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 * *
소예는 잠시 생각했으나 곧 기대를 거두었다.
이 난국에 감히 문을 자칭하며 사기를 치려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빠르건 늦건 마력석을 뜯어내려 했을 것이다. 찾아온 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문령패를 보여달라는 말은 신원을 의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소예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면, 왜 자네가 보여달라 여쭙지 않고….”
“그야 저 같은 놈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요. 듣기로 완씨 시문의 문령패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그냥 옥돌이라지 않습니까. 하지만 토 과목 법술사이신 소예께서는 다르시겠지요. 보시면 뭔가, 보통 옥과 달리 특별한 점을 아시지 않을까….”
소예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해졌다.
“자네, 사실은 저분이 진짜 문이신 걸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혹시 날 내세워서 문령패를 보려는 속셈 아니야?”
“아뇨, 뭐 그렇게까지는. 안 내키시면 문령패 얘긴 됐습니다.”
태청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또다시 놀아날 뻔한 것을 깨달은 소예는 더 화가 치밀었다.
“이 상황에 대체 무슨 생각인가! 나를 어디까지 이용해 먹어야 속이 풀려!”
“과장스러우시군요. 치읍감님과 저는 그간 서로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는 관계였을 텐데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먼저 저버린 쪽은 자네….”
원성을 토하는 소예에게 태청이 한발 다가섰다. 큰 키와 기세가 주는 위압감에 소예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태청은 여전히 얼굴만은 부드러웠다. 그가 은근하게 말했다.
“치읍감님이 문서고에 와 계시단 건, 시문께 그간의 마력석 생산 보고서를 보여드릴 생각이시군요?”
“당연하지 않나….”
“어느 쪽으로?”
“그야 진짜 장부로 드려야지. 공식 기록은 너무 허술해. 절대 믿지 않으실 거야.”
“그러니까, 진짜 장부 중에서도 어느 쪽?”
태청의 눈동자가 빛났다. 소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단구읍성의 마력석 장부는 이중을 넘어서 삼중 사중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표면상의 것, 벽명관에 보고하는 것, 벽명관의 ‘핵심 인사’에게 보고하는 것과 단구읍성 현장의 실무를 위해 조각조각 나뉜 것까지. 가끔은 어느 장부에도 진실이 적히지 않을 때마저 있었다.
사실이 밝혀질 것을 생각하자 소예는 입이 말랐다. 온 세상이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물론 일을 시킨 벽명관 상부에서도 모른 척 질책을 해올 터였다.
태청이 타이르듯 말했다.
“설마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놓을 생각이셨습니까? 원, 아실 만한 분이…. 소예께서 그러시니 기껏 제가 단속해놓은 실무관들까지 흔들리지 않습니까.”
“단속을 했다니, 자네….”
소예의 눈 안에서 불안과 기대가 얽혔다. 지금이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는 욕망이 태청에겐 선명하게 보였다.
소예가 물었다.
“대체 뭔가. 대운관은 이제 단구읍성에서 물러나려는 것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대운관이 벽명관, 특히 단구에 이제까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시문이시라지만 이를 말씀 몇 마디로 물리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금 자네 입으로 문께 대적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문 앞에서도, 그분 원하시는 대로 다 따를 것처럼 하더니….”
“당연히 대적이야 못 하지요. 저처럼 천한 것이 어찌 극상에서 내려온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아랫것들이 위를 거스르는 방법은 따로 있지요.”
태청이 빙글빙글 웃었다.
“명에 따르되 일이 안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안 해보셨나요? 하기야, 치읍감님은 충심이 강한 분이니까.”
“어떻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문께선 하방 분으로, 조만간 돌 인간을 찾으러 떠나셔야 합니다.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벽명관 관인들이 일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실 수 없지요. 겉보기로만 적당히 맞춰 주고 떠나보내면 됩니다.”
“그게 그렇게 쉬우면 누가 걱정을 하나!”
기대를 가졌던 소예는 바로 역정을 냈다.
