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708
02711 2711화
몸을 돌린 태수는 간호사실로 향했다.
타원형 구조로 중환자실을 사각지대 없이 관찰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중환자 병실 ECG 모니터 정보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커다란 컴퓨터 모니터가 넓게 제작되어 있고, 그 속엔 분할된 각 병실 EMR 수치들이 실시간으로 변화했다.
그 안으로 들어간 태수는 간호사들과 정겨운 인사부터 나눴다.
“다들 잘 지내셨죠?”
“저희 걱정할 때가 아니신 거 같은데요. 호호.”
“저요? 넘어진 김에 좀 쉬어가는 중이죠.”
“에이, 전혀 신빙성이 없어요. 다들 걱정 많이 했는데, 이제 전혀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간호사들은 방글방글 미소 지으며 태수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녀들의 얼굴에 걱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수가 나타난 순간 하고 있던 걱정까지 말끔하게 지우고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랫동안 함께한 만큼 중환자실에 찾아왔으면 다 나았단 걸 직감하고 있었다.
태수는 늘 그렇듯 태블릿 PC를 켜고 ECG 모니터 앞에 섰다.
우선 왕남규 구조대장의 EMR을 띄우고 ECG와 실시간으로 비교하며 그간 회복 경과를 확인했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환자복 차림이라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옆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그 모습을 콕 짚어 물었다.
“왜 환자가 의사 행세야?”
“어? 아, 정 선생, 잘 살았어?”
태수는 정승휘를 발견하고 밝게 미소 지었다.
그런 반면 정승휘는 태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아직도 못 믿어?”
“믿으니까 이제 나타났지. 우리 사이에 뭘 까칠하게 그래.”
“퐁당퐁당 당직 서 봐. 밥 한술 뜨면 밥알이 내 입천장을 찌르는 거 같으니까.”
그저 하는 말이 아닌 듯 정승휘의 안색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그냥 바라보고 있는데도 눈꼬리가 올라가고 미간엔 주름이 아예 자리 잡고 있었다.
태수는 그 이유를 어렵게 않게 짐작했다.
청화대교 사건 후에도 이랬다.
사고 직후부터 대략 48시간 정도까진 수술실이 없어서 수술을 못할 정도로 외과 계열 의과들이 바빴다.
그렇게 한바탕 수술을 하고 나면 외과 계열 의사들에겐 그나마 쉬는 시간이 찾아온다.
반대로 내과 계열 의사들은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특히 중환자실은 숨 쉴 틈도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살벌한 분위기가 유지된다. 수술받은 환자들이 언제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모른 탓이다.
그런데 이번 그랜드 타워 참사는 조금 달랐다.
강 건너편에서 일어난 사고인 탓이다. 위치상으로 가까운 병원으로 환자들 이송을 집중했었다.
태수가 그걸 말하려는 찰나 정승휘가 눈치챘는지 먼저 답을 말해 줬다.
“1차 응급처치를 마친 환자들이 직접 우리 병원으로 이송을 부탁했대. 그렇게 입원한 환자가 몇 명인지 몰라. 각 의과별로 취합하면 웬만한 중형 병원 병상은 꽉 차지 않을까 싶다.”
“이런…….”
“거기다가 개인 병원 응급실로 보냈던 환자들은 정희나 강서에 병상이 없어서 우리한테 보냈어. 아무래도 우리가 국내 최대 병상을 자랑하니까.”
“일이 그렇게 풀렸네.”
태수는 바로 수긍했지만 정승휘는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지금 우리 쪽 중환자실에 입원하신 분들은 중증외상 환자가 대부분이야.”
“음?”
“이 병원이고 저 병원이고…… 수술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화이트엔젤로 보냈다고.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이 왕남규 대장님이고.”
그 소리에 태수가 태블릿 PC로 EMR을 확인했다.
며칠 전에 정민수가 건네줘 확인한 적이 있지만, 그땐 황석찬 회장의 병문안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이번엔 첫줄부터 꼼꼼하게 정독했다.
“탈출 후 먼저…….”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정희로 이송했지. 정희에선 2차 응급처치로…….”
정승휘는 EMR을 외운 듯이 술술 말했다.
태수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더 생생하게 상황이 그려졌다.
그렇게 돌고 돌아 화이트엔젤에 도착 당시 왕남규 구조대장의 상태는 한마디로 정의해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멀쩡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골절과 장기가 파열된 상태가 오래 지속된 탓이었다.
