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34
다음날 아침부터 기수와 탁지연은 훈련에 참여했다.
오전엔 다른 배들과 줄 맞춰 저어가는 훈련, 오후엔 땅에 상륙해서 대형을 갖춰 전후진하는 훈련을 했다. 수상전과 육상전이 결합된 전쟁을 준비하는 분위기였다.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서 육대기가 전부 명령을 내렸지만, 딱 하루 참관한 후에 눈썰미 좋은 탁지연이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지휘를 하기 시작했다.
기수도 그녀 덕분에 군대의 진형과 운용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금방 배우시는군요. 형님.”
“하핫! 내가 원래 좀 천재거든. 원래 무공에 고수이다 보니까 집단 대 집단으로 싸우는 것에 별로 신경을 안 썼지만, 기본 원리는 알고 있었어.”
“원리를 어떻게 배우셨어요?”
“어릴 때 배우게 되었지. 아주 오래전에…”
“전쟁에 참여하셨었나요? 아니면 병법 공부를 하셨나요?”
“매일 서너 시간씩 훈련을 했지. 드라군을 어떻게 펼쳐놔야 하는지, 부상당한 인원은 언제 빼줘야 하는지, 업그레이드가 왜 중요한지…. 그런 것들 말야.”
탁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드라군, 업그레이드, 그게 뭔가요?”
“그런 게 있어. 어쨌거나 진형이라는 게 우리 편의 공격력은 적에게 최대한 많이 닿게 하고, 적의 공격은 우리의 일부분만으로 받는 게 목적이잖아?”
“맞아요. 그게 골자죠.”
기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질럿 보내고, 드라군 펼치고, 거기에 싸이오닉 스톰까지 날리던 그 고전 게임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중원 무림엔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아! 요즘엔 다들 무슨 게임을 할까?’
떠나온 지 벌써 2년 정도 되었으니까 그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았다.
하루 두 번의 훈련을 마치고 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이었다.
배마다 맡은 목이 있는데, 거기서 빈둥거리다가 누가 걸리면 털어먹고, 아니면 낚싯대 드리우고 술 마시며 빈둥빈둥 놀아도 상관없었다.
기수는 육대기를 붙잡고 수로맹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는 수로맹주를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것들을 아는 대로 얘기해주었다.
기수가 수집한 정보들을 분석한 결과 수로맹은 진짜 조직이 잘 되어 있었다.
관군이 36채 중 하나를 전멸시킨다 해도 단지 그 수채만 부서질 뿐이고, 관군이 물러간 뒤엔 금방 재건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그 길고 긴 장강 전체에 관군을 동시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특히 배를 타고 자유롭게 이동하기 때문에 녹림 72채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기수는 관군이 아니지만 수로맹주를 찾으려 한다는 입장은 같았다.
‘이들 속에 스며들어서 다가가는 수밖에 없겠네. 힘으로 부수면서 찾아 들어가려고 했다가는 큰일 날 뻔 했어.’
수로맹주가 피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평생 쫓아가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빨리 수로맹주를 잡아 죽여야만 집으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다시 마우스를 잡고 싶어서 오른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기수는 함께 훈련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부하들과 차츰 친해졌다.
육대기도 처음엔 인상이 좋지 않았지만 일단 기수를 선장으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엔 자기 할 일 다 하면서 깍듯이 예의도 지켜서 마음에 들었다.
수적이라면 도적놈. 현대로 치면 조폭인데, 이놈들이 밖에서 보기엔 험악하고 나쁜 짓 많이 하는 사회의 세균들이지만, 그 안에 속해서 보면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일단 이놈들은 머리가 나빴다. 그만큼 단순했다. 한 마디로 단순무식.
그래서 성격이 잔인하고 더럽기는 하더라도 솔직했다.
착한 척 위선 떠는 것보다 아예 대놓고 나쁜 놈이 사람을 덜 피곤하게 했다.
그리고 기수와 탁지연은 선장과 부선장이다 보니, 술이 많이 취한 상태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고 잘 보이려고 다들 애썼다.
알고 보면 배에 탄 수적들은 27채 패거리 중에서 말썽 피우거나 사고를 쳐서 쫓겨 온 자들이 많았다. 육대기가 그나마 그들을 잘 다독거려서 한 팀으로 만들어놨는데 밖에서 선장을 영입해서 떡하니 앉혀놓는 바람에 약간 겉도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순응하고 기수를 선장대접 해주려고 애썼다.
그런 그들과 계속 좁은 배안에서 지내다 보니 친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배 위에서 지낸지 열흘째 되는 날.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육지로 쌀을 사러 간 부하 두 명이 오지 않아서 다른 부하들을 보냈는데, 먼저 간 자들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보고를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간 기수는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모르는 자들이었다면 ‘아! 사회악이 둘 제거되었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겠지만 그들은 함께 웃고 떠들고 술마시던 자기 부하들이었다.
“이게 누구 짓이지?”
