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48
기수는 자신의 방에서 차분하게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적근왕과의 대결을 되짚어보면서 뭐가 문제였는지 복기하기 위함이었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본 결과, 역시 문제는 심리상태였다.
황궁 비고에서 공주에게 내공의 깊이 차이보다 이기겠다는 의지, 싸울 당시의 진기 운용 방법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고 조언을 했었는데, 사실 그 조언은 바로 자기에게도 해당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경험치가 아직은 좀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지광과 같은 편이었으니까 전기 충격에 대비한 것까지는 옳았어. 그 다음이 문제였던 거야. 다음에 또 강적과 대결하게 된다면 상대의 약점과 내 이점을 최대한 빨리 찾아낸 후 잠시의 여유도 주지 말고 거기에 집중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고 대결을 되짚어 보니까 다음에 적근왕을 다시 만나면 초장부터 박살 낼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정리를 마친 기수는 ‘내공이 깊어졌다고 자만하면 안 돼!’라고 계속 되뇌어서 스스로에게 반복 주입시켰다.
그렇게 운기조식을 하는 중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궁주님. 들어가도 되요?”
탁지연의 목소리였다.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듯 아주 작게 말했지만 기수의 수행을 중단시키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수는 기식을 되돌린 후 대답했다.
“응. 들어와. 무슨 일이야?”
문이 열리고 탁지연뿐만 아니라 다섯 사매도 함께 들어왔다.
“붕대를 갈아드리러 왔어요.”
“아직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땀을 흘렸으면 바로 가는 게 좋죠.”
그러더니 능숙하게 기수의 하의를 모두 벗겼다.
나머지 다섯 사매들이 주변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기수는 그녀들의 눈빛을 보고 뭔가 수상한 것을 느꼈다.
‘얘들 왜 이러지? 이 눈빛은….’
여인이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눈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수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었다. 더구나 사매들이라면 더 더욱 확신이 있었다.
기수의 불길한 예상은 들어맞았다.
붕대를 다 푼 탁지연이 새 붕대 감을 생각을 않고 자꾸만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뭐 해? 붕대 안 감아?”
“이 정도면 다 아문 거 아닌가 싶어서요.”
기수는 가슴이 철렁했다.
탁지연의 눈빛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본 것 같았다.
‘피 때문이구나!’
어제 객청에서 호중만을 처형하는 광경은 예전에 그녀가 복수를 완수했을 때의 상황을 연상시킬 만큼 피가 낭자했다.
‘큰일인데….’
그동안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기 위해 참아야 한다고 사매들 사이의 여론을 주도하던 탁지연이 이제 해도 돼 쪽으로 마음을 바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사매들까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어제와 다른 눈빛을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오래 참은 건 기수도 인정했다.
본인도 수도승이라도 된 것처럼 긴 시간을 참은 자신이 대견했다.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제 와서 그걸 깨기는 싫었다.
며칠만 더 참으면 되는데 괜히 건드려서 상처가 덧나면 안 되는 것이다.
“다 나으려면 며칠 더 있어야 돼. 어서 붕대 감아.”
“아, 알았어요.”
탁지연은 대답했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수는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남이 죽는 걸 보면 자손을 남겨야 한다는 본능이 더 강해지는 걸까?’
어쩌면 그런 심리가 잠재해 있는 것도 같았다.
늘 죽음을 보는 무림의 여인들이 여염집 아녀자들에 비해 성에 대해 개방적인 것도 그런 원인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기수에겐 존슨의 100% 회복이 더 중요했다.
“붕대 줘. 내가 묶을게.”
“자, 잠깐만요. 소독 좀 하고요.”
“그래. 어서 해 줘.”
그때 황당하게도 탁지연에 혀를 댔다.
“윽! 뭐, 뭐 하는 거야?”
“깨끗하게 소독하려고요.”
“왜 물수건 놔두고!”
기수는 탁지연뿐만 아니라 다른 다섯 사매들도 기꺼이 소독 대열에 동참하려는 것을 감지했다. 그리고 위기감을 느꼈다.
‘절대로 안 돼! 1시간도 안 돼서 찢어져버릴 거야.’
굶주린 사매들에게 넘어가는 순간 아물던 상처는 다시 터질 게 분명했다.
그녀들이 오죽 심하게 다루겠는가.
기수는 여섯 마리 굶주린 암호랑이들로부터 자신의 존슨을 보호해야 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을 느꼈다.
‘도망쳐야 한다!’
