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57
육대기는 의심과 불안감 속에 첫날을 보냈고, 그 이후 매일 한 번씩 채주의 선실에 불려 들어갔다.
그러나 진짜 내공만 전수될 뿐 아무런 일도 없이 ‘이제 됐어. 그만 나가 봐.’가 반복되자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아! 채주님과 강달에 사랑엔 내가 끼어들 틈이 없구나.’
물론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기수는 육대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내공을 전수해주었는데,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효율이 상당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잔뜩 부어 줘 봤자 육대기의 단전엔 얼마 남지 않았다.
역시 내공이란 자기가 스스로 운기조식을 해서 만드는 게 진짜였다.
그나마 육대기의 도법에 매일 진전이 보이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수로맹주의 답신이 도착했다.
군사를 보내줄 테니 잘 영접하라는 내용이었다.
기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드디어 보트피플 생활 청산이다.’
기수는 이번 싸움의 승패가 탁지연을 떼어놓는데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날 찾지 마.”
기수의 말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혼자 산속으로 들어가서 연공할 거야. 군사가 도착하면 이 배의 돛대 위에 높이 붉은색 깃발을 달아. 그러면 돌아올게.”
“연공은 여기나 창고에 가서 하셔도 되잖아요?”
“진짜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럼요. 안 될 이유가 뭐겠어요?”
바로 너지. 기수는 그녀의 유혹을 이기고 밤에 혼자 쪽배에 올랐다.
그러자 육대기가 따라 나와 물었다.
“채주님. 가시면 언제 오십니까? 제 연공은요?”
이젠 선실에 둘만 있어도 두렵지 않은 육대기였다.
“야! 연공은 혼자 하는 거야. 남의 덕 볼 생각 그만해.”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수였다.
은근히 긴장이 되어서 시험 전날 벼락치기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쪽배를 자기 배와 떨어트린 후 노를 저었다.
강 남쪽으로 가면 탁지연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강 북쪽으로 접안했다.
그곳은 백리세가의 땅이지만 기수의 무공이라면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높은 산 정상 근처까지 올라가 적당히 비와 이슬을 피할만한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은 기수는 그대로 동이 틀 때까지 스트레이트로 운기조식을 했다.
한 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아침이 되니까 스스로가 대견했다.
‘와! 내 집중력이 이 정도였나.’
단전 가득 뭉친 기운도 빵빵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수는 연습 삼아 큰 나무 하나를 골라 수도로 후려쳤다.
손이 닿기도 전에 나무 기둥이 예리하게 갈라지는가 싶더니, 손이 완전히 지나가는 동안 실제 나무와는 접촉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체인소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줄기가 베어졌다.
파천강기가 그의 손 30cm 앞에 무시무시한 칼날을 달아준 것이다.
잘린 나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기울어졌다.
기수는 열 손가락을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파천강기를 잔백지에 실어 연달아 발사하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팍!……
기수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탄성을 토했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뻗어나가는 파천강기는 나무를 통째로 공중분해 하고 있었다.
마치 분 당 6000발씩 나가는 20mm 개틀링건을 쏜 것처럼 허공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나무 부서지는 소리들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부우우욱~!’하고 전화번호부 찢는 소리처럼 들렸다.
기수가 손을 멈추자 톱밥이 되어 버린 나뭇조각들이 눈처럼 떨어져 내렸다.
기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오! 신이시여 이게 정녕 내가 한 일입니까?’
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적이 100명, 200명씩 덤벼들어도 한 번 쏘면 단번에 전멸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력 소모는 좀 심했다.
‘고거 한 번 쐈다고 갑자기 배가 고프네.’
기수는 머리와 어깨에 잔뜩 떨어진 나무 쪼가리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싸온 건량과 함께 먹을 물을 뜨기 위해 골짜기로 내려갔다.
걷는 중에도 기분이 좋아서 계속 콧노래가 나왔다.
‘잔백지와 파천강기를 합친 무공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손가락 발칸포라고 할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멀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50m쯤 떨어진 곳에 토끼가 있었다.
기수는 즉시 검지로 파천강기를 날려보았다.
그 정도 먼 거리에서도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퍽! 소리와 함께 토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 내 아침 반찬!”
