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142
복숭아 세 알 (1)
‘어.’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서, 도원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시간의 세계수가 말을 걸어왔다.
‘무슨 문제.’
[당신의 부재가 길어지는 바람에……. 소란이 있었습니다.]세계수의 말에 나는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저쪽 시간대의 나는 말도 없이 사라져서, 숙소에도 돌아오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내가 과거에 있다지만 현재의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서의 한 달은 현재의 하루. 저쪽 시점으로 따진다면 내가 사라지고 하룻밤이 지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해?’
[아니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다고 무녀에게 전음을 보냈습니다. 아마 곧 전달되겠지요.]‘다행이네.’
내가 저쪽 시간대로 이동하게 되면 시간의 세계수의 수명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게 된다.
보고 싶은 사람은 많지만, 참아야지 뭘 어쩌겠나.
산꼭대기의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른 도원을 한 눈에 담았다.
[그동안 이룬 것은 만족스러우신지요.]세계수의 갑작스런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얻은 건 충분히 많지.’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겉치레로 하는 말?’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천마와 대화를 나눌 때는 불그스름했던 새벽 여명이, 이제 아침을 맞이하는 노을이 되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주변에 집중 했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객잔 주인의 발걸음이나 두부 장수의 목소리 같은 사소한 소음만이 퍼져나가는 이 순간.
매번 훈련이 끝나고 산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곳의 평화로움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퍽 즐거운 운치라고. 매번 생각한다.
[당신은 대단하네요.]‘……야.’
[네?]‘아부 좀 그만해라.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당신이 그 여자분의 죽음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보세요. 그 비슷한 걸 저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아하. 체감이 확 되네.’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세계수의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정도로. 그녀는 무언가 미래를 바꾸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당신이 대단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정신력은 좀 본받을만 하네요.]‘너 사회생활은 잘하겠네.’
[곧 죽지만요.]“큭큭큭큭.”
실소를 흘렸다.
잡담도 충분히 했으니 슬슬 움직여야지.
한 손에는 찢어진 옷을 들고, 남은 손으로는 뒷목을 긁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몸에 마력을 일으켰다.
그대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산을 깎아지르기라도 한 듯 텅 빈 훈련장. 크레인이 지나간 듯 땅은 파여 있고, 나무는 뿌리 째 뽑혀 있었다.
그 참변이 일어난 곳에 무심히 손을 뻗었다.
-웅웅!
손끝에서 뿜어진 마력이 모여 땅을 메우고 나무를 일으켰다.
한 번 시든 풀을 자라게 할 수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복구한 셈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무얼 하실 겁니까?]천마의 힘을 물려받는 것은 순조로웠다.
구결에 있어 잘못된 부분이나 사소한 동작까지도 세세하게 체크하고, 여덟 번째 초식 역시 내가 쓰기에는 아직 위험하지만, 사용 방법만큼은 확실하게 익혀두었다.
도원의 경영도 무난무난했다.
발로 뛰면서 이곳의 범죄율은 급감한 상태이다.
‘해야할 거라……. 많긴 한데, 간단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
내가 하는 행동이 현재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신분도 하나 만들어야지.’
내가 이세계에 왔을 때 살고 있던 집. 그리고 신분.
그게 순결의 세계수가 마련해 준 것인지, 과거의 내가 마련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신분을 만들어둘 필요성은 있었다.
특히 대한민국은 모든 시민에 신분증을 만들어 관리하니, 신분은 어느 정도 권력이 있을 때 마련해두는 것이 좋았다.
마침 홍연이 외교 방면으로 연줄이 많기도 해서 도움이 될 테니까.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세계수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해왔다.
‘그래, 너도.’
시간의 세계수와 나는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물리는 사이.
처음에는 불편했던 이 수목도 나름대로 정이 가기 시작했다.
*****
도원에 온 지도 한 달이 지나고도 일주일.
시간이 지날수록 일 처리가 능숙해지고 일정은 비면서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몸의 근육은 이전보다 더 탄탄히 잡혔고. 천마와 싸우다 생겨난 잔 흉터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예전에 부탁받은 신분증이다. 대체 왜 이걸 바라는 건지 모르겠군.”
“고마워.”
