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 * *
일행은 저녁 늦게 청천읍성에 들어왔다. 관아에서 한 번 더 영접을 받고 객사에 거처를 정한 후에야 몸을 씻고 늦은 요기를 할 수 있었다.
객사 밖은 아직까지도 인사를 오거나 ‘긴급히 고할 것이 있다’며 찾아온 이들이 소릿골 몫꾼들에게 쫓겨나는 소리로 시끌시끌했다.
내일 아침 정청에서 다시 논장을 열 것이며, 정히 화급을 다투는 일은 서면으로 올리라 전했으나 항상 말 안 듣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었다.
야참상을 물리고 한숨을 돌리는 시현에게 호란이 말했다.
“수령을 쫓아내는 건데 생각보다 쉽게 풀렸네요. 전 막 싸우고 그래야 할 줄 알고.”
“그래. 다행한 일이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무릎 꿇고 죄를 말하게 하니까 꼼짝을 못 했나 봐요. 솔직히 속도 시원했고요. 다 생각해서 성문 앞으로 불러내신 거였군요?”
호란이 감탄조로 말하자 시현은 살짝 계면쩍어했다.
“영접례를 요구했던 것은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가 맞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나도 이렇게 순탄하게 풀릴 것은 기대하지 못했단다. 치읍감을 성 밖으로 부른 건 만약의 경우 관아 안보다는 성 밖이 싸우기 좋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쪽이 민간의 피해도 적을 것이고.”
단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원래는 성문 앞에서 정면으로 붙을 생각이셨어요? 읍성 전체를 상대로?”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지. 하지만 세상일이 어찌 내 좋을 대로만 되겠느냐.”
“저기요 나리님, 그 말은 좋을 대로 안 될 때 미련을 놓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지 좋을 대로 안 되면 다 쓸어버리겠단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걱정 말거라. 빠르게 위력을 보이고 되도록 인명을 상하지 않게 일을 정리할 방도를 생각해 놓았었다.”
“그쪽 걱정을 한 게 아니라요.”
단은 치를 떨었다. 새로 길을 떠날 때마다 다짐하지만, 세상 바로잡기는 시현과 호란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얌전히 길잡이 노릇만 하자는 것이 단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시현이 말했다.
“청천읍성에서 하늘인 정예병을 몇백 명씩 동원하여 징발을 다녔다 하지 않았느냐. 즉 읍성의 무력이 상당하다는 것이고, 하늘인 병사들에게 권위가 설 만큼 마력석도 비축해 뒀을 것이고, 그간 무리한 징발로 얻은 이득이 많을 테니 저항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생각한 거하고 상황이 너무 다르긴 했죠.”
처음 징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일행은 각지의 읍성이 제 안위만 챙기느라 속령을 착취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와 보니 치읍감은 눈치만 보았고 아래 관리들은 불만이 그득했다. 하급 관인 몇몇은 치읍감을 아주 벼르고 있었던 게 뚜렷했다.
청천읍성이 인근에서 긁어모은 이득은 이곳 사람들의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단이 얼굴을 약간 찡그리더니 말했다.
“이자들이 징발한 사람과 물자를 대부분 다른 읍성으로 보냈다고 했죠. 분명 단구읍성이라고 했는데…. 잠시만요.”
단은 제 짐 둔 쪽으로 가더니 지도를 가져와 좌탁 위에 펼쳤다.
“여기가 단구읍성입니다.”
단이 지도 위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명과 함께 작은 삼각형이 그려진 위치는 벽명관에서 동남향, 마력석 산지로 유명한 삼서산 자락이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변고 후 일어나는 문제는 열 중 아홉이 마력석 관련이었다.
청천 관인들의 말에 따르면, 두 달 전 단구읍성에서 청천읍성에 협약을 청해왔다. 마력석 채굴에 인력이 부족하니 청천에서 노역할 사람을 보내주면 대가로 마력석을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납득할 만한 협약이었다. 벽명관이 함락된 이후라 계통이 혼란했으니 진행이 다소 졸속이거나 총령의 인가가 빠진 것도 눈감을 수 있는 범위였다.