거리가 멀어지니까 강기가 한 점에 집중되지 않고 약간 퍼지는 것 같았다.
토끼에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니라 전체가 떡이 되어버린 게 그 증거였다.
기수는 사라져버린 동물성 단백질에 입맛을 다시다가 검지를 입 가까이로 가져와서 훅! 하고 한 번 불어준 후 빙글빙글 돌려서 허리에 꽂았다.
그때 그의 귓바퀴가 움직였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기수는 한 번의 도약으로 나무 위로 올라가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백리세가의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주변 순찰 중에 기수처럼 물을 마시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들은 물을 마시고, 호리병에 냇물을 담기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일이 청성과 아미 제자들 돌아가는 날인가?”
“그렇다는군.”
기수로선 금시초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냐? 놈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삼황맹과 녹림72채가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정황을 포착했다고 하더라고.”
“혹시 속임수로 떠나는 척만 하는 건 아닐까?”
“그건 아닐 거야. 더 이상 우리 백리세가에는 미련이 없을 거라고 봐.”
“어째서?”
“기수가 나타났잖아. 그가 여기 있는 한은 두 번 다시 공격해오지 않을 거야.”
“하하! 그것 참….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도망가다니. 믿을 수 없군. 그러고 보면 겁이 굉장히 많은 놈들이네.”
“겁날 만도 하지. 기수가 우리 편이 아닌 적이라고 생각해 봐. 끔찍하지 않아?”
“하긴 그렇기도 하구만.”
기수는 나무 위에서 속으로 웃었다.
‘지금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됐단다. 후후후…..’
세수를 마친 세 번째 무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청성과 아미뿐만 아니라 다른 문파들도 다들 짐을 싸는 건 문제 아닐까?”
“어쩔 수 없어. 가주님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그들을 잡아놓고 싶으시겠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그렇긴 하겠네. 도대체 몇 명이나 도와주러 왔던 거야?”
“2000명쯤 되지 않았을까? 하루에 먹는 쌀만 해도 엄청나다고 들었어.”
“허! 그것 참…. 천하의 백리세가가 쌀 떨어질까봐 원군을 돌려보내다니…”
무사들은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그러나 남의 문파 구원하러 와주는 사람들한테 ‘각자 먹을 것은 싸가지고 오세요!’ 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전쟁기간 내내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을 물론, 돌아갈 때는 섭섭하지 않게 돈도 챙겨줘야 할 것이었다.
결국, 전쟁은 경제력이 관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에 백리세가에 온 원군은 너무 많았다.
기수는 북서쪽으로 이동한다는 삼황맹과 녹림72채를 생각했다.
‘그놈들은 인원이 더 많은데 뭘 먹고 견디지?’
그건 자기가 걱정할 일이 아니긴 했다.
백리세가 무사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런데 양오는 어딜 간 걸까?”
“그러게 말야. 이번 전쟁에 엄청난 공을 세웠는데….”
“그 얘기 들었어? 기수가 양오를 형님이라고 불렀대.”
“와! 기수 같은 고수를 동생으로 두면 기분이 어떨까?”
“천하가 다 자기 것 같겠지.”
기수는 미소 지었다.
‘내가 나하고 형제지간이 되어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냐?’
무사들을 한참 더 잡담을 하다가 호리병에 물을 채운 후 돌아갔다.
기수는 아미파가 귀환한다는 말에 송란이나 한 번 더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외식도 해야 하는데….’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결전에 대비한 무공연마를 하겠다고 탁지연을 뿌리치고 왔는데 송란에게 한눈을 팔 수는 없었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으니까 일단은 싸움에 이기고, 여자는 그 다음에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었다.
기수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밥도 먹지 않고 물만 조금씩 마시면서 집중적으로 운기조식을 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강에 떠있는 자신의 배에 붉은 깃발이 걸리는 게 보였다.
기수는 즉시 귀환해서 육대기에게 물었다.
“군사는?”
“저녁 때 도착하실 겁니다. 미리 옷도 갈아입으시고 환영 연회 준비도 하셔야 할 것 같아서 깃발을 미리 올렸습니다.”
“잘했어.”
서산에 해가 걸릴 즈음, 쾌속선 한 척이 도착했다.
기수는 26채, 28채 채주들과 함께 군사를 영접했다.
수로맹 군사 유청기.