“내가 눈도 귀도 없는 줄 아는가! 어젯밤 시문께서 보낸 사람이 광산을 들쑤신 후로, 일꾼들이 도통 통제가 안 된다고 들었네. 하늘족은 말이 일꾼이지 풀어놓으면 전부 병사야. 수는 오죽 많은가? 놈들이 세를 지어 대열을 갖추면 어떨지 생각헤 보게. 거기다가 관아 쪽에 나나 자네를 싫어하는 관리 몇에게 권한을 줘서 마력석을 관리하게 하면 그걸로 일은 끝나는 거네.
마력석과 하늘족 군대, 이 둘이 지금 세상의 전부 아니야? 한번 일이 정해지고 나면 자네들 본대가 와도 건드릴 수가 없을 거네!”
“그러니까 본대가 올 때까지, 그 일이 정해지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태청이 냉정하게 말했다. 소예는 말을 잘못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본대가… 온다고?”
“옵니다. 서로읍성과 지화읍성 양쪽에 주둔했던 대운관군, 벽명관의 우리 측 관인들, 초반에 빌려드렸던 실무관들, 그리고 어사 길씨 남의께서도 오고 계십니다.”
“언제… 언제? 어떻게….”
“이삼일이면 족히 닿을 것입니다. 시문께서 단구에 모습을 보이신 순간 서로읍성과 지화읍성 양쪽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제가 감당할 선을 넘은 걸 처음부터 알았으니까요.”
“…어째서 내겐 아무 언질도 해주지 않았나….”
“음….”
태청은 일부러 생각하는 모양을 지어보이더니 싱긋 웃었다.
“확실히 온다는 전갈을, 제가 방금 받은 것으로 해두죠.”
소예가 일을 그르칠까 봐 일부러 숨겼다고 직접 말하는 쪽이 덜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예는 모욕감을 표시할 겨를도 없었다.
태청이 차근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시문께서는 마음 같아선 당장 광산 일꾼들을 해방하고 싶으실 겁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우리와 대화하신 후, 먼저 관부터 정비하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대책 없이 광산 일꾼들을 해방하면 굶주린 폭도가 될 뿐이라는 걸 아실 테니까요. 아마 단구의 식량 보급이 대부분 대운관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시겠지요.
우린 그 점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대운관군 본대가 도착하여 읍성 앞에 대부대를 벌여 세워두면 광산 인부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단구에서 시문께 동조하려던 관리들도 감히 나서지 못할 것이고요. 그때 일을 바로잡겠다며 벽명관에서 온 우리 사람들을 관아에 밀어 넣으면 시문께서도 거부할 명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문령이 거둬지진 않네.”
“표면상으로는요. 하지만 시문께는 시간이 없으시지요. 지금도 돌 인간 일로 마음이 급하실 겁니다. 오래 머무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시국에 정면 충돌을 일으켜 대운관군을 몰살하겠다는 생각까지도 안 하시겠지요. 대치 상태가 길어지면 결국 전부든 일부든 양보하고 타협책을 찾게 되실 겁니다.”
“타협책….”
소예가 중얼거렸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양쪽을 저울질하는 모양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태청은 내심 우습다고 생각했다. 재협상이 벌어지면 벽명관과 대운관의 상부에서는 제일 먼저 소예의 엄벌부터 약속할 것이다. 소예가 그것을 아예 모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소예의 마음은 결국 대운관 쪽에 기울어질 것이고.
태청은 모르는 척 이야기를 이었다.
“다만 시간을 끌려면 시문께 명분을 너무 많이 드리면 안 됩니다. 가능한 실질적인 정보를 차단하고, 특히 대운관이 운영하는 광산이 벽명관 속령 내에 몇 곳인지, 단구에서 대운관에 정확하게 무엇이 얼마나 넘어갔는지 같은 것은 반드시 덮어야 합니다. 민심이 술렁이고 하급 관인들이 분개하면 시문께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아래 관인들이 버티려면 먼저 치읍감님께서 중심을 꽉 잡고 버텨주셔야 합니다. 지금처럼 소매에 불붙은 듯 난리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그만두시고요.”
소예는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일을 덮으려는 기색을 보이면 시문께서 노하시지 않을까. 어쩌면 폐격을 당할지도.”
“그래도 저희 보호를 받으시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보호라고?”
“네. 단 두 달 사이 인망은 오죽 잃으셨고, 사방에 원망은 오죽 사셨습니까. 치읍감닙께선 지금 파직이나 폐격보다 목숨을 먼저 걱정하셔야 할 상황인데요.”