거기까지 확인을 마친 태수의 미간도 어느새 정승휘처럼 주름이 패여 있었다.
태수가 직접 기본 검사를 하며 확인한 증상은 어느 정도 일치했다. 그 외에 오감으로 확인되지 않는 문제들도 상당했다.
그 모든 게 겹쳤으니 정말 사선에 걸쳐진 채 화이트엔젤로 이송되어 왔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20시간의 마라톤 수술.
그 수술의 라인업도 화려했다.
병원을 지키고 있던 의사들 중 과장과 팀장급 전문의들이 대거 참여했다.
거기에 황석찬 회장이 몇 시간씩 직접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 참관과 조언을 했던 내용도 수술 기록에 적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백성현 흉부외과장과 박남일 외과장이 복귀 후 마지막으로 투입해 수술을 마무리 지었단 내용도 있었다.
태수는 그 기록들을 모두 눈에 담았지만 침묵했다.
김선미의 수술이 떠오른 탓이다.
왕남규 구조대장의 수술은 그 정도 난이도였다. 그렇기에 많은 과장들과 팀장들이 합심해야 했다.
태수의 복잡한 시선을 본 정승휘가 한마디 덧붙였다.
“EMR에 보면 수술 후 24시간 동안 어레스트(심정지)만 일곱 번이었어. 그 후로 어레스트는 없었지만 맥박이 부정맥 직전까지 몇 번이나 춤을 췄는지 몰라.”
“고생했다. 진심이야.”
“내가 그런 소리 듣자고 한 말은 아니고. 왕 대장님 같은 환자들이 몇 분이나 계셨어. 그래서 내 꼴이 이 모양이고.”
정승휘는 한 번 더 꺼메진 안색을 강조했다.
태수는 그런 그를 향해 엄지를 내보였다.
척.
“대박.”
“……장난할 기분 아니라니까.”
“진짜 대박.”
태수는 진심을 담아 재차 강조해 말했다.
그걸 본 정승휘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칭찬은 됐고. 좌우간 곡사포에 박격포에 미사일까지 떨어져 쑥대밭이 난 중환자실이 어제저녁부터 겨우 약간이나마 한가해졌어.”
“아까 공 선배 얼굴도 안 좋다 싶더니.”
“공 선배? 한잠 주무시러 가신 거야. 계속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가 띵하다고 해서 내가 보냈어.”
“잘했어. 그러니까 너도 내 병실에 가서 좀 쉬어.”
태수가 다시금 권하자 정승휘가 어이없이 바라봤다.
“지금은 최 팀장이 환자고, 내가 의사야. 내 컨디션 관리도 못할까.”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진심으로 너부터 병실로 돌아가게 해 줄까?”
정승휘가 정색하고 으르렁거렸다.
동성종합병원 시절부터 봐 온 오랜 동료였지만 참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이 병을 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됐다. 그래서 좀 재미가 없었지만 철두철미한 만큼 실력은 보장되어 있었다.
어쨌든 태수는 정색하는 정승휘에게서 슬쩍 물러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병실에서 나왔는데 벌써 들어가는 건 사양할게.”
“그럼 조용히 볼일 봐. 나 진짜 날카로우니까.”
“그러자고. 그럼.”
태수는 두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정승휘의 태도는 딱딱했지만 필요한 정보를 모두 말해 줬다. 그렇게 피곤해하면서도 태수 성격을 알기에 궁금해할 부분을 알아서 술술 풀어 준 거였다.
동기 좋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 같았다.
좌우간 정승휘에게 들은 정보를 곱씹으며 태수는 왕남규 구조대장에게로 향했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그 거리를 걷는 태수의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바로 정승휘가 말하고 태수가 눈으로 확인한 왕남규 구조대장의 수술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한 명의 환자를 위해 많은 의료진들이 일치단결했다.
왕남규 구조대장은 그런 노력이 뒷받침되어 지금 태수가 찾아갈 수 있었다.
냉정하지만 사실이었다.
‘어떤 환자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화이트엔젤의 모토였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을 터였다.
하지만 병상의 수가 많지 않았다.
또 화이트엔젤은 비공식적으로 의료진의 이동이 가장 많은 의료팀이었다.
너무 과중한 업무와 부담감에 레지던트들과 간호사들의 이동이 잦았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전문의들도 견디다 결국 대전이나 공주로 전근을 신청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원년 멤버를 주축으로 매일 스스로의 한계와 부딪쳐 이겨 내고 있는 많은 의료진들이 있었다.
