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EPISODE.61
그로부터 이틀의 시간이 더 흘러, 예정된 출항 시간이 다가왔다.
“혹시라도 빠진 물건 없는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점검해!”
“닻을 올려라, 돛을 펼쳐!”
“어서어서 움직여!”
출항을 앞둔 직후였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물자들이 이미 배에 실려 있는 상황에서도, 상단의 인원들은 바쁘게 배 위를 뛰어다녔다.
물론 편안하고 안락한 선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 러셀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지만.
그렇게 시작된 항해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평안했다.
배가 워낙 크다 보니 어지간한 해양 몬스터들조차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멀미조차 하지 않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제 연맹의 항구에서 쿠릴 아일랜드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삼 주 정도.
‘계속 이런 식으로만 항해가 지속되었으면 좋겠군.’
그 기간동안 러셀은 그야말로 한가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라트모스 왕가의 사위이자, 왕녀의 약혼자라는 정치적인 신분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전자로서의 위치가 불만인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후자가 마음이 편한 것만은 분명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러셀이 마냥 선실에 틀어박혀 독서만을 계속했던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배의 일을 도와주거나, 혹은 갑판 위에 올라가 몸을 움직이기도 했으니까.
파바밧-.
러셀의 주먹과 발끝이 잔영을 만들어내며 허공을 누볐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뻗어나감과 동시에 러셀의 신형이 허공에서 두 번 뒤집어진다.
파밧-.
상대적으로 넓은 갑판 덕에 할 수 있는, 도저히 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기민한 몸놀림이었다.
물론 이마저도 이런 곳에서 드러내 놓고 라만차(La Mancha)를 수련할 수 없기에 선택한 차선책에 불과했지만.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허, 대단하군! 마법 솜씨가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체술 실력 역시 훌륭해.”
고개를 돌리자 칼 네이먼이 마법을 이용해 세 개의 술잔을 허공에 띄워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에이단이 서 있었고.
“방금 전까지 훈련을 해서 더울 텐데, 시원하게 한잔 어떤가?”
“칼 씨.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호위 중에 술을 입에 대는 건 좀…….”
“괜찮네! 괜찮아. 취할 때 까지 마시는 것도 아니고, 그깟 술 한 잔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걱정스럽게 말하는 에이단을 향해 칼이 껄껄 웃었다. 이어 러셀을 향해 술잔 중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칠링(Chilling) 마법을 이용해 시원하게 해두었다네, 어서 쭉 들이키게.”
그 말대로.
‘차게 식힌 맥주에 살얼음이라.’
나무잔 안에 가득 담긴 맥주의 모습은 그야말로 군침이 돌 정도였다.
러셀이 잔을 받아들자, 기다렸다는 듯 칼이 먼저 쭉 들이키고.
꿀떡, 꿀떡-.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에이단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러셀이 입을 땐 것은 그보다 조금 후. 술잔을 입에서 뗀 러셀이 칼의 손목을 일견하며 물었다.
“그런데, 못 보던 팔찌군요?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걸 보면 평범한 장식품은 아닌 듯한데-.”
러셀의 말대로, 칼의 팔뚝에는 전에 없던 팔찌 하나가 채워져 있었다.
녹색의 보석이 박혀 있는 팔찌였다.
“아, 으응. 이건 뭐……. 별건 아닐세. 그냥 정신을 맑게 해주는 물건 정도? 오래전 스승님께서 물려주신 물건이지.”
러셀의 물음에 재빨리 대꾸한 그가, 서둘러 자신의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어 트럼프 카드 한 뭉텅이를 꺼내 들며 소리쳤다.
“자, 조금 이르긴 하지만 오늘도 판을 벌여볼까?”
트럼프도 잘 치지 못해 매번 돈을 잃기만 하면서, 항상 먼저 판을 깔아대는 꼴이라니.
그리고…….