“그건 전부 자네 말을 들어주다 그렇게 된 것 아닌가!”
“그러니 저희가 보호해드리겠다는 겁니다.”
태청이 미소 지었다.
“그동안 한몫 잘 챙기신 거 압니다. 온전히 누리시려면 신변부터 무사하셔야죠? 물론 가족분들도 생각하셔야 하고요.”
“…….”
소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청은 소예의 마음이 정해진 것을 알았다.
그래도 태청은 한 번 더 다짐을 두었다.
“시문께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아랫사람들은 제가 단속하겠지만 치읍감님도 잘해주셔야 합니다.”
잘하시겠지요. 원래도 모르겠다 소리를 제일 잘하셨으니까. 태청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완씨 시문은 소예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지만 태청이 보기에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이제까지 그가 해온 일들이었다.
* * *
“저기, 어디서 들은 얘긴데요…. 여기로 군대가 잔뜩 오고 있대요. 관성 총치총령이 직접 온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리며 말한 것은 소영이었다. 시현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자세히 말해 보거라.”
시현이 묻자 소영은 어째선지 더 방어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확실한 거 아니고 소문이에요. 어쨌든 대운관군이 온대요. 며칠 안에 도착할 거라고.”
“그런 말을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냥 들었어요.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니다. 사실일 것이다. 그러면 관리들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치읍감 소예가 허둥거리는 것에 비해 단구읍성 관인들은 비교적 통제되어 있었다.
시현에게 고발하러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시현이 불러서 무엇을 물어도 깊은 정보를 내어놓기를 꺼렸다.
자기들도 떳떳지 못하니 고발에 앞장서기 어렵겠지만 그를 감안해도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말 하려고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했구나? 왜 진작 말 안 했어?”
호란의 물음에 소영이 툴툴거렸다.
“주위에 사람이 있었잖아.”
“진작에 사람을 물릴 것을 그랬구나. 앞으로는 나나 호란에게 할 말이 있다고 말해주거라.”
시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행은 시현이 차를 마시겠다는 핑계로 빈 접객실에 있었다.
오전이 반이 지나가도록 상황에 진척이 적고, 마침 처소로부터 단이 찾아왔기에 편하게 상의를 하려고 자리를 잡은 것이었는데 생각지 못하게 소영 쪽에서 이야기가 나왔다.
단이 소영에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조금만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십시오. 말의 출처는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아냐, 지나가다 들은 얘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소영은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서 계속 회피했다. 단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민감한 상황에 민감한 정보, 그것도 군사에 관한 정보다. 이런 정보는 신뢰하는 상대가 아니면 좀처럼 오가지 않았다.
“이 관아에서 일하시는 분 중에, 그… 같은 무리 출신이 있으시지요?”
“아니야!”
소영은 화들짝 놀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곧 제 속을 다 들킨 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다들 어렵게 민적에 올라가고 오래 고생해서 자리 잡은 사람들이야. 방랑족 무리에 있었던 거 감추고 일자리 얻은 녀석도 있고. 나 때문에 곤란해지면 안 돼.”
즉 정보원은 여럿이군. 피난민에 섞여 들어온 게 아니라 예전부터 읍성에 자리 잡아놓은 사람들이고. 꽤 괜찮은 위치에 있을 수도 있겠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좋았다. 단은 달래듯 말해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분은 소영 호위에게 와서 말을 해주셨잖습니까. 시문 나리님께 전해지길 바라서 그러신 거 아닌가요?”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원래 이런 건 서로 말해줘. 알 건 알아 놔야 튀어야 할 때 바로 튈 수 있으니까….”
소영이 어물거렸다.
심지어 의리가 아주 깊어 보였다. 이것도 호재였다.
호란은 방랑족이라면 다 하늘인 강도떼만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설령 약탈을 하는 무리라도 일 년 내내 그러고 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방랑족 무리가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가진 반민들을 받아주었다.
소영이 말한 ‘자리 잡은 애들’이 단구읍성에 관군으로 있는 하늘인뿐일까, 아니면 반민 잡직도 있을까?
하늘인 관군은 출신을 까다롭게 따졌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후자인 쪽이 단에게도 더 좋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