본능이 그렇게 명령했다. 일단 스위치가 켜진 이상 자기처럼 의지로 욕망을 이겨내기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궁주님! 큰일났습니다.”
사매 6명이 동시에 날카롭게 외쳤다.
“무슨 일이냐!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그게…. 강시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기수는 잽싸게 탁지연의 손을 치우고 속옷과 바지를 끌어올렸다.
“아, 아직 붕대도 안 감았는데….”
“이젠 바람 좀 쐬는 것도 괜찮을 거야.”
그리고는 앞장서서 전망대로 올라갔다.
사매들은 다들 입술이 댓자나 나온 상태로 기수를 따라왔다.
그러나 막상 아래를 내려다보자 달아올랐던 기분이 싸늘하게 식고 말았다.
여기저기 숲이 들썩이는 모습, 강시들이 기어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추가된 강시의 수가 640마리라는 말을 기수로부터 들었을 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예전보다 상당히 높은 지역까지 놈들이 모습을 보이자 불안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춘매가 말했다.
“당장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네.”
그녀는 검을 뽑아들었다.
기수가 손을 내저었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 내가 가서 처리할게.”
“적이 저렇게 많은데?”
“전에 얘기했잖아. 놈들은 잘 부서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체액이 몸에 튀기라도 하면 화상을 입을 거야. 너희들이 접근전의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어. 내가 할게.”
사매들은 기수의 말에 따랐다.
기수는 일단 산채를 한 바퀴 빙 돌면서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역시 숫자의 위력은 대단해서 위협적으로 보이는 놈만도 20여 마리를 헤아릴 수 있었고, 그 수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총 공격이란 말이지? 좋아. 너희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게 해주마.’
기수는 일단 유성추만 챙겨들고 겉에 두툼한 장포를 걸친 후 산채 밖으로 나갔다.
그가 첫 번째 강시에 접근하자 놈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기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유성추를 직구(포심) 그립으로 잡은 후 정확하게 이마를 향해 던졌다. 뻑! 소리와 함께 강시의 머리와 상체가 한꺼번에 뒤로 젖혀졌고 놈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기수는 공중에 뿌려지는 녹색 액체를 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자빠졌던 강시는 비틀거리며 금세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두개골이 유성추 모양으로 함몰된 상태였다.
기수는 씩 웃었다.
“그래. 네놈들에겐 파천강기도 아깝다.”
기수는 유성추의 줄을 잡고 빙빙 돌리다가 제대로 헤드샷을 날려서 놈의 머리를 없애버렸다. 강시의 움직임은 방향을 잃고 눈에 띄게 무력화되었다.
‘좋았어! 이딴 놈들에게 파천강기를 쓰는 건 낭비야.’
유성추는 검보다 먼 사정거리가 장점이었다.
추에 묻은 액체 때문에 피칭 스타일로 쓰기는 껄끄럽지만 줄을 돌리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안전거리를 확보하면서 놈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기수는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강시들에겐 기도라는 게 없지만, 대신 기척을 숨기며 몰래 다니지도 않아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쫓아가며 놈들을 찾을 수 있었다.
숲 속을 뒤지며 시체들과 싸운다는 게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혈매궁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둘!”
기수는 자기가 처리한 강시의 수를 세기로 했다.
그래야 640 중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성추 덕분에 진기 소모는 많지 않았다. 두 번, 많아야 세 번만 명중시키면 한 놈씩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찾아다니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2시간 정도 꼬박 산채 주변을 돌며 센 숫자가 50을 겨우 넘었다.
기수는 잠시 산채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유성추도 바꿔 들고 내려왔다.
추가 산에 부식되어서 언제 줄이 끊어질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수색에서 기수는 훨씬 아래까지 범위를 넓혔고, 해가 질 때까지 몰두한 결과 카운트를 무려 130까지 끌어올렸다.
그가 귀환하자 사매들이 몰려왔다.
“궁주님. 수고하셨어요.”
“힘들고 피곤하시죠?”
기수는 뿌듯했다. 사실 혼자서 해낸 일치고는 대단하기는 했다.
“후훗! 강시들이 까불어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 이제 4일만 더 오늘처럼 하면 놈들은 영원히 끝이야.”
130곱하기 5는 650이니까 이제 4일 남은 것이다.
기수는 혹시라도 사매들이 붕대 갈면서 못한 일에 미련을 가질까봐 선수를 쳤다.
“강시를 전부 없앤 다음에 기념식을 하자! 어때? 좋지?”
“다 없앤…. 다음이라고요?”