그로부터 약 한 시간 정도가 더 흘러, 소란이 벌어졌다.
.
.
“해적선이다!”
망루 위, 망을 보던 한 선원의 외침에 선박 위로 순식간에 비상이 걸렸다.
칼이나 창을 비롯하여, 쇠봉이나 무쇠 팬에 이르기까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전투가 가능한 인원들은 저마다 싸울 거리를 챙겨 들고 전투 준비를 했다.
꿀꺽-.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만큼 고요한 침묵이 내리고, 갑판 위의 공기가 물먹은 솜마냥 무겁게 늘어지는 가운데.
“자자, 진정들 하시게.”
능숙하게 앞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칼 마법사님!”
칼 네이먼이었다.
그제야 이곳에는 마법사가 셋이나 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사기(士氣)가 갑판 위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어디 보자, 다섯 척인가-.”
그 사이 칼 네이먼은 마력을 이용해 안력을 돋우며 배를 향해 다가서는 해적단의 규모를 확인했다.
“허허, 큰 범선인 만큼 상어 떼도 많이 몰려드는군.”
이어 총 책임자인 대행수, 콜린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대행수?”
“예?”
“이 거리에서 저들을 격침 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앞으로의 상행을 생각하면 적당히 통행료를 지불하고 지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수인 것 같아서 말일세.”
“……확실히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그의 제안에 수긍이라도 하듯 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을 고용하는 것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였지, 일반적으론 적당히 통행료를 지불하는 것이 관례.
‘그런데 과연 괜찮을까?’
마법사를 무려 셋이나 고용한 것도, 배에 실린 재화들의 값어치가 상당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통행료를 지불하기 위해선 배를 어느 정도 가까이에 댈 필요가 있는데, 만약 해적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고민하던 그를 향해 칼이 호언장담했다.
“걱정하지 말게. 허튼짓을 부린다고 해도, 여기에는 마법사가 무려 셋이나 있으니까 말일……!”
“헛소리.”
따앙-!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맥주잔 하나가 그의 발치 아래를 때렸다.
댕구르르-.
떨어져 내린 맥주잔이 갑판 위를 볼썽사납게 뒹굴고,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음성의 주인을 주시했다.
“리드먼 마법사님?”
러셀의 돌발 행동에 콜린 대행수가 당황스런 눈으로 그를 주시한다.
그 시선에 러셀이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해적선을 선박 근처까지 접근하게 해서 일제히 덮칠 생각이겠지? 제법 치밀하게 준비한 것에 비해서 그리 대단한 수작질은 아니야.”
“허허, 리드먼, 그게 무슨 소린가?”
“어쭙잖은 연기는 그만두는 게 어때?”
“……?!”
“마법사가 셋이나 있어? 그중 둘에게 마력이 흩어지는 약을 먹여 놓고는?”
“약이라니, 그게 무슨!?”
당황스럽게 소리치던 콜린은 그제야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러셀 아니, 리드먼 마법사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에이단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행수님?”
“예?”
“분명 해적들이 잘 출몰하지 않는 해역을 통해서 이동했는데, 한 대도 아니고 무려 다섯 대나 되는 해적선이 따라붙었습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그 말씀은…….”
러셀이 손끝으로 칼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지목하며 말했다.
“아마도 그 팔찌가, 위치를 전송하는 아티펙트겠지.”
“큿-.”
“4써클 마법사이니, 아마도 네 녀석이 선장이거나 부선장. 여기까지 한 말 중에 틀린 말이 있나?”
4써클 마법사가 해적질을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일까.
엘프 밀매를 하던 해적선의 선장 역시, 어설프게나마 검기를 발현할 수 있는 오러 수련자였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해적선들은 조금씩 범선을 향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흐-.”
그때였다.
“이래서 눈치 빠른 애송이는…….”
지금껏 주정뱅이에, 넉살만이 가득하던 칼의 얼굴 위로 차가운 미소가 번진 것은.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을 것을, 어설프게 입을 놀려 화를 자초하는구나.”