그들이 화이트엔젤을 지금껏 이끌어 왔다.
하지만 그 이상을 기대하긴 조금 무리가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생각하는 사이 태수는 유리문 앞에 도착했다.
왕남규 구조대장이 입원한 병실이었다.
태수는 생각을 그쯤에서 멈췄다.
아직 품고 있는 생각을 구체화시킬 때가 아니기에 곱게 접어 간직했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후 유리문을 열었다.
유리 문 안으로 들어선 태수의 얼굴은 어느새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병상엔 꼼짝도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는 왕남규 구조대장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본 태수의 미소가 어색하게 변했다.
강인하고 굳센 마초남인 그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던 탓이다.
초췌한 안색에 살이 내린 듯 턱선이 뾰족하게 두드러졌다. 인공호흡기는 코로 호흡을 보조하고 있었고, 천장을 향한 두 눈은 멍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몸 곳곳이 널찍한 거즈로 덮여 있고, 경미한 화상 자국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참사에서 생긴 상처들이었다.
그 외에도 모두 아물었지만 꽤 깊었을 거라 추측되는 상처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모두 출동 현장에서 얻은 상처일 터였다.
같이 사우나 한 번 간적이 없어 그동안은 볼 수 없던 상처였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조금 심하게 말해서 인조인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상처가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 상처들은 열악한 현장 환경에서도 자신의 직무를 필사적으로 이행한 흔적들이었다.
사실 가볍게 안부를 나누려 찾아온 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럴 마음이 싹 사라져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둔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 남자…… 맨살을…… 그렇게 유심히…… 봅니까?”
왕남규 구조대장은 시선만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태수는 그가 보기 편하도록 상체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대장님이 겪은 고통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들어…… 왔으면…… 인사가…… 먼저 아닙…… 니까.”
“그러게요. 인사를 드리러 온 건데, 상처들을 보니까 머리가 텅텅 비어 버렸습니다.”
태수가 묵직하게 말하자 왕남규 구조대장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흐, 흐…… 멋있지…… 않습니까……? 내가…… 열심히…… 살았단…… 증거니까요.”
“아마추어 같습니다.”
“뭐…… 라고요?”
꿈틀.
그의 눈썹이 가늘게 움직였다.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라 대답의 의도를 모르겠단 의미였다.
태수는 방금 한 말을 좀 더 풀어서 답했다.
“원래 진짜 프로는 불구덩이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도 상처 하나 없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난…… 난 또…… 뭐라고.”
“이렇게 아마추어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태수가 내뱉은 말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왕남규 구조대장도 많은 생각이 오가는 눈빛이었지만 곧 한 번 더 가늘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럼 장비…… 탓이라고…… 말하면…… 됩니까?”
“어째 뭔가 알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정규가…… 조금 전에…… 퇴원한다고…… 다녀갔습니다.”
그의 답을 끝까지 들은 태수가 쓰게 미소 지었다.
“홍 대원 입이 그렇게 가벼운 줄 몰랐네요. 척 보기에는 엄청 무겁고 신중한 분 같았는데요.”
“자기도…… 신이 나서…… 말한 건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도 그냥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실천한 건데요 뭐.”
태수가 자책을 담아 말하자 왕남규 구조대장이 눈을 끔뻑이며 답했다.
“그건…… 최 팀장…… 잘못이…… 아닙니다.”
“뭐, 그런 말씀은 지금 굳이 하실 때가 아닌 거 같습니다.”
태수는 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왕남규 구조대장은 한마디 덧붙였다.
“고맙…… 습니다. 이제…… 불이…… 무섭지…… 않을 거… 같습니다.”
“벌써 출동 생각하십니까? 그건 너무 이른 거 같은데요.”
“흐, 흐흐…… 이 꼴로는…… 그렇죠.”
그가 실없이 웃으며 답하자 태수도 무거움을 애써 덜어내고 말했다.
“들으셨겠지만 정말 위험했답니다. 이젠 그럴 일 없을 거니까 다른 생각 마시고 회복만 신경 쓰세요.”
“……흐으음…….”
짧지도 길지도 않게 내뱉은 숨소리가 복잡한 느낌이었다.
태수는 슬쩍 물었다.
“식구들이 걱정되십니까?”
“그것도…… 있지만…… 좋은…… 분들이 많아…… 큰 걱정은…… 않습니다.”
그 부분은 태수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