그는 30대 중반으로 훤칠한 키에 날렵한 얼굴 골격, 선병질적인 인상을 지닌 귀공자(기수가 보기엔 기생오래비) 타입의 사내였다.
화려한 비단 장삼자락을 휘날리며 기수의 배로 건너온 그는 세 채주의 인사를 받고도 고개만 살짝 까딱였을 뿐 말이 없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기수가 인사하자 그제서야 한 마디 했다.
“정말 누추하군.”
“하핫! 솔직하시군요.”
기수는 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올라오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빙고! 이번엔 제대로 만났구나!’
유청기는 기수가 빤히 쳐다보자 더욱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27채 채주가 누구요?”
“예. 접니다!”
“나를 귀찮게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오?”
그의 태도에 막붕비와 갈태독은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꼈다.
그들 두 사람은 수로맹 내에서도 경륜과 명성이 높은 최고참급이었다.
아무리 자기가 군사라고 해도 그렇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른을 봤으면 기본 예의라는 걸 지킬 줄 알아야 하는 법인데 첫 대면부터 인사도 건성으로 받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는데다 27채 채주만 상대하려고 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장자의 체면도 있고, 또 수로맹주가 새 군사들을 몹시 아낀다는 사실을 알기에 차마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기수는 그런 그들의 기색을 읽고 속으로 생각했다.
‘후후…. 걱정마시오. 내가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거니까.’
그러나 그 전에 확인할 게 있었다.
“군사님 중 다른 한 분은 어디 계십니까?”
“진아는 오지 않았소. 이런 촌구석에 무슨 큰일이 있다고 둘 다 오겠소? 나를 부른 이유나 말해보시오.”
기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일타쌍피의 찬스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2:1로는 자칫 위험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제가 군사님을 청한 이유는 서찰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백리세가가 있는 한 우리 26, 27, 28채에 대한 위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웠으면 하기에 군사님을 모신 것입니다.”
“3채의 병력만으로는 저들을 대적하기 어렵소.”
“하지만 희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막붕비와 갈태독까지 함께 권하자 유청기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술이 한 바퀴 돌자 유청기가 물었다.
“희소식이란 게 무엇이오?”
얼굴에 ‘맹주가 시켜서 억지로 여기 오긴 했지만, 오래 머물기 싫으니까 빨리 얘기해라.’고 적혀있는 것 같은 표정과 말투였다.
막붕비와 갈태독은 다시 불쾌감을 느꼈고, 기수도 이번 상대는 죽여도 가책이나 미안한 마음이 눈꼽만큼도 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백리세가에 모였던 정파 무림인들이 전부 다 떠나는 중이라고 합니다.”
유청기가 비로소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오?”
“예. 청성과 아미는 이미 철수했습니다. 그건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호오! 직접 저들 진영에 침입해서 확인했단 말이오?”
“물론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부하들에게 맡길 수 없지요.”
“하하! 잘 하셨소.”
유청기의 태도가 변한 게 확연히 드러났다.
백리세가의 지원군이 전부 빠져나간다면 3채의 병력과 자신의 능력으로 손쉽게 큰 공을 세울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뭔가가 떠올랐는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눈치 빠른 막붕비가 물었다,
“무엇을 걱정하시오? 군사.”
“아! 예. 듣자하니 백리세가엔 기수라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삼황맹이 떠나는 게 바로 그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워서요.”
말투도 살짝 존대로 바뀌고 있었다.
기수는 상대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하긴….동료가 둘씩이나 죽었으니 나에 대해 조사 들어갔겠지. 하지만 말야. 난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야. 지금도 바로 네 앞에 있는 걸 전혀 모르고 있잖아. 후후…“
왠지 모르게 유청기와의 대결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기수가 말했다.
“기수란 자는 삼황맹과 원한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삼황맹이 이동했다면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그럼 확인하러 가시지요.”
“예? 적진으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면 고수들은 그 기감 같은 걸로 고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서 기수가 있는지도 확인하고, 적의 현재상황도 정찰하고 옵시다. 군사님하고 저하고 둘이서….”
유청기가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소. 때맞춰 날도 어두워졌으니 당장 갑시다!”
기수는 씩 웃었다.
상대가 죽음의 초대인 줄 모르고 응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