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23
023화
* * *
호란이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리야? 쟤들이 우리한테 해 안 끼치겠다고 약속했잖아.”
“시문 나리님께서 ‘치풍관에 해 될 사람이 아니라면’ 손 안 대기로 한 거지요. 헌데 해가 되고 안 될지를 누가 정합니까? 다 저들이 정할 게 아닙니까.”
시현도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내가 어째서 치풍관에 해를 끼친단 말이냐? 남운관과 치풍관은 백 년을 돈독히 교류한 사이다. 서로 의지하면 의지했지 해 될 일을 한 것이 없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가 죽을 이유가 또 하나 늘었네요.”
단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현이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들이 이렇게 날카로워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 그 이유를 알면 오해를 풀 길도 생길 것이다.”
“이유 말입니까요.”
단이 가린 손 밑으로 긴 한숨을 뱉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나리님, 이 마당에 와서도 상황이 짐작이 안 가십니까? 아무나 살러 와도 되지만 땅인만은 안 된다고 했을 때, 이미 자기들 입으로 다 말해준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수레가 굽은 길을 돌자 치풍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운관에 비해 성의 크기는 작았지만 치풍산의 견고한 암벽이 성곽의 일부인 양 성을 떠받친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도시 앞쪽에는 깎아지른 암벽, 반대편에는 깊고 너른 화구호를 둔 치풍관은 말이 필요없이 땅 위 제일의 요새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성벽에 금가고 무너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치풍관 역시 혹독하게 습격을 당한 모양이었다.
성문은 깨어진 것을 다시 세우지 못했는지 돌을 쌓아 막아두었다.
법과 도리로 다스림을 의미하는 두 가지 색 휘장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벽 꼭대기에 뭔가 울긋불긋한 것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치풍관을 올려다보던 시현이 숨을 멈췄다.
눈이 좋은 호란은 이미 안색이 굳어 있었다.
시현이 떨리는 손으로 창살을 쥐었다.
“저건… 사람…. 사람이냐?”
호란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하늘인들이 끄는 수레는 성큼성큼 나아가 이미 매어달린 형상이 하나하나 구분될 정도였다.
성벽 꼭대기에 십 수 구의 시체가 내걸려 있었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화려한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가운데 사람이 걸친 것은 총치의 홍단령이 아니냐! 려인이다! 저건 려인이야!”
수레를 끌던 하늘인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려인도, 다른 놈들도, 백성 피 빠는 것밖에 모르는 쓰레기는 싹 다 치워버렸다. 이제 치풍관은 우리 하늘인의 것이야. 네놈도 일단 치풍관에 들어가고 나면 윗전 대접은 꿈도 꾸지 마라.”
시현은 안색이 하얗게 변해 비틀비틀 수레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이 머리를 긁었다.
“개가 말하는 먹이와 양이 말하는 먹이는 이름이 같아도 뜻이 다르지요. 나리님께서 말씀하시는 치풍관과 저들이 말하는 치풍관이 다른 뜻이니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무사하기는 글렀습니다.”
도시로 들어간 일행은 다시 한번 놀랐다.
분명 치풍관의 성곽은 무너지지 않았을 터인데 시내는 살풍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로변에 늘어선 집들은 한때는 버젓했을지 모르지만 대개가 낡고 더러웠다.
도로는 관리되지 않아 울퉁불퉁했다.
시장은 서 있었으나 물건도 적고 활기라곤 없었다.
몇 군데 죽을 파는 곳에 줄이 좀 서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성곽이 깨진 후의 남운관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퀭한 얼굴로 길가에 앉아 있던 반민 하나가 수레 위의 시현을 보더니 손가락질했다.
“땅인이다!”
그 한마디에 거리 곳곳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사람들이 우르르 수레 주위로 몰려왔다.
“쳐 죽여!”
“왜 데려온 거야!”
“당장 죽여라!”
수레를 향해 야유하는 것은 반민과 하늘인을 가리지 않았다.
눈동자엔 하나같이 분노와 미움이 차 있었다.
호란은 시현을 조금이라도 가려줄 마음으로 수레 한가운데 버티고 섰다.
