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14
214화
* * *
“명령패라니.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가?”
시종장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뒤늦게 제가 한 말의 파급력을 깨달은 듯했다.
“그, 그자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잡담처럼 흘리듯 말한 것인데, 어쩌면 별 의미 없을 수도….”
“그럴 리가 있느냐!”
교연이 의자의 팔걸이를 탕 내리쳤다.
“네 말인즉슨, 다른 곳 아닌 이 대운궁에서, 다른 사람 아닌 이 내가 보낸 시종들이 완씨 시문에게 좀도둑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냐? 그것도 명령패에 손댈까 의심을 사? 이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야?”
“그저 두려울 따름입니다….”
대운관의 위신에 관련된 큰일임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시종장은 머리를 못 들었다.
교연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네가 나와 대운궁의 체면을 아주 바닥에 처박는구나. 대체 처소 시종들이 어찌 처신했기에 그 지경에 이른 것이냐!”
시종장은 주저하면서도 변명의 말을 했다.
“극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은 모두 저의 부족함입니다. 다만 그 종자의 경계심이 꼭 처소 아랫것들 탓은 아닙니다. 듣기로 그자는 본디부터 의심이 가득한 이라 합니다. 대운관에 오는 중에도 짐을 바늘 하나까지 직접 건사하고, 회유를 꺼리는지 주위와 말하기는커녕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처소에 와서도 꼭 그대로였습니다.”
그 말에 교연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 듯 천천히 말했다.
“…그래. 그 보고는 나도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자는 원래가….”
교연이 수긍해주자 시종장은 다소 안심한 듯했다. 그는 경계당하는 것이 제 책임이 아님을 한 번 더 강조하려 했다.
교연이 무심한 어조로 시종장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너는 그 말을 대체 어디서 들었을까?”
시종장이 얼어붙었다. 교연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너는 궁 안 가장 깊은 곳을 관리하는 이로 궁 밖은 출입조차 할 일이 없음을 내가 아는데, 어사대로 벽명관에 갔던 외부의 누군가와 용케도 연결이 있구나.”
“그것은, 그냥 소문으로… 소문으로 들은 것입니다….”
“소문이라, 과연? 구중궁궐 안의 너에게 굳이 바깥의 정보를 알려준 자는 그만큼 얻고자 하는 바도 있을 것인데, 그자가 무얼 바라고 그 소문을 물고 왔을까?”
“…그런, 것이 아니오라… 저희는….”
시종장이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떨리는 목소리는 입 안에서 뭉개질 뿐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궁금해지는구나…. 시문이 아닌 한낱 종자의 행동거지를 굳이 주시하고 있다가 네게 그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일까? 그자는 왜 그랬을까?”
교연이 말하면서 느리게 당 위를 거닐었다.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애초부터 시문의 종자가 그리도 주위를 경계하게 만든 것은 또 누굴까? 다른 것도 아니고 명령패를 노린다 의심받을 이유를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교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웃었다.
“나는 꼭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일 것만 같구나.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 지금 바로 알아야겠다.”
시종장은 벌벌 떨다가 내관 한 사람의 이름을 댔다. 교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자가 어사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처음에 일을 만든 자를 고해야 할 것이다.”
교연이 활짝 웃는 얼굴로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어사대와 크고 작은 연관이 있는 자들이 모두 움찔했다.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어도 교연이 미칠 듯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이 일에 대해서 나에게 할 말이 있는 자만 남고 모두 나가라. 다만, 나갔다가 다시 불려 들어오는 자는 나름대로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교연은 고관들이 우왕좌왕하는 꼴을 잠시 지켜보았으나, 오래지 않아 그의 미소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가라, 어서!”
새된 목소리가 높은 천장을 찌르고 한 떼의 관인들이 우르르 방에서 도망쳐 나왔다.
모든 것이 암중인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날 밤의 희생자가 정해졌다는 것뿐이었다.
* * *
정벌군이 대운관에 돌아온 것은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였다.
성문 앞에서 일행은 뜻밖의 소식을 맞닥뜨렸다.
“개선 행진을 하라고?”
성문 앞에 대령된 높고 화려한 수레를 바라보며 시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영접을 온 부총관이 양손을 맞잡고 굽신거렸다.
“예.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고 수레에 올라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피곤하실 터이나, 개선 행렬이 많이 길지는 않으니….”
시현을 맞으러 나온 것은 뻔뻔스럽게도 전장에서 도망쳤던 지휘부 법군들이었다. 그자들도 승전식에 한 자리를 차지할 예정이었다.
시현은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으나 거절하는 것도 상책은 아니었다.
교연이 무엇을 노리고 하는 일이든, 시현을 위해 개선식을 여는 것은 표면상 유화책이었다. 내민 손을 이쪽에서 쳐내는 것은 좋지 않았다.
대운관군은 이미 행진을 위해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시현은 의복을 정돈하겠노라 하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호란이 휘장 뒤로 따라와서 들릴락말락 한 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교문은 시문 님의 공적을 감추려고 하는 게 아니었어요?”
“나도 그럴 줄 알았다만, 그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구나.”
시현은 짧게 대답하고 말을 아꼈다.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방침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위정자로서 교연의 장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의도도 행동도 예측할 수 없는 상대란 껄끄럽기 마련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단은 시현이 띤 광다회의 술을 정리하고 매무새를 고쳐주고 있었다. 어째선지 평소보다 손이 느렸다.
그가 약간 망설이다가 말했다.
“개선 행진은, 하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빠지게 해주십시오.”
“그러거라.”
