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6
176화
* * *
시현이 천천히 말했다.
“아마 문제를 다 해결하기엔 내 일처리가 부족하겠지. 하지만 모든 일을 족하게 할 수가 없다. 내가 가진 힘이 모자라니.”
그는 자기가 말해 놓고 가볍게 웃었다.
“이 내가 힘이 부족하다 말하면 사람들이 욕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내게는 남보다 큰 힘이 있지만… 눈앞의 일을 다 이루기에는 부족하다.”
“당연한 거잖아요. 아무리 시문 님이라도,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럴 수도 없고요.”
호란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내심 이런 말이 나온 것이 반가웠다.
호란은 시현이 세상에 대해 책임감을 지닌 점을 존경했지만, 그가 너무 많은 부담을 갖는 건 원하지 않았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까지 여러 곳을 지나오면서 깊이 느꼈다. 어디를 가거나, 제 보신만 생각하는 사람 못지않게 터전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도 많았어. 다들 나와 생각도 다르고 방식도 달랐지만 그렇기에 짐을 나누어 질 수 있었다.”
“맞아요. 여기 사람들도 그럴 거예요.”
“그렇겠지. 내가 물꼬를 트면 그 뒤는 이곳 사람들이 알아서 자기 삶을 지켜나갈 거야.”
시현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점점 말이 느려졌다.
“…그러니까 나는 딱 반 시진만 더 자겠다. 반 시진 지나도 나오지 않으면 깨워다오. 조반은 들지 않는다고 일러놓고.”
그리고 시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실로 쏙 들어가버렸다.
호란이 괜한 웃음을 참고 있는데 옆에서 단이 중얼거렸다.
“좋겠다…. 잘 수 있는 사람은….”
“단도 더 자. 깨워 줘?”
“아냐. 분위기 보니까 오늘이나 내일 단구로 출발할 거 같은데, 준비할 거 엄청 많아.”
“그렇게 바빠?”
“사람 수 엄청 늘어났잖아. 식량도 식량이고…. 단구읍성 가서 목에 힘 좀 주려면 저치들 옷이라도 사다가 갈아입혀야지. 몸 하나로 모자란다.”
“내가 도와줄게. 뭐 할까?”
“너는 여기 있다가 나리님 따라다녀야지. 넌 됐고 호위들 중에서 청천읍성 시장 거리 잘 안다는 사람 서너 명만 뽑아줘. 끌고 장 보러 갔다 오게.”
“알았어.”
밖으로 나와 보니 치읍감의 도주 소식에 불안해진 청천읍성 관리 몇이 또 대문간에 와 있었다. 아직 해가 안 떠 컴컴한 시간인데도 다들 기운이 뻗쳤다.
여자 한 사람이 조바심 내는 소리로 다그쳤다.
“새벽인 걸 누가 모르느냐. 하지만 위께서 이미 기침하셨다는 이야기를 내가 다 듣고 왔느니라. 전갈 한마디를 못 드린단 말이냐?”
소릿골 몫꾼들의 머리인 편수가 제법 뻣뻣한 소리로 말했다.
“동이 트면 위께서 정청에 나가실 것입니다. 정청에서 말씀 들으실 것입니다.”
“어제 드린 서찰을 보셨는지만이라도….”
“동이 트면 정청에 나가실 것입니다.”
읍성에 들어왔을 때 눈치 보고 두리번거리기 바빴던 몫꾼들은 하룻밤 사이 어깨가 딱딱해졌다.
처음 문을 지키라고 했을 때는 땅인이나 잘 차려입은 종자가 출입을 청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단과 호란이 객사 문을 가로막고 “내일 정청에서 말씀 들으실 것입니다”만 반복하는 것을 보더니 금방 배워서 따라 하게 됐다.
하기사 읍성의 땅인 전부가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는 꼴이며 치읍감 모가지가 즉석에서 날아가는 꼴을 봤다. 어지간히 소심한 사람도 담이 커질 만했다.
반대로 땅인 관리들은 흙투성이 옷을 입고 더벅머리를 한 하늘인들 앞에서 제대로 목소리도 못 키우고 있었다. 이쪽 역시 전날 머리를 숙였던 여파를 받고 있었다.