“백리세가 놈들이 틀림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육대기가 시신의 상처를 들춰 보이며 말했다.
“백리세가 놈들은 우리 형제들을 죽이고 나서 꼭 이렇게 검으로 십자를 그려 놓습니다. 자기네가 한 일을 자랑하고, 우리한테 경고하는 겁니다.”
“백리세가라….”
기수는 강대원이 자기들을 고용한 목적이 바로 백리세가와의 싸움 때문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났다.
수적들을 죽이기 위해 애쓰는 걸 보면 그들은 명문정파가 분명했다.
명문정파 편에 서서 수적을 토벌하는 게 당연한 상황.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수는 지금 수적 편이었다.
기수가 육대기에게 물었다.
“백리세가에 대해서 아는 대로 얘기해 봐.”
“예. 그놈들은 저기 보이는 저 산부터, 저쪽 산까지 해당하는 땅을 전부 소유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고 거느린 무사도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최근엔 장강의 뱃길에까지 간섭을 하려고 합니다.”
“장강은 우리 수로맹의 것이잖아?”
우리 수로맹이란 말이 저절로 나왔다.
“맞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가업을 확장시키려다 보니까 우리한테 내는 통행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탁지연이 옆에서 물었다.
“저 산에서 저쪽 산까지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땅인데, 백리세가가 어떻게 저런 넓은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지?”
육대기가 대답했다.
“부자들이 늘 쓰는 수법이죠. 흉년에 돈 꿔주고 비싼 이자 복리로 붙여서 뜯어먹다가 못 견디게 되면 땅을 빼앗는 수법입니다. 처음엔 싼 이자로 빌려주는 지주들이 많이 있었지만, 백리세가가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하면서 결국 이 일대는 전부 그들이 독점하여 이자율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수는 혼자 중얼거렸다.
“뭐야? 씨발…. 명문정파라고 해봤자 결국 악덕지주잖아?”
생각해보면 무림맹에서 만난 문파들 모두 땅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농민들의 노력을 착취해먹는 건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앤캐쉬보다 나쁜 새끼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봉건사회가 다 그런 거지만, 어쨌거나 백리세가의 나쁜 점을 발견했으니까 그걸 계속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탁지연이 육대기에게 다시 물었다.
“백리세가가 아무리 힘이 강해도 그렇지. 우리 27채를 무너뜨린다고 해서 장강을 전부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무리를 하는 거지?”
“그들은 장강 전체를 장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수채와 28채만 제압하면 십절금왕문의 지주분타와 직접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대드는 겁니다.”
기수는 백리세가와 수로맹이 서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류 유통망의 확보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수로맹은 그게 밥줄인데 백리세가에게 빼앗길 수 없을 것이었다. 채주 강대원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 감이 잡혔다. 오죽하면 뜨내기인 자신과 탁지연을 초식 한 번 겨뤄본 후 곧바로 채용했겠는가.
육대기는 두 부하의 시신을 수습해서 간단하게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채주에게 보낼 보고서를 썼다.
기수는 그것을 자신이 직접 가지고 가서 강대원을 만났다.
“흐음…. 골치 아프군. 또 당했다니….”
강대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이미 수없이 있었던 일이라 면역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선원을 보충해주도록 하겠네.”
“채주님. 그보다 저희들을 당분간 훈련에서 빼주십시오.”
“훈련을 빼달라고? 무엇을 하려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수하들을 이끌고 가서 백리세가 놈들 4명을 죽이고 오겠습니다.”
강대원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4명? 왜 4명인가?”
“우리 수로맹의 형제를 죽이면 2배로 복수해준다는 사실을 백리세가 놈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강대원이 웃었다. 기수의 말이 마음에 든 것이다.
“내가 아우 같은 영웅을 왜 이제서야 만났는지 모르겠군. 하하하!”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허락하다마다! 그런데 부하들만 가지고 되겠는가? 병력을 좀 더 줄까?”
“아닙니다. 우리 배의 형제들만으로 해낼 수 있습니다.”
“좋아! 바로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이야!”
강대원은 기수의 뒷조사 시킨 걸 후회했다. 이 정도로 용기가 있고, 또 수로맹을 위하는 마음가짐을 가졌다면 관군의 끄나풀일 리가 없는 것이다.
허락을 받고 배로 돌아온 기수는 모두 함께 복수하러 갈 것이라고 육대기와 부하들에게 얘기했다.
“좋습니다! 선장님.”
“형제들도 편히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러나 탁지연은 신중했다.
“우리의 장점인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백리세가의 영역으로 섣불리 들어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기수도 거기엔 동감이었다. 자기 혼자 가면 쉽게 성공할 수 있겠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었다. 형제의 원한을 함께 힘 모아 갚아야 하는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육대기가 의견을 내놓았다.
“장사꾼으로 변장해서 들어가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 안에 적과 싸우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변장을 하기로 하지. 하루면 충분할 테니까.”
