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386
01389 1389화
그렇게 걸어가던 중 김혁권이 태수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현미 빼 준 거 말입니다. 험한 꼴 보지 않게 해 줘서 고맙다고요.”
“우리는 한 팀이잖습니까.”
“그렇죠. 이럴 때는 캡틴이 참 든든하다니까. 어떤 아무개 닥터는 그 순간에도 고집 부리더만.”
김혁권의 말을 가만히 듣던 태수가 아차 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김은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태수는 바로 송현미 간호사에게 물었다.
“송 간호사님, 김 선생 어디로 보내셨습니까?”
“병원장실 대기실 소파로 가라고 했어요. 거기는 지금 아무도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곧 따라 올라가겠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다.”
태수가 기분을 억지로 끌어 올려 웃어 보이자 송현미 간호사도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의료진들과 헤어진 태수는 병원장실로 직행했다.
신속대응센터 뒤쪽에 위치해 있기에 곧 병원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는 칠흑같이 꺼먼 어둠으로 가득한 모습에 멈칫했다.
이내 손을 더듬어 형광등부터 밝혔다.
빛이 비추며 내부 모습이 드러난 순간 태수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었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앉는 긴 의자에 흔적이 보였다.
시선을 집중하니 김은영이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그 상황을 떠올리면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려고 찾아온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작아진 모습은 그럴 때가 아니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게 했다.
조용히 문을 닫은 태수가 김은영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흑흑.”
김은영이 흐느끼는 소리에 태수는 또 한 번 놀랐다.
지금까지 어떤 일에도 씩씩한 모습만 보이던 김은영이었기에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태수는 김은영이 끌려 나가던 모습이 오버랩됐다. 그리고 그녀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군병원에서 인터뷰할 때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다.’ 이런 눈빛이었어.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든 살리겠다.’,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리고 싶다.’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때는 김은영이 자신의 인터뷰를 꼼꼼히 찾아보고 느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결정적으로 김은영이 의료진들의 손에 끌려 나가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안 돼! 미젤! 오, 갓.
영어로 중얼거린 소리였지만 태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태수는 김은영의 옆에 앉아 나지막이 첫 마디를 꺼냈다.
“지금 이게 무슨 꼴사나운 모습이야?”
“…….”
“피분수를 손으로 틀어막고, 거침없이 꿰매던 그 모습은 어디 갔는데?”
“흐윽.”
여전히 김은영은 흐느끼기만 했다.
태수는 가만히 생각하다 결심했다.
마음속에 짙은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걸 깨 버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면 돌파가 가장 확실했다.
왜?
태수도 김은영과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확신했다.
그런 마음으로 태수는 먼저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는 태수의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강의를 하며 머릿속이 많이 정리되었고,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졌기에 신혜미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친구라며.
김은영과 친구가 되었으니 이대로 방치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태수는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댔다. 그리고 반쯤 풀어진 눈으로 그날을 회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해 초였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어. 레지던트 때 첫눈에 반한 여자였는데 도통 찾을 수가 없었지.”
“…….”
“그런데 그 여자를 상상도 하지 못할 장소에서 다시 만났어. 이미 온몸에 암세포가 번진 후에 말이야.”
태수가 짤막하게 얘기하자 김은영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그 반응을 느낀 태수는 앞만 보며 이어서 말했다.
“결국 어떤 방법으로도 살리지 못했어. 그때 술 마시면서 했던 네 말이 정확할지 모른다고 했잖아.”
“…….”
“그래, 정확했어. 그런데 말이야,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챌 수 있다면 너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태수가 먼저 마음을 열어서 그런지 김은영의 물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지던트…… 때였어. 너무너무 친한 친구가…… acute leukemia(급성백혈병)으로…….”
“그 친구 이름이 미젤이야?”
끄덕.
김은영이 미미하게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수가 가만히 바라보던 중,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난 뒤 김은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젤이……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그랬어.”
“…….”
“강해지라고. 자신은 약해서 졌지만, 나는 꼭 이기라고. 그러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고.”
계속 말을 하며 조금씩 안정을 찾는지 떨리는 목소리가 많이 차분해졌다.
그런 반면, 태수는 그 소리에 미간을 가볍게 좁혔다.
강해져야 한다.
그제야 태수는 김은영이 남자처럼 거친 말투와 행동을 하는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동안 왜 그렇게 응급 환자에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다면 의사로서 다신 같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 거고, 그건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강하고 거칠게 꾸며진 가면이 벗겨진 김은영은 여린 여자였다.
하지만 태수는 여린 김은영은 필요 없었다.
그녀의 인생과 화이트엔젤을 위해서는 강하고 거친 김은영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선 오기를 끌어 올려야 했다.
태수는 그 마음으로 김은영에게 물었다.
“그럼 넌 지금 이 모습이 강하다고 생각해?”
“…….”
“그 친구의 부탁은 너에게 이거밖에 안 되는 거야?”
태수가 자극적으로 묻자 김은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양 볼에 눈물 자국이 길게 난 모습으로 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태수야, 나 이제 그만할까?”
“…….”
“나 너무 힘들어.”
김은영의 약한 모습에 태수는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이미 정신적인 충격을 상당히 많이 받은 상태였다.
어쩌면 계속 위태위태했을지도 모른다.
김은영이 친구의 유언을 마음에 담고 억지로 버텨 왔단 생각도 들었다. 여기서 더 자극을 주는 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태수가 평소에 정신과 지식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이진 않았다.
태수도 참 난감했다.
그때였다.
띠리릭.
휴대폰 소리에 태수가 바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김혁권의 전화였다.
“접니다.”
“어딥니까?”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태수의 눈빛이 돌변했다.
“무슨 일입니까?”