“응. 나 지금 진기소모를 엄청나게 했기 때문에 내일 해 뜰 때까지 운기조식에 집중해야 하거든. 만약 소홀히 했다가는 놈들에게 산 채로 뜯어먹힐 거야. 하하!”
기수는 웃으면서 사매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들 탁지연을 보고 있었다.
탁지연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그래요. 저 마물들을 없애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사소한 부분도 소홀히 해선 안 되겠죠. 나흘이면 상처도 확실히 아물 테고….”
그녀답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사매들은 아쉬움의 한숨을, 기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수는 왕사동을 불러 산채 대장장이에게 유성추를 20개 정도 만들어두라고 지시했다. 오늘 써서 형태가 뭉그러진 2개는 녹여서 보태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존슨의 상태를 확인했다. 일단 멍 자국은 거의 다 사라졌고 상처도 아물어서 딱지를 떼고 싶은 마음 참기가 힘들었다.
‘이젠 괜찮은 거 아닐까? 아냐…. 지금 상태로는 괜찮지만 속에 피가 빵빵하게 찬 채로 여섯 명한테 시달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사매들의 열정과 욕구를 이해하지만 정말 소중한 물건이니까 며칠 더 참더라도 만전을 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잡념을 거두고 운기조식에 몰두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일어나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기수는 유성추를 4개나 챙겨 들고 산채 담을 넘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따라가자 금방 강시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머리가 없었다.
“이건 어제 부순 놈이군.”
머리가 없는 놈들은 촉각만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속도도 느리고,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기수는 다른 목표를 찾아 이동했다.
그런데 부스럭 거리는 놈들 전부가 어제 자기가 부순 것들이었다.
“왜 이러지? 오늘은 공격이 없는 건가?”
기수는 산채로 올라가 밧줄을 잔뜩 가지고 내려와 로데오 놀이를 했다.
로프에 고리를 만들어 카우보이처럼 강시를 묶는 놀이였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밧줄을 걸면 촉각뿐인 놈들은 막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일단 묶인 뒤에는 애벌레처럼 꿈틀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기수는 부하들을 불러 그 일을 시켰다.
그들은 처음에 두려움에 떨었지만 막상 해보니 귀머거리 장님을 묶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녹색 점액만 조심하면 되었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산채 주변에 어슬렁거리던 마물들이 전부 묶여 공터에 쌓였다.
기수는 산을 내려가면서 새로운 강시를 찾았지만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오늘은 쉬는 날인 모양이군.”
적의 움직임이 없으니까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래서 기수는 무극환혼진의 경계를 넘어 적의 진영까지 내려갔다.
‘이런 젠장! 또 배열을 바꾸었군.’
기수는 디뎠던 자리를 다시 디디며 돌아 나와서 근처의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적 진영을 살펴보았다.
숲 곳곳에 깃발들이 펄럭이고 군데군데 북을 치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뭔가 허전했다.
‘이상하네. 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지?’
교주와 적근왕이라면 몰라도 자신과 내공 차이가 현격한 다른 자들의 기도는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감지되지 않았다.
‘설마… 이놈들….’
기수는 횡으로 한참 돌아서 다시 진입을 시도해 보았다.
‘어라? 여기는 예전 배열이네.’
기수는 적진으로 빠르게 들어갔고 군막들이 서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깃발과 군막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없었다.
기수는 군막마다 들어가 안을 살펴보았다.
각종 장비와 도구들은 물론 식량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일월신교 교도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뒤지다가 겨우 한 명을 발견했는데, 그는 홀로 남아 북을 치고 있었다.
기수가 나타나자 깜짝 놀란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수는 경공으로 따라잡아 단번에 제압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너희 교도들은 전부 다 어디 갔느냐?”
“모두 떠났습니다.”
“떠났다고? 어디로?”
“저, 저는 모릅니다. 제비를 잘못 뽑아서 혼자 남아 북치는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기수는 믿을 수 없었다.
“전부 다 퇴각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어젯밤 무거운 것들은 전부 버리고 인시까지 은밀하게 산 아래 집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 많던 일월신교 교도들이 너 한 명만 남겨놓고 다 도망쳤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저는 평소에 혈매궁의 의기와 공덕에 깊은 감명을 받고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기수는 그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다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믿어지지 않았다.
‘아끼는 아들을 잃고, 또 여기 와서 장남까지 잃었는데 퇴각을 했다고?’
기수는 혹시 모르는 일이라 주변을 더 수색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