“돈이 좀 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지출이 좀 늘었던데. 어찌 된 일이지?”
“그동안 나한테 받았던 거 고스란히 돌려준다고 생각해.”
내가 도원에서 아낀 돈이 얼마인데.
생활비를 제외하면 월급도 받지 않으니, 솔직히 집 한 채 값 정도는 빼도 된다고 생각한다.
“쯧, 그래. 대신 나중에 일이나 제대로 해주거라…… 요즘 잠은 좀 자느냐?”
“어차피 불면증이라, 안 자는게 편해.”
홍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히죽 웃어주었다.
경박한 태도에 홍연의 미간이 좁혀지나 이런 가족같은 직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난 간다.”
“고생하셨습니다 소천마님!”
오늘은 이른 퇴근.
손을 올리며 문을 나서자 도원의 직원들이 하나같이 90도 인사를 해왔다.
깍듯한 그들의 태도에 피식 웃으며 도원의 최상부에서 내려왔다.
불과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이루어낸 일.
덕분에 나는 완전히 소천마로서 많은 이들의 눈에 찍혀버렸다.
이제는 지나가는 길목마다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인사를 해올 지경이다.
“소천마님 안녕하세여!”
“오냐.”
공을 차고 놀던 꼬마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몰려와서 삐약거렸다.
“오늘도 일하시고 나가는 길이세여?”
“그렇지.”
“우와! 멋지다. 저도 소천마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렇게 꼬마들에게 발목이 잡혀 잡담을 좀 나누고 있으면, 등 뒤에서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는 내가 아는 복숭아 자매들 역시 그러했다.
나무의 뒤에 숨어 나를 몰래 지켜보는 백발의 꼬마 아이.
한 번 나와 마주했던 백도는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째릿.
노골적인 시선을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첫날에는 10m정도 벌려져 있던 거리가 하루가 지날수록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5m.
벽이나 나무, 항아리 같은 곳에 잘도 숨으면서 나를 쫓아 오신다.
-저벅저벅.
발걸음을 지속하면 허둥지둥 나를 따라 똑같은 속도로 따라오고.
-뚝.
발을 멈추면 덩달아 멈춰 기색을 감춘다.
오늘은 자기 동생인 황도까지 데려왔는지 두 명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양 손으로 항아리의 뚜껑을 잡고 머리만 빼꼼히 튀어나온 백도.
황도가 그 뒤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백도의 뒷꽁무니를 쫒아갔다.
무슨 이야기나 하는지 들어볼까.
거리가 가까워서 귀를 기울이면 말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백도. 정말 나쁜 사람 맞아?
-날 의심하지마 황도. 저런 사람이 꼭 밤에 어딘가로 새서 나쁜 짓 다 한다니까?
-저 오라버니가 무슨 나쁜 짓을 하는데?
-어, 으음……아무튼 나쁜 짓! 난 오늘 백도 홈즈야. 저 남자의 추태를 찍어서 소천마라는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해.
-백도, 또 추리 소설 봤어?
백도 홈즈. 아이 같은 발상이다.
그 소설이 재밌긴 하지. 시간 때우는데에는 그만큼 재밌는 소설이 없다.
황도의 따분해하는 목소리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백도의 억지 섞인 장단을 맞춰주는 모양이었다.
‘천마 될 생각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불안해졌나?’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또 이런다.
갈수록 커져만 가는 내 입지가 백도에게는 눈엣가시였나 보다.
천도의 미래를 걱정해주는 모습은 참 고마운데, 나를 믿지 못하는 모습은 현재나 과거나 어째 이렇게 딱 맞는지.
나는 샛길로 빠지는 척, 갈림길에서 움직임을 정지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백도를 기다리자. 날 따라 들어온 녀석과 정확히 딱 눈이 마주쳤다.
“헉!”
“왜 따라오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이 굳은 백도.
즉시 그녀는 큰 동물을 상대하는 소동물처럼 최대한 상체를 부풀렸다.
“어, 아니, 그으”
자신이 한 게 나쁜 행동임을 알기는 아는지.
몸을 굳힌 백도는 무어라 변명 거리를 찾다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황도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백도 여기로 간 거 맞아?……앗. 들켰네.”
