했다.
“엊그제부터요. 친구들이랑 학교 앞 잔디밭에서 신발 벗고 놀다가 집에 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발이 퉁퉁 부어서 신발도 못 신을 정도였어요.”
“열은 안 났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환자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났어요. 오한에 열이 40도까지 올라서 해열제까지 먹였어요. 열은 떨어졌는데 계속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벌레 물렸나 싶어서 약만 바르고 있었는데…… 뭐, 잘못된 건 아니겠죠? 선생님.”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세요. 좀 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단순한 봉와직염 같아요.”
“봉와직염이요?”
“네, 흔한 피부염의 일종이에요. 박테리아가 피부 상처를 통해 침입해 들어가서 염증을 일으키는 거죠. 이렇게 피부가 빨갛게 붓고 열과 동통이 따르는 증상이거든요.”
“아, 네. 그럼, 어떻게 하면……?”
보호자의 질문에 지원이 대답했다.
“혹시 모르니까 엑스레이 찍어서 뼈 이상은 없는지 확인하고 이상이 없으면 항생제 정맥주사와 파상풍 주사 맞고 1주일 치 항생제만으로도 치료가 될 겁니다.”
“아유, 그렇군요. 전 또 무슨 큰 병이라도…….”
와장창!
별일이 아니라는 말에 그제야 안심하던 보호자도 환자도, 지원의 눈길과 함께 동시에 소리가 울린 곳으로 향했다.
짝!
지원이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해인의 손바닥이 아까 소리를 지르던 술 취한 환자의 뺨을 갈랐다. 그리고 해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응급실에 쩌렁 울려 퍼졌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지원은 옆에 서 있던 응급실 인턴에게 급하게 지시했다.
“이 환자분, 엑스레이 실로 모셔 가서 사진 찍어.”
“예, 알겠습니다.”
지원은 황급히 몸을 돌려 해인에게로 뛰어갔다.
“이 기집애가 미쳤나! 감히 누굴 쳐!”
남자의 손길이 해인의 뺨을 향해 공기를 갈랐다. 지원은 재빨리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다른 쪽에서 달려온 인턴 하나가 오돌오돌 떨 며 지원의 옆에 섰다. 그것만으로도 지원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여긴 병원입니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뭐야! 이것들이 진짜 확!”
남자가 갑자기 미친 듯 성질을 내더니 옆에 있던 의자를 집어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악!”
“엄마야!”
주변으로 모여들었던 간호사들과 인턴, 레지던트들까지 전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가서 경비 불러!”
지원은 그 소리에 또 안심이 되었다. 곧 경비가 올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만 이 미친개를 상대하면 된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어, 그래! 이년들! 이년들이 아주 세트로 날 치려고? 아까 저년이 날 먼저 쳤잖아! 여기 병원 아니야?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를 쳐? 야! 이 씨발년아! 너 이리 와! 당장 이리 와!”
남자가 해인을 지목하며 다가서자 겁을 잔뜩 먹은 해인이 지원의 등 뒤로 숨었다. 그러면서도 입은 살았는지 남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아저씨가 내 엉덩이 만졌잖아요!”
지원이 놀라서 해인을 돌아보았다. 해인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얼마나 겁을 집어먹었는지 얼굴은 하얗게 핏기 하나 없었고 세게 깨문 입술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럴 때 바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표현을 쓰나 보다.
지원은 겁에 질려 떨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해인을 보자 화가 치밀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병원 간호사나 여자 의사를 성희롱 대상자로 보는 미친 개새끼들이. 예전에 어떤 열여덟 살 남자 아이가 19금 동영상을 봤는데 거기서 간호사와 여의사가 환자들한테 각종 서비스를 다 해준다며 떠드는 걸 보고 기함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또 그걸 자랑스럽게 농담이랍시고 해대는 남자 아이를 보며 기가 막혀서 웃음도 안 났었던 기억도 난다.
“야! 이년아! 네가 엉덩이를 살랑거리면서 내 눈앞에서 얼쩡거렸잖아! 애교 살살 부리고 눈웃음 살살 치면서 간들거린 게 누군데!”
지원은 이를 악물었다. 해인의 성격이 밝고 애교가 많은 건 인정한다. 덕분에 그녀는 병동의 천사 의사라고 불렸다. 환자들에게 늘 친절하고 명랑하게 대해서 어떤 환자들은 그녀를 ‘엔돌핀’이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의 성격이 이렇게 화근이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하면 엉덩이 만져도 된다고 누가 그래요?”