지금껏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진 그가 짜게 식은 눈으로 러셀을 노려봤다.
허공을 향해 손을 흩뿌렸다.
“단 한 놈도 움직이지 마라! 지금부터 이 배의 항로는 내가 결정한다!”
파지지짓-!
손짓과 함께 벼락의 그물이 하늘 위로 생겨난다.
여차하는 순간 순식간에 갑판 위로 떨어뜨려 일대를 감전시키겠다는 엄포.
그렇게 갑판을 장악했다 생각한 그가 러셀을 향해 뇌까렸다.
“어설프게 똑똑한 놈. 정확한 추리였다만, 약을 처먹은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말…….”
“꺽-.”
그때 러셀의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에이단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아무래도 마력이 흩어지는 와중에 강제로 마력을 끌어올렸던 모양.
‘장이 끊어지는 것과 비슷한 고통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마법을 사용하려 하다니.
자신감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사람됨은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직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칼이 말을 더듬었다.
“너, 왜 약이, 그럴 리가…….”
처음에는 약이 늦게 도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에 따라 수분에서, 십 분가량의 편차는 있었으니까.
그런데 아직까지 식은땀은커녕 그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니.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였다.
어중간한 약은 통하지조차 않을 만큼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거나, 혹은-.
‘흩어지지 않을 정도로 결집력이 높고 정순한 마나를 가지고 있거나!’
러셀의 경우는 둘 다였지만.
“멍청하기는.”
허나, 눈치채는 것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약이 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왜 그걸 마셨을 것 같아?”
“이익!”
“자, 그럼 여기서 더 멍청한 건 당신과 나 중에 과연 어느 쪽일까?”
“닥쳐라!!”
외마디 포효와 함께 그가 손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선수필승!
‘마법을 캐스팅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
클라우디 링.
파짓.
러셀의 손가락에 채워진 반지를 따라 작은 뇌격이 튀어 올랐다.
뒤이어 하늘의 날씨가 변했다.
쿠르릉-!
한 차례 비라도 올 듯 먹구름이 하늘 위를 메꾸기 시작하더니, 떨어져 내리던 뇌격의 그물이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게 무슨?!”
우르릉-!
당황하는 그의 얼굴 위로 방전현상 특유의 푸른빛이 번져 나가고, 직후.
꽈릉!
다섯 줄기의 뇌격이 수평선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하게 선박을 향해 몰려들던 해적선들의 갑판을 관통했다.
―――――――――!!!
일격 일격이 해적선 하나를 통째로 찢어발길 만한 위력을 지닌 뇌격이었다.
그것이 무려 다섯 발, 그 다섯 발의 뇌격이 만들어내는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눈이 멀듯한 빛이 바다 위로 명멸함과 동시에, 귀를 먹먹케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달구어진 바다 위로 익어 버린 물고기들이 떠오르고, 파도가 거칠게 넘실거리며 커다란 범선이 출렁인다.
4써클 마법사가 보였다기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아, 아티펙트……?”
그제야 러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튀어 올랐던 뇌격을 떠올리며 그가 물었고,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긴 하지.”
물론 클라우디 링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이 정도 뇌격은 충분히 떨어뜨릴 수 있었다.
허나 지금 그는 6써클 마법사 ‘러셀 레이먼드’가 아니라 ‘리드먼 루이’-.
“그러니까, 이것도 아티펙트의 힘이야.”
중얼거림과 함께 칼 네이먼의 발치 아래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구쳤다.
일어난 화마(火魔)가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그의 사지를 살라 먹었다.
“끄아아악!”
“억울하면 다음부턴 아티펙트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든가.”
물론 새빨간 거짓말.
허나 그것을 알아볼 만한 마법사 중, 제정신인 이는 더 이상 갑판 위에 존재하지 않았다.
화르르륵-!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