육대기는 선원들 중에서 제일 칼도 잘 다루고 몸놀림도 빠른 3명을 뽑았다.
다음날 아침.
기수와 탁지연, 그리고 육대기와 부하 3명은 표사 차림을 하고 등에 짐까지 진 후 한적한 포구에서 내려 백리세가를 향해 걸었다.
육대기는 해가 진 저녁시간에 가자고 했지만 탁지연은 그러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일부러 아침 시간을 택했다.
목표는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걸은 지 1시간도 안 되어 백리세가 제자들이 길가에 세워둔 천막이 보였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수로맹의 공격에 대비하고,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 일종의 검문소였다.
6명의 일행이 지나가려고 하자 진청색 무복을 입은 백리세가 무사 두 명이 길을 막고 거만한 태도로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고, 어디로 가는 길이냐?”
탁지연이 대답했다.
“우리는 남경에서 온 장사꾼이오. 그런데 당신들은 관군도 아닌데 왜 길을 막고 우리 목적지를 묻는 것이오?”
“햐! 요놈 봐라. 생긴 건 꼭 도적놈 같이 생겨가지고 감히 따져? 너 지금이 이곳이 어디인지 알기나 해?”
“관도 아니오? 나라에서 만든…”
“흥! 이곳은 천하제일 백리세가의 땅이다. 여기 발을 디딘 사람은 모두 우리 명령에 따라야 하는 거란 말이다!”
소란스러워지자 천막 안에 있던 다른 무사들도 밖으로 나왔다.
“뭐야? 누가 물정 모르고 대들어?”
“이것들이 죽으려고 환장했나?”
다들 한 마디씩 하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기수는 그들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명문정파의 탈을 썼지만, 너희나 수적이나 하는 게 똑같구나.’
기수 일행을 둘러싼 백리세가 무사는 모두 10명. 숫적으로 6:10이면 불리한 싸움이지만 기수가 있는 이상 숫자는 무의미했다.
“너희들 10명이 전부 다냐?”
기수가 묻자 백리세가 무사 중 하나가 험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놈. 태도가 꽤 건방진데? 얼굴은 더 마음에 안 들고…”
“내가 이렇게 생긴 데 보태준 거 있냐?”
“뭐, 뭐라고?”
“이 새끼가 귀까지 먹었나?”
기수는 곧바로 몸을 날려 놈의 눈에 주먹을 한 방 먹였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다른 무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탁지연과 육대기도 마찬가지로 감춰두었던 무기를 뽑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쓸 기회는 없었다. 기수가 민첩한 스텝으로 돌아다니며 나머지 9명에게 전부 주먹 한 방씩을 먹여 쓰러트린 것이다.
쉽게 제압하려면 혈도를 향해 잔백지를 날리는 게 최선이지만 기수는 그렇게 하기 싫었다. 주먹으로 패는 게 직성이 풀리고 기분도 좋았다.
육대기와 부하들은 기수의 실력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백리세가 무사 10명이 쓰러지자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선장님. 최곱니다!”
“이제 보니 대단한 고수이셨군요!”
육대기는 백리세가 무사들의 무기를 전부 빼앗았다. 그리고 기수가 자기 대신 선장으로 임명된 게 다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수는 쓰러진 놈들을 발길로 차면서 돌아다녔다.
백리세가 무사들은 일어나서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계속 정강이와 무릎을 걷어차여서 바닥을 뒹굴기만 할 뿐 두 발로 설 수가 없었다.
기수뿐만 아니라 다른 5명의 일행도 밟고 차기에 동참했다.
분이 풀릴 때까지 밟고 나니까 백리세가 무사 10명은 다들 멍이 들고, 혹이 생기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기수가 그들에게 명령했다.
“무릎 꿇어! 새끼들아.”
그들은 그 명령에 따랐다.
치욕적인 일이지만 밟혀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야! 너희들 중 누가 서열이 제일 높냐?”
9명이 한 명을 쳐다봤다. 기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물었다.
“서열 2위는 누구지?”
다시 9명이 한 명을 쳐다봤다.
그렇게 서열 4위까지 파악한 후 기수가 육대기에게서 칼을 받아들며 말했다.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수로맹에서 왔다. 너희들이 우리 형제 2명을 죽였기 때문에 우리는 너희들 4명을 죽이러 왔다.”
그리고는 즉시 칼을 휘둘러 서열 1위부터 4위까지의 목을 베어버렸다.
피가 튀고 머리 4개가 흙바닥에 굴렀다. 기수는 자신이 끔찍한 짓을 너무 쉽게 저지르고도 마음에 전혀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이젠 중원무림에 완전히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기수는 벌벌 떨고 있는 나머지 6명에게 말했다.
“너희들 가주에게 가서 전해라! 앞으로 우리 수로맹을 건드리면 정확하게 2배로 갚아주겠다고. 알았느냐?”
“예. 아, 알겠습니다.”
기수는 그들의 수혈을 짚어서 한두 시간 정도 잠들게 했다.
빠져 나갈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