단이 얼굴 팔리기를 질색하는 걸 알고 있는 시현은 선선히 답했다. 호란이 물었다.
“수레 따라서 군인들이랑 걸어올 거야? 피곤할 텐데.”
“아니, 수레 위고 아래고 행렬 자체가 좀….”
단은 난처해 보였다. 시현이 물었다.
“혼자 오겠느냐? 궁에 들어오는 과정이 번거로워질 텐데. 사람에게 말을 해둘 수는 있다만.”
“그건… 그렇게라도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시현은 휘장 밖으로 나갔다.
호란은 그 뒤를 따르면서 단을 흘긋 돌아보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정리하는 군인들 사이에 멀거니 서 있었다.
호란이 단을 보는 걸 알고 시현이 말했다.
“걱정되느냐? 요즘 단이 눈에 띄게 무기력하기는 하지. 아무리 주위를 경계한다지만, 처소 안에 틀어박히는 것도 지나치고.”
“네. 사람 보는 것도 싫어하지만 요즘은 밖을 다니는 것 자체가 싫은 것 같아요. 어제도….”
호란은 말을 더 하려 했지만 시현을 보고 대운관 관인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운관에 와서 신경이 바짝 곤두선 것은 시현도 호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은 정도가 심했다.
어제 궁을 나와서 치안소까지 가는 동안에도,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행동했지만 속은 잔뜩 긴장해 있는 걸 호란은 알았다.
걱정은 되었지만 단과 진득하게 이야기를 해볼 겨를이 없었다.
당장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인데다, 짬이 생겨도 곳곳에 눈과 귀가 있어서 깊은 속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적으로 둘러싸인 장소에서 약점이 될지 모를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 한 바보짓은 없었다.
하물며 그게 단의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단이 호란을 반쯤 죽이려고 할 거였다.
호란은 걱정을 일단 눌러 두고 시현을 따라 수레에 올랐다. 당장은 호위에 집중해야 했다.
개선 행렬은 성대했다. 악대와 놀이패가 수없이 동원되었고, 큰길과 광장에 새까맣게 사람들이 모여 환호와 찬사를 외쳤다.
행렬 양옆에서는 선전관들이 목청을 높여 완씨 시문과 대운관군의 공적을 외쳤다. 분장한 화동들이 꽃종이와 동전을 뿌리며 분위기를 돋웠다.
그러나 행렬이 움직일수록 호란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관성에 쳐들어오려던 거석 무리를 모두 쳐부쉈다는데, 사람들은 마냥 기뻐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함성을 지르고 환호하는 와중에도 군중 사이사이로 어둡고 무거운 기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덩달아 호란의 기분도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행렬은 대로를 지나 대운궁을 한 바퀴 돌고 궁궐 정문으로 돌아와 간략한 개선식을 할 예정이었다.
선두가 대운궁 뒤편에 이르자 드높이 선 태화관이 눈에 들어왔다.
태화관은 궁궐 담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 앞의 작은 광장을 내려다보는 형상으로 서 있었다.
“교문께서는 개선식에 나오지는 않으시지만, 태화관 창가에서 지켜보실 겁니다.”
수레에 동석한 관인이 시현에게 귀띔했다. 솔직히 어쩌란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시현은 고개만 끄덕였다.
곧 태화관 앞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거쳐온 다른 광장과는 달리, 태화관 앞 광장은 텅 비어 사람이 없었다.
대신 광장 한가운데 높은 단이 설치되고 주위에 높은 장대가 잔뜩 꽂혀 있었다. 장대 위에 걸린 것은 멀리서 보아도 사람의 머리였다.
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저건 처형대가 아니냐.”
“예. 태화관 앞 광장은 수년째 대역 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눈에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만, 어리석은 백성에게 본보기가 되는 일이니 혜량하십시오.”
관인이 대답했다. 태도는 다소곳했으나 그의 음성에서는 일종의 저의가 느껴졌다.
“대역이라니….”
시현은 질문을 하려다 말고 말을 잃었다. 호란도 목소리를 못 내고 입술을 깨물었다.
장대에 걸려 있는 머리의 절반 이상이 호란이 본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처소의 시종장과 시종들, 어사대와 함께 대운관에 오는 동안 시현의 신변을 돌보았던 시중꾼들, 어사대에서 호란과 말을 섞었던 병사…. 모두 꼽기도 어려웠다. 가장 높이 걸린 머리는 벽명관에서 보았던 상장군 연화였다.
동석한 관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극상이신 시문의 주위를 염탐하고, 심지어 물건에 탐을 낸 사특한 자들이 발각되었습니다. 이 대운관에서 흉심 품은 자들이 극상의 주위를 맴돌게 둔바 저희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뒤늦지만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붙잡아 죄를 묻고 처단하였으니 부디 이것으로 마음을 푸소서.”
“…….”
시현은 바로 말을 못 하고 숨을 허덕였다.
“저 많은 이들을, 모두 내 이름을 내걸고 죽였느냐? 다른 죄도 아닌 대역죄라고?”
“위를 거스르는 마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대역입니다. 모두 자기의 죄를 인정하였으니 시문께서는 마음 아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관인이 말했다. 그는 제가 하는 말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호란은 군중 사이를 감돌던 무거운 기류의 정체를 그제서 깨달았다.
동전을 줍고 시문 만세를 외치면서도 사람들의 눈 어딘가를 떠나지 않던 어두운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시현은 어떤 직감에 고개를 들고 위를 보았다.
태화관 오 층, 활짝 열린 창 앞에서 교연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교연은 얼굴 가득 미소를 꽃피웠다. 맑은 연파랑 눈에 순수한 환희가 비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