지원이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지원을 노려보았다.
“뭐? 이년아. 어, 그래. 이것들이 다 한 패다, 이거지? 그래, 해보자. 근데 난 맞고는 못 산다! 저년이 내 얼굴을 쳤으니까 나도 저년 얼굴 한 대 치기 전에는 절대 못 참아!”
지원은 더 이상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주변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경비 아직 안 불렀어요! 경찰도 불러요!”
“이년이 근데!”
순간 지원은 머리카락이 죄다 뽑히는 격렬한 아픔을 느꼈다.
“선생님!”
“미쳤어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남자를 말리려고 팔을 붙잡고 등을 마구 때렸다. 해인도 놀라서 지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술 취한 남자는 해인을 바닥으로 밀쳐 버리고 다른 사람들의 손길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그래, 이년아! 이년 이거, 사람 되게 기분 나쁘게 하는 년이네! 어디서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사람을 무시해! 경찰? 그래, 불러! 경찰 오기 전에 너부터 뒈지는 거야! 이년아!”
남자가 지원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한 바퀴 휙 돌았다. 지원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이 났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남자의 손을 움켜잡은 채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술에 취했어도 반사 신경은 건재한 건지 남자가 재빨리 피해 버린다.
지원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남자의 벌건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미친 새끼.”
악에 받친 욕설이 새어 나오자마자 남자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갈랐다. 고개가 홱 꺾이며 불길이 일었다. 지원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강한 놈한테는 찍소리도 못할 놈이 약한 여자한테 힘자랑하는 비겁한 새끼.”
다시 불길이 일었다.
“선생님!”
바닥에 엎어졌던 해인이 울며불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그만하세요. 제발 놔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어허헝.”
지원은 화가 났다. 너무나 화가 났다. 해인이 사과를 하는 것이 더 화가 났다.
의사가 봉이야? 간호사가 봉이야? 왜 술 처먹고 병원에 와서 행패야? 지들 아픈 데 치료해 주려고 밤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일하는 우리가 봉이냐고!
아니다.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사람의 눈빛이 그 남자를 생각나게 했다. 어머니를 따라 새로운 가족이 된 사람들을 만나러 갔던 날, 얼마나 설레고 얼마나 기대했었는지. 동생도 생기도 오빠도 생기고…… 하지만 그녀의 꿈은 물거품이었다.
그녀를 쳐다보던 그 남자. 귀찮은 혹 하나가 생겼다고 대놓고 싫어하고 경멸하던 그 남자의 눈빛이 생각나서 지원은 너무나 화가 났다.
그 집 아이들이 말썽을 일으켜도 늘 자상하게 껄껄 웃던 그 남자는 지원이 뭔가 실수 하나를 하면 뺨을 치며 ‘데려온 자식이 이렇지. 너 때문에 내가 동네에서 욕먹어!’라고 소리쳤다.
절대로 지지 않았다. 뺨을 맞고 아무리 경멸스러운 눈길을 받아도 절대로 지지 않았다. 꼿꼿하게 얼굴을 들고 눈을 똑바로 뜬 채 절대 불쌍한 업둥이 흉내는 내지 않았다. 지금처럼.
지원이 더욱더 사납게 노려보자 남자가 주춤한다. 그 살기 어린 눈빛에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때를 놓치지 고 지원은 발을 힘껏 내질렀다.
“악!”
이번에는 명중이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반격은 더 컸다. 남자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지원의 얼굴로 날아오는 순간 그녀는 보았다, 해인이 남자의 머리를 쟁반으로 내려치는 것을.
Rrrrrr. Rrrrrr. Rrrrrrr.
자동차에 시동을 걸던 경훈은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성민.
이 자식이 또 무슨 일로?
경훈은 전화기에 대고 입을 열었다.
“왜?”
-선배님, 지금 어디십니까?
녀석의 목소리가 좀 가라앉아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가려고. 누나 내외가 버스 타고 올라왔다가 공항에서 바로 비행기 탈 예정이거든.그 틈에 잠깐 만나서 얼굴이나…….”
-지금 병원으로 좀 오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야?”
경훈은 인상을 썼다. 오늘 날씨가 궂어서 응급실 긴장한다더니 그새 TA(교통사고) 환자라도 대량 발생한 건가, 싶었다. 몇 시간 전부터 안개도 많이 걷혀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ER(응급실)에서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피웠는데 우리 애들이 좀 다쳤습니다.
순간 경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우리 애들, 누구?”
-해인이하고…… 지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