객사 앞뜰에는 소릿골 몫꾼들과 소영네 무리 모두가 다 나와 있었다. 치읍감이 달아났다고 소란이 나는 바람에 번이 아닌 사람들까지 다 잠에서 깬 것이었다.
“수령이 옥에서 도망갔단 게 사실이야?”
소릿골 몫꾼 한 사람이 불안한 듯 물었다.
“맞아. 그런데 걱정은 안 해도 돼. 시문 님이 벽명관 총령님이랑 다른 읍성에 연락해서 잘 처리한댔어.”
“아아….”
“우린 소릿골에서 징발된 사람들이 끌려갔다는 단구읍성으로 갈 거야. 단이 물건 살 게 많아서 사람이 필요하다는데, 혹시 이 읍성 시장 거리 잘 아는 사람 있어? 서너 명 정도.”
“짐만 들어주면 되는 거야, 아니면 시세 아는 사람이 필요해?”
물은 것은 소영이었다. 단이 대답했다.
“시세는 괜찮고요, 어느 점포가 어디에 몇 군데 있는지 알면 좋습니다. 다니는 시간도 절약하고, 물건 질을 비교해 봐야 하니까요.”
“그럼 나. 그리고 규덕이하고.”
소릿골 쪽에서도 두 사람이 나섰다. 소영은 호란에게 오전 일정과 다른 몇 가지를 묻고 단과 무리를 이끌고 객사를 나섰다.
호란은 조금 이상한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영은 일행에 합류한 이후 역할을 잘하고 있었다. 자기네 대열을 잘 이끌었고 소릿골 사람들과도 충돌하지 않았다. 호란과 의사소통을 하거나 지시를 받는 데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소영은 호란과의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마음 상한 적도 없었고, 친해지려 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걸 느낄 때마다 호란은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 기분이 서운함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죄책감인 쪽이 나았다.
몫꾼은 몫꾼하고만 친구가 될 수 있다. 한동안 아예 잊고 지냈던 약바위골 어른들의 말을 호란은 요 며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단에게 처음 친구가 되자고 했을 때도 그 말을 신경 썼었다.
호란의 생각은 그때와는 또 달라졌다. 이제는 몫을 못 하는 사람과도 마음만 맞으면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하늘인이든 반민이든 크게 상관없다.
하지만 방랑족과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건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다.
* * *
청천읍성을 출발했을 때만 해도 소릿골 몫꾼들은 분위기가 밝았다.
청천에서 시현의 위세로 일이 잘 풀리는 걸 보았기 때문에, 단구읍성에 다다르기만 하면 끌려간 주민들을 찾아 수월하게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며칠 길을 가는 사이 무리에는 걱정과 불안이 퍼졌다.
단구읍성에 가까워질수록, 샘이고 마을이고 성한 곳이 없었다. 여기는 괜찮겠지 하고 찾았던 커다란 마을마저 텅 비어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인이고 반민이고 남은 사람이 없었다. 관할지가 이렇게 엉망인데 단구읍성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무사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단구읍성과 반나절 거리도 되지 않는 이 마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보기에 집이 모두 성하고 마을 앞의 수원이 무사해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정작 마을 안은 황폐했다.
버려진 모양을 보면 사람들이 떠난 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집과 수원이 성한 것을 보면 거석이 아니라 사람 등쌀에 떠난 것이었다.
“이 마을도 징발 때문에 다들 도망친 걸까요?”
호란이 말했다. 말은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이미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시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제 관할지마저 이렇게 황폐하게 만들었단 말이냐. 이리하여 단구읍성인들 얼마나 가겠느냐.”
“좀 이상하네요. 아무리 마력석 채굴에 품이 많이 든다지만, 사람을 이렇게까지 많이 쓰나?”
단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 광산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단구 관할지 몫꾼들 다 데려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청천이랑 벽무 사람들까지…? 산을 통째로 파낼 게 아니라면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 많은 몫꾼들을 데려다가 다 뭘 하는 걸까.”
옆에 있던 편수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청천에선 분명 단구읍성 채굴장으로 보냈다고 했잖아? 마력석 채굴량을 늘린다고.”
“네. 그건 거짓말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스러운 건데요….”