문제는 협약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청천에서는 광산에서 일할 하늘인 몫꾼들을 보냈으나 돌아온 마력석은 약속한 양보다 훨씬 적었다. 그나마도 치읍감과 몇몇 사람의 뒷주머니로 들어갔다.
단구에서는 핑계만 대며 노역자를 계속 데려갔다. 치읍감은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다. 관할지 마을은 황폐해졌고 청천읍성 사람들은 관민을 막론하고 불안에 빠졌다.
일행이 소릿골을 찾은 것이 그 무렵이었다.
지도를 보고 시현이 말했다.
“거리가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구나. 그래도 제 무리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소릿골 사람들은 당장 마음이 답답할 것이다.”
“그것 말인데, 아까 영접례 때 소릿골 몫꾼들한테 슬쩍 말해봤습니다. 성 밖에 나온 땅인 중에서 마을에 왔던 징발관을 찾아보라고요. 그런데 다들 못 찾겠다는 겁니다. 때마다 여러 명이 왔었는데 한 명도 안 보인다고.”
“징발관이나 병사들이 청천읍성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냐? 치읍감의 묵인하에 단구읍성의 군대가 직접 돌아다니며 징발을 했다고?”
“얘기가 그렇게 되더라고요….”
단은 탐탁잖은 얼굴이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삼각형을 톡톡 두드렸다.
“처음부터 신경 쓰였던 점이요, 여기 단구는 궁벽하고 작은 읍성입니다. 물류도 적고 인구도 적고 병력도 변변찮고. 제가 알기론 딱히 유력자 가문도 없어요. 그런데도 청천읍성 치읍감이 단구 쪽에 이렇게까지 호구를 잡혔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과연 의아한 일이다.”
“게다가 청천 말고 다른 읍성에서도 사람을 끌어갔다고 했죠? 거기도 똑같이 호구를 잡혔다는 건데요. 이건 뭐….”
“단구읍성 단독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네가 하려는 이야기가 그것이겠지?”
“네. 어쩌면 단구읍성에 다른 세력이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데.”
단은 중간에 말을 멈췄다. 미간에 잔뜩 주름이 잡혀 있었다.
시현이 말했다.
“다른 배후가 있다라.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채굴한 마력석도 단구가 아닌 그 배후 쪽으로 흘러가고 있겠구나.”
단은 생각에 빠져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호란이 물었다.
“이 단구읍성이란 데까지 가도, 진짜 나쁜 놈은 거기 말고 또 다른 데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 이야기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에도 단의 추측이 맞을 것 같구나.”
“누군지는 모르고요?”
“그래. 모른다.”
“으.”
호란이 진저리를 내는 걸 보고 시현은 살짝 웃었다. 질색을 할 만했다. 소릿골 뒤에 청천이 있고 청천 뒤에 단구가 있는데 단구 뒤에 또 누가 있다니.
배후를 짐작해볼 단서도 없었다. 청천의 관인들은 단구읍성만 비난했지 다른 배후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비치지 않았다.
“그 치읍감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물어 봐요. 잔뜩 다그치면 말할 거예요.”
“내일 치읍감과 전횡에 동조한 몇을 심문할 것이다. 하지만 성과가 어떨지는 잘 모르겠구나.”
시현이 좌탁 위의 지도를 접었다.
“늦었으니 오늘은 쉬자꾸나. 내일은 새벽부터 바쁠 것이다.”
“네.”
호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은 시현이 내민 지도를 받고 말했다.
“먼저 쉬십쇼. 전 바깥에서 쏟아지는 투서인지 상소문인지나 좀 훑어봐 놓겠습니다. 대부분 쓰레기겠지만 뭐 건져지는 게 있을지도 모르죠.”
“알겠다.”
시현은 내실로 들어가고, 호란은 몫꾼들의 번 순서를 확인하러 나갔다. 이제는 객사 밖도 조용해져 있었다.
* * *
다음 날로 예정했던 치읍감의 심문은 진행되지 않았다.