“씨이. 화, 황도 너 때문이야! 네가 제대로 안 숨어서 그런 거잖아!”
황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엥? 갑자기 왜 탓을 나한테 돌려!”
“왜 숨는 것도 못해? 이상한 잡지는 잘도 숨기면서.”
“이상한 잡지 아니거든?”
백도의 질책에 울컥한 황도가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잡지를 모욕했다는 것에 화가 난 모양.
욕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현실 자매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그 둘을 지켜보았다.
“백도는 만날 잡지만 욕해. 엄연한 취미 생활이라구!”
“그게 무슨 취미 생활이야. 내가 저번에 네가 부탁한 잡지 사다 주면서 다 읽어 봤는데, 하나같이 이상한 말밖에 없었거든! ‘내 수액을 다 빨아 먹어줘~?’ 무슨 수액을 빨아 먹어? 이게 무슨 말이야!”
“이, 이, 이상한 말 아닌데? 그런 상상을 하는 백도가 이상한 거지! 엄청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잡지거든?”
정신이 희미해지는 말싸움이다.
나는 말문을 꽉 닫고 언쟁을 듣다가, 도저히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대체 둘이 뭐해?”
이에 황도가 보란 듯이 내게 말해왔다.
“백도가 오라버니 엄청 나쁜 사람이라고 했어요. 미행해서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읍!”
“야 너 진짜!”
빛 보다 빠른 배신.
백도가 황도의 입을 틀어막더니, 나를 노려봐왔다.
“왜 뭐… 어쩔건데…요.”
자기도 잘못은 아는 모양이다.
“내가 저번에 말했지 않았나?”
“말이랑 행동이랑 다르잖아!… 요.”
백도는 천도를 신경쓰는데, 일단 매일 밤 천도를 보는 내 입장에선 딱히 그런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었다.
어젯밤만 해도 입안 가득 소세지를 먹으면서 프릭큐어의 오프닝을 따라 불렀을 정도니까.
‘말을 꺼낸 적은 있었는데.’
만화나 보면서 슬쩍, 고민이 있느냐고.
말을 꺼내보았지만 천도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아니 뭐 그냥.
-도원 사형. 저는 멀쩡한걸요? 금방 따라잡을 거예요. 그보다 오늘 가져온 만화는 뭐에요?
금방 따라잡아준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실력의 부진함을 신경쓰는 것 같기는 했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어 보이긴 했으나. 아직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설령 그렇다 쳐도 이건 나랑 천도의 문제지.”
“…….”
내 당연한 반문에 백도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분한 감정마저 조절할 수는 없었는지, 볼이 빵빵해지고 입이 댓발 나와버렸다.
눈망울 역시 습기가 어려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몰라!”
결국 고개를 돌려 도망쳐버렸다.
-탁, 탁탁!
강하게 울리는 발 소리. 남겨진 황도를 바라보자, 황도는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뱉는 시늉을 했다.
“으이휴.”
진심이 섞인 한숨이었다.
“죄송해요. 백도는 억지가 심하거든요….”
“너도 고생이 많다.”
척 봐도 말괄량이에 장난기 많아 보이는데. 황도가 많이 어울려 주었을 것이 뻔하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온 뒤로 황도와는 그리 많이 만나지는 않았었나.
의문이 들어 황도를 다시 보니,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천마… 맞죠? 천도랑 같은.”
“일단 그렇지.”
황도는 내 얼굴만 지긋이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백도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에요. 저한테는 나쁜 애지만!”
“그러냐?”
“네.”
너무 백도를 미워하지 말라는 황도의 마음이 뻔히 들여다 보였기에 나는 킥킥 웃었다.
이 아이들의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볼까.
“황도야.”
“우아, 내 이름도 기억해요? 왜요?”
“이렇게 된 거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갈래?”
이에 눈을 동그랗게 뜬 황도가, 벙찐 얼굴로 입을 헤 벌렸다.
“밥…?”
깜빡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며 내 질문을 돌이킨 황도는 헉 숨을 삼켰다.
혹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건 아닐까.
황도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내 허리를 동여맸다.
“이게 그 추파라는 거에요?!”
“아니, 밥만 먹는 건데.”
“힝.”
역시 이상한 상상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