하지만 막상 성난 사람들의 눈동자와 마주하니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소리칠 수가 없었다.
호란은 그런 눈동자를 잘 알았다.
그들은 배를 주리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앉거라, 호란.”
시현이 낮게 말했다.
“욕을 먹는 것은 나다. 네가 거기에서 버틸 필요가 없다.”
“시문 님이 왜 욕을 먹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호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불과 얼마 전 남운관에서 시현이 행차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시현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절하고 환호했다.
그러나 여기는 남운관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했으니 욕을 먹어야지.”
시현이 씁쓸하게 말했다.
“치풍관이 어렵다 들었으나 이정도인 줄을 몰랐구나.”
“그건, 시문 님은 치풍관 사람도 아닌데….”
호란은 속상할 따름이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큰 우물이 있는 광장을 지나니 문 하나가 더 나왔다.
마치 저택 안에 중문이 있듯 낮은 성벽과 웅장한 문이 도시를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문 안은 바깥과는 딴판이었다.
대리석으로 포장된 가도를 가운데 두고 번듯한 집과 가게, 으리으리한 관아가 양쪽으로 벌려서 있었다.
수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건물 앞에 멎었다.
공무의 중심이 되는 총치부 대영관이었다.
일행은 본관 이 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인도됐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곳인 듯 탁자와 의자, 다구를 둔 찬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큰머리에게 보고하는 동안 여기서 기다려라. 땅인과 반민은 몸수색을 받는다.”
수레를 끌어온 하늘인 병사가 방문 앞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호란을 향해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몫꾼은 이쪽으로 와. 수리 대장이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시문 님과 떨어질 순 없어.”
호란이 정색했으나 시현이 만류했다.
“다녀오거라. 너희는 하늘족의 맹세를 나누지 않았느냐. 서로 믿어야지. 이야기도 들어보고.”
“네에….”
호란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방을 나섰다.
단이 구석에서 뭔가 하고픈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호란은 눈치채지 못했다.
수리는 건물 반대편에 있는 방에서 호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현과 단이 안내된 방보다 더 밝고 버젓했다.
탁자에는 보리로 만든 단술과 음식이 몇 가지가 차려져 있었다.
수리가 웃는 얼굴로 호란을 맞았다.
놀랍게도 아까 부러진 다리가 멀쩡하게 나아 있었다.
“어서 와, 호란. 산 오르느라 고생했지? 감주 좋아해?”
감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호란이 수리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리, 어떻게 된 거야?”
“고쳤지. 우린 우리 나름의 살 도리가 있어.”
수리는 다시 한번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호란은 나와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서 앞에 놓인 감주를 들이켰다.
맛있었다. 호란은 조금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너, 대장이면 높은 사람이지? 조사든 뭐든 빨리 끝내고 보내 줘. 우린 급한 일이 있어. 여기 한정 없이 가둬둘 생각은 하지 마.”
“우리가 널 왜 가둬. 다른 둘은 몰라도 너 같은 몫꾼을 가둬둘 도리가 없지.”
수리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난 널 가두지 않아. 난 널 회유할 거야.”
“회유는 무슨. 나는 편 바꾸는 사람 아니야.”
호란이 딱 잘라 거절했지만 수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들어 봐. 여기 치풍관은 진짜 끝내주는 요새야. 땅인 없이도 거석을 잘 막아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우리 하늘인만으로도 삶터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줄 거라고.”
“너네들 맘대로 보여주면 되잖아.”
“그러려면 우리한테는 좋은 몫꾼이 많이 필요해. 호란 너 같은 몫꾼 말이야.”
수리가 호란을 똑바로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눈빛은 곧았고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보통이라면 호란은 수리가 아주 좋은 몫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호란은 이미 많은 것을 보았다.
호란은 흘끗 바닥을 곁눈질했다. 문틀과 바닥 사이 파인 곳에 미처 다 닦지 못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호란이 물었다.
“땅님들을 얼마나 많이 죽인 거야? 마법을 못 쓰게 됐다고 다 죽인 거야?”