치읍감은 밤사이 억류되었던 원옥에서 빠져나와 성 밖으로 도망쳤다. 도주를 도운 것은 치읍감과 함께 단구 쪽의 손발 노릇을 하던 법군 몇 명이었다.
치읍감과 법군들은 살뜰하게 일가족까지 챙겨 읍성 밖으로 달아났다. 휘하에 있던 하늘인 두 부대도 함께 달아났다. 자기들이 수문을 맡은 성문을 열고 도망친 것이라 막을 사람도 없었다.
새벽에 급보를 받고 침상에서 나온 시현은 그다지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협력자로 의심되는 이를 조사하라고만 명했을 뿐 도망자를 쫓는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돌려보낸 시현은 내실로 돌아와 급히 걸쳤던 창의를 다시 벗었다. 그가 말했다.
“도망칠 줄은 알았다만 과정이 너무 원활하구나. 수문군이 통째로 협력한 데다가 같이 도주하기까지 하다니…. 듣는 내가 다 민망할 정도다.”
“놈들이 도망갈 줄 아셨다고요?”
단이 물었다. 그는 투서 더미를 읽느라 늦게 자리에 든 데다 그나마도 잠을 설친 탓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알지는 못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무 조치를 안 하셨습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심문을 하시거나….”
“처음부터 도망치게 놓아둘 생각이었으니까.”
“네?”
단이 눈썹을 치켰다. 시현이 차근하게 말했다.
“어제 성 앞에서 영접례를 요구했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단판으로 크게 힘을 보여서, 반대편 성문으로 도망치게 하자고.”
“어째서요? 다 나쁜놈들이잖아요. 놔주면 안 되지 않아요?”
호란이 물었다.
“원칙이야 그렇다만 싸움이 커지면 그만큼 수습에도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그럴 시간과 인력이 없다. 차라리 전횡의 핵심 세력이 자리를 버리고 도망치면, 읍성에서도 더 이상은 인근 주민을 괴롭히기 어려워지겠지. 청천에서 내가 손대려고 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래도, 도망가서 다른 데서 또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해요?”
“그것은 벽명관에서 바로잡아야 할 일이지. 관성 함락 후 서로읍성에 임시로 총령부와 총치부를 세웠다니 그쪽에 전갈할 것이다.”
시현이 담백하게 말했다. 호란이 한 번 더 물었다.
“그 배후라는 놈들은요?”
“그것은 단구읍성에 가면 자연히 알 일이 아니냐. 소릿골과 인근에서 끌려간 하늘인들도 구해야 하고, 우리 방향과도 맞으니 어차피 가야 할 곳이다.”
계속 인상을 쓰고 있던 단의 얼굴이 풀렸다.
확실히 치읍감을 구석으로 몰았으면 일이 훨씬 골치 아팠을 것이다. 당장 치읍감에게 원한 가진 이가 많은 것 같아 보여도 이 성의 모두가 어제까지 치읍감 아래서 일했다.
치읍감이 단의 눈에야 어리바리하게 휘둘리고 호구나 잡히는 인간으로 보이지만 읍성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수령이었을 것이다. 치읍감의 영향력은 간밤의 탈옥 과정이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시현은 단판싸움에선 무적이라도 장기전을 하기엔 인력이 없었다. 시현은 그걸 알고 치읍감을 놓아 보낸 것이었다.
뭐든지 힘으로 저지르고 보는 인간 같다가도, 힘만 가지고 안 될 구석은 귀신같이 알아본단 말이지.
단은 이제 시현이 신기했다. 안 될 걸 미리 알아보고 제때 발을 뺄 줄 아는 감각을 갖기 위해 단은 셀 수도 없이 실패하고 구르고 박살이 나야 했다.
그런데 살면서 걸림돌 하나 안 만났을 것 같은 저런 도련님이 어디서 그런 감각을 익힌 걸까?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만은 불공평하다거나 화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단은 그 감각이 좌절 없이는 길러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혀 납득은 안 가지만, 눈앞의 도련님은 살면서 무수하게 꺾여온 사람이었다. 단은 그걸 슬슬 인정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