“동두천 사고에서 의정부로 이송된 환자 1명이 이쪽으로 다시 오고 있답니다. 5분 이내에 도착한대요.”
“환자 상태는요?”
“abdomen perforans(복부 관통)이 심각하답니다. 수술실까지 들어올 상황도 안 된다고 하네요.”
김혁권이 들은 얘기를 그대로 해 주자 태수는 추가로 물었다.
“그 외에는요?”
“당연히 hemorrhage(출혈)이 심각하고, 장도 일부 쏟아졌답니다. 바이탈 완전 불안전하다고 하고요.”
“또 있습니까?”
“최소한 DOA는 아니랍니다. 나머지는 직접 봐야 알겠지.”
김혁권도 마음이 다급해지는지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태수가 짧게 심호흡했다.
죽은 사람에 대한 미안함은 가슴속 깊이 묻었다.
대신 조금 후에 도착할 환자는 꼭 살려야 한다.
죽은 이에 대한 사죄가 아니었다.
살아 있다면 살려야 한다.
태수는 갑작스럽지만 머리를 최대한 쥐어짜 빠르게 생각하고 말했다.
“일단 제가 신속대응센터로 가겠습니다. 수술실 열고 성재경, 유병태 선생 대기시켜 주시고, 흉부외과에도 대기해 달라고 하세요.”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내려갈 거라지만 캡틴 혼자 되겠어요?”
“설 선생은 올라왔습니까?”
“같이 있어요. 데리고 내려갈 테니까 가서 봅시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태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움직이려던 찰나 김은영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망연자실한 그녀의 모습에 태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 1명의 응급 환자가 이송되어 오는 중이야.”
“…….”
흠칫.
김은영에게서 반응이 있자 태수가 더욱 거칠게 몰아쳤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거야?”
“태수야, 나…….”
“무서워? 진저리가 나? 불과 20분 전에 우리 손에서 누군가가 죽었어. 그런데도 살려 달라고 또 누군가가 찾아오고 있다고.”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뭘까? 죄송합니다. 방금 사람이 죽어서 더는 치료 못하겠습니다.그리 말할까?”
태수가 자극적으로 말하자 김은영의 눈빛이 가늘게 흔들렸다.
태수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힘들어도 정말 힘들어도 다시 가야지.”
“태수…..야.”
“우리를 믿고 찾아오는,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를 맞이해야지. 그게 외과 의사 아니야?”
“…….”
“겉으로 강한 게 정말 그 친구가 말한 강함일까? 내가 그 친구였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널 보고 싶을 텐데 말이야.”
태수가 무차별적으로 몰아쳐도 김은영은 큰 반응이 없었다.
태수는 다시 입을 열어 김은영에게 말했다.
“그렇게 멋있다고 생각한 김은영이 고작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이제 알아챈 내가 미련했다.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태수는 바로 돌아서서 문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김은영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수야…… 내가…… 내가 진짜 도움이 될까?”
“너, 뭐 하는 녀석이야!”
“…….”
“지금 네가 뭘 입고 있는지, 입고 있는 옷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몰라?”
태수가 거칠게 소리친 순간이었다.
김은영은 자신이 입고 있던 가운, 그리고 위쪽 주머니에 새겨진 이름표를 확인했다.
-외과 전문의 김은영
꽈악.
자신의 이름표를 구겨지게 움켜쥔 김은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태수를 바라보며 자그맣게 말했다.
“한마디만 해 주라. 내가 도움이 된다고.”
“도움? 안 돼, 그딴 모습으론.”
“내가…… 내가 더 씩씩해지면?”
“환자한테 물어봐. 내가 당신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었냐고. 난 대답해 줄 수 없으니까.”
그 말을 마친 태수는 돌아섰다.
몇 마디 대화였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지체된 시간이 아까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신속대응센터에 도착해서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그런 생각으로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간 태수가 신속대응센터로 뛰었다.
한창 달리던 중이었다.
타다닥.
뒤에서 자그맣지만 바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태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태수는 빠르게 이동해 신속대응센터 뒷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김혁권과 설국진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환자도 아직 도착 전이었다.
태수가 주변을 살피는 사이 서강재가 다가왔다.
“빨리 왔네.”
“일이 있어서 근처에 있었거든.”
“그런데 가운은?”
태수는 아직도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여러 상황이 겹쳐 가운을 구경도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피는 닦아 내서 그리 볼썽사납진 않았다.
태수가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신없는 하루였네.”
“그래. 그보다 근처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별거 아니야.”
태수가 대답하는 사이 서강재가 힐끔 뒤를 쳐다봤다. 그제야 뒤따라 도착한 김은영을 봤는지 서강재는 의아하게 물었다.
“뭐야? 왜 저래?”
“나중에 얘기하고. 자리 하나만 만들어 주라.”
“이미 준비하고 있지. 내가 화이트엔젤 의국으로 전화했는데 모른 척할까.”
서강재의 말에 태수가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자식. 자리는?”
“저쪽.”
서강재의 손끝을 따라 태수의 시선이 이동했다.
조금 전 환자가 사망한 장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태수가 시선을 다시 마주하자 서강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저 자리는 터가 좋아.”
“요즘 땅 보러 다니냐?”
“그럴 돈까진 없다. 그보다 환자 EMR 받아 놨고, 혈액형 맞춰서 수혈팩도 확보하러 갔어. 정확한 건 네가 봐야겠지만.”
서강재의 말에 태수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걸 벌써 하고 있다고?”
“하석준 팀장님 특별 오더야. 지금 이 순간은 나도 화이트엔젤 지원팀이라고.”
“고맙다, 도와줘서.”
“술 사.”
“죽을 만큼 마시자.”
태수의 대답을 들은 서강재는 묵직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대화는 짧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