“우리가 그랬을 거 같아?”
부드럽던 수리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쳤다.
“마법? 원래도 치풍관은 우리 하늘인의 손으로 지켜왔어. 땅인들은 명령하고 거들먹거리는 게 다였어. 그 잘난 마법은 거석이 성곽 목전까지 와야 써줄까 말까 했지. 그때까지 죽고 다치는 건 전부 우리 몫이고.”
수리가 화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마법이 사라진 날. 그날은 최고로 끔찍했어. 거석이 끝도 없이 몰려오는데 땅인들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자기들끼리 뭘 쉬쉬하고 허둥거리느라 전장은 상관도 안 하더라.
무너져가는 대열을 지원해달라고 한참 사정하고 애걸한 후에야 그들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됐다는 걸 알았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했겠어?”
호란이 눈을 크게 떴다.
“다 죽였어?”
“안 죽였어! 그때까진!”
수리가 성질을 냈다.
“우린 우리가 알아서 치풍관을 지키기로 했어. 처음엔 그게 다였다고….”
수리의 목소리가 약간 수그러들었다. 그가 분한 듯 바닥을 보았다.
“땅인이 아무것도 못 하는데 걔들 지휘 받아 봐야 소용없잖아. 애초에 그 새끼들 지휘도 더럽게 못 하는데. 우리는 대열을 재배치하고 직접 지휘를 했어. 더 희생이 적게. 더 잘 버틸 수 있게. 우리 힘으로 치풍관을 지키려고 노력했어….”
수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이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그랬더니 땅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명령 무시니 뭐라느니 하면서, 갖고 있던 마력석으로 우리 큰머리를 공격했어!”
호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왜?”
“왜긴 왜야, 지들 말 들으라고 그런 거지! 성 밖에는 거석이 셀 수도 없이 몰려오는데, 그놈들이 거석이 아니라 우리한테 벼락을 쐈다고!”
수리가 벌떡 일어나 가슴팍을 열어젖혔다.
그 위에는 달군 철망으로 지진 것 같은 흉한 흉터가 어지럽게 패여 있었다.
수리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싸움 중에 어떤 새끼가 우리 큰머리를 쳤어! 그 새낄 뭐라고 해?”
호란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적이지!”
“그 새끼를 어떻게 해?”
“죽여야지!”
수리가 싱긋 미소를 띠워 올렸다.
“그래. 네가 이해할 줄 알았어.”
“음….”
호란은 조금 곤란해졌다. 이해한 건 맞는데 수리네의 행동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호란이 말했다.
“그래. 너네가 치풍관 땅님들을 왜 죽인지는 알겠어. 근데 시문 님은 달라! 시문 님은 항상 거석한테서 남운관을 지켜줬어. 똑같이 취급하지 마!”
수리가 냉소했다.
“하지만 결국 땅인이지. 좋은 땅인이든 나쁜 땅인이든, 땅인은 아랫것이 자기 지위를 위협하는 걸 용서 안 해. 다른 관성을 끌어들여서라도 우릴 제 발밑으로 돌려놓으려고 할걸.”
“시문 님은 그런 짓 안 해! 시문 님은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시는 중이란 말야!”
수리의 눈빛이 주의 깊어졌다.
“중요한 일? 그게 뭔데?”
8. 미끼
호란이 자리를 비운 사이 시현과 단은 철저하게 몸수색을 당했다.
처음에 병사들은 시현을 주로 표적 삼았다.
하지만 수색이 진행될수록 곤경에 빠진 건 단이었다.
단은 걸낭과 차는 주머니를 셋이나 갖고 있었고, 옷에는 저고리고 두루마기고 하나같이 호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눈에 익지 않은 물건이니 도구가 끝도 없이 나왔기 때문에 단은 짐과 옷을 통째로 압수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이 방을 나선 뒤, 저고리까지 빼앗기고 민소매 차림이 된 단이 성이 나서 벽을 걷어찼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긁으며 의자도 놔두고 방구석에 주저앉았다.
“젠장! 너 때문에 나까지 이게 무슨 꼴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