그때 마을 안을 둘러보러 갔던 소영과 하늘인 셋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마을 반대편에 하늘인 부대가 나타났어요! 원래는 그냥 지나가고 있었는데, 우릴 보고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백 명쯤 돼요!”
시현 앞까지 달려온 소영이 보고했다. 옆의 다른 하늘인이 덧붙였다.
“그리고 바퀴 달린 호송차 같은 걸 끌고 있어요. 안에 사람이 있어요!”
“하늘인들을 징발해가는 것 같더냐?”
“징발도 아니고… 꼭 죄수 끌어가는 거 같았어요.”
소영이 말했다. 분한 목소리였다.
소릿골 몫꾼들도 괜스레 애가 달아서 발을 굴렀다.
“얼른 가보시죠, 나으리. 가서….”
“괜찮습니다.”
단이 말했다.
“저쪽에서 우릴 보고 오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쪽이 기다립시다.”
그러면서 단은 호란을 슬쩍 찔렀다. 호란은 금방 눈치채고 몫꾼들을 정렬시켰다.
곧 마을의 큰길 건너편에 한 무리의 하늘인들이 나타났다.
기세가 날카롭고 대오를 철저하게 맞춘 것이 훈련이 잘 된 무리였다. 무리의 가운데에는 들은 대로 호송차 두 대가 있었다.
소영을 추적해온 것처럼 빠르게 달려오던 무리는 이쪽을 보자마자 걸음을 늦췄다. 그냥 돌아다니는 하늘인 무리가 아니란 것을 눈치챈 듯했다.
엊그제 단은 호위대를 모아놓고 ‘단구읍성 가서 없어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로 옷을 싹 갈아입히고 머리칼까지 정리를 해 주었다.
호란도 적색대 하던 것을 기억해 내서 틈틈이 정렬하는 법을 가르쳐 두었다.
단 본인도 평소엔 질색하던 ‘그럴듯한 종자 차림’을 했다.
덕택에 지금 무리는 제법 제대로 된 어르신 행차 태가 나고 있었다. 수레 두 대 양쪽에 호위들이 정렬하고, 맨 앞에 단과 호란을 데리고 시현이 선 모양은 멀리서 봐도 그럴듯해 보일 터였다.
상대편 하늘인 부대는 마을 광장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부대 선두에 있던 키 큰 하늘인 남자가 부관 두 사람만을 데리고 이쪽을 향했다.
남자의 부대는 모두 기세가 강성했지만, 그중에서도 맨 앞의 남자가 지닌 기운은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일행의 앞에 다다른 남자가 시현을 향해 공손하게 읍하고 말했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네가 저들의 머리 되는 자냐.”
“그러합니다.”
남자는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쯤 되어 보였다. 하늘인 중에서도 훤칠하게 키가 컸고 어깨는 넓게 벌어졌으면서도 둔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는 부대의 대장을 자처했지만, 다른 하늘인 머리나 대장이 하듯이 이마에 끈으로 된 띠를 두르지 않았다. 대신 이마를 다 가리도록 금실로 수가 놓인 천을 매어 긴 머리와 함께 뒤로 늘어뜨려 놓았다.
얼굴은 보기 좋은 호남형이었지만 짙은 눈썹과 눈매 언저리엔 차갑고 교만한 기색이 비쳤다. 피부마저 희고 매끈했다. 무릎까지 오는 화려한 전복을 걸치고 발목을 덮는 가죽신을 신은 모습은 생경한 듯 낯이 익었다.
하늘인이면서도 복장과 태도 양쪽에서 자신을 주변과 확실히 구분 짓는 그 모습은 복색만 다를 뿐 남운관에서 만났던 추선을 떠올리게 했다.
남자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저는 태청이라 하는 자로, 이 지역을 관할하는 단구읍성을 대리하여 공식 치안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단구읍성을 향하시는 것 같은데, 방문하시는 연유를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공손했지만 어딘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자신이 강자임을 확신해 마지않는 그 모습에 호란은 왠지 울컥했다.
상대방이 추선 같은 사람이라면 자기 역시 거기에 맞춰서 ‘어딜 감히 시문 나으리 앞에서!’ 같은 소리를 하면서 세도를 부려야 하는 걸까?
호란이 고민하는 찰나, 의외로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것은 단이었다.
“무례한! 제대로 소속과 직위를 밝히시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