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38
138
자본주의의 왕
윌리엄과 이매망량의 왕이 눈빛을 교환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이 싸울 이유는 없었다. 대기에 들끓던 마력이 사라졌다.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윌리엄이 새로운 안경을 꺼내 쓰며 말했다.
“그건 이놈이 설명할 거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인조 가죽도 입히지 않은 안드로이드는 소리 없이 땅에 착지한 뒤 품위 있게 일어섰다.
“과학의 사도, 직책은 교수를 맡고 있는 김 교수라고 합니다.”
“김 교수? 한국 출신인가?”
“이매망량의 왕이 지구의 일개 국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안드로이드의 표정이 사람처럼 움직였다. 피부만 없을 뿐이지 안드로이드는 다른 부분은 인간과 흡사했다. 다른 점이라면, 인간보다 수백 배 튼튼하고 수백 배 효율이 좋다는 부분 정도다.
“고금제일의 정령사와 검신을 배출한 것만으로도 기억해둘 가치가 있는 나라다. 초월자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둘이나 나온 나라가 몇이나 있지?”
“제 기억에도 몇 없긴 하군요.”
초월자가 된다고 끝이 아니다. 초월자는 분명 일국을 지탱할 정도의 전력이지만, 그 안에서도 급은 명확히 나뉜다. 드래곤 로드가 존경받고 천마가 공포의 상징으로 취급되는 것처럼 말이다.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가죠. 히름의 자본주의 문제를 과학이 해결할 수 있다. 이 말입니까? 애초에, 과학은 이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고는 있습니까?”
쏘아붙이는 태도에 김 교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점은 히름의 자본주의가 사라지면 이매망량의 힘도 약화 된다. 아닙니까?”
믿음의 존재를 거침 없이 입에 담는 김 교수에게 윌리엄이 물었다.
“과학은, 믿음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한 겁니까?”
“그럴 리가요. 공식적으로 믿음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식적으로, 말이군요.”
윌리엄의 표정이 순간적이지만 어두워졌다. 과학의 성인이, 신자들의 마력 실험을 묵인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다. 에너지 수급 기술 대부분을 파기 당한 과학이 기댈 곳이라곤 마력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믿음에까지 이토록 구체적인, 위원회도 파악하지 못한 수준의 추측을 가지고 있다면 과학에 대한 취급을 달리해야 한다.
과학의 패배는 마력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아집을 유지하고도 과학은 근원 세계 전체를 상대로 한 차례 승리를 거머쥘 뻔했다.
그 기술에 마력과 믿음이 결합하기 시작하면 과학이 어디까지 성장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선 단일 세력으로 위원회 이상의 힘을 가질 수도 있었다.
사람의 표정은 많은 걸 나타낸다. 아무리 짧게 스쳐 지나가는 표정이라도, 안드로이드의 눈이라면 모두 읽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혈류의 흐름과 심장 박동, 호흡의 깊이까지도 근거로 사람의 심리를 추측할 수 있다.
고민하는 윌리엄을 보며 김 교수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게 정답일 겁니다.”
“과학의 성장이 예측되지 않는 상황에서, 과학에게 히름을 맡기라는 그 말입니까?”
“히름에서 저희가 취할 건 땅에 묻힌 자원과 인력이 전부입니다. 히름 전체를 관리하는 값에 비하면 적자죠.”
“그리고 과학은 그 적자 사업에서 시작해 세계를 삼켰지.”
대화가 길어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이매망량의 왕은 안개로 의자까지 만들어 앉아 있었다. 그는 살짝 불만스러웠는데, 자신의 안개를 과학이 걷어낸 것 때문이었다. 그조차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해 밀려난 안개는 지금도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힘을 쓰면 가능할 것도 같았는데, 그러면 괜히 과학에게 지는 것 같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와는 모든 게 다릅니다. 저희 기술은 몇 단계나 퇴보했지만, 근원 세계는 과학의 대처법을 숙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절대적인 명령어도 있고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호신입니다. 몸을 지키기 위한 무력을 확보할 뿐이죠.”
“전쟁을 준비하는 놈이 꼭 그런 핑계를 대더군. 내 몸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
이매망량의 왕의 지적에 김 교수가 어깨를 으쓱였다. 윌리엄이 마지못해 말했다.
“차후 위원회가 어떤 압박을 가해도, 그건 과학이 알아서 막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나라 이름도 바꿔주셔야겠습니다.”
그의 목적은 히름의 멸망이지 이매망량의 왕과 생사결을 벌이는 게 아니었다. 미래가 걱정되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김 교수의 말대로, 위원회는 과학을 억제할 수 있다. 과학까지 갈 것도 없이 마스터키를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근원 세계 행성 표면에 남은 모든 과학 기기를 부숴버릴 수 있다.
우주에 있는 우주 함대는 거리상 조금 힘들지만,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다.
과학의 성장이 걱정되는 건 사실이나 위원회는 언제든 과학이 일궈놓은 것들을 부숴버릴 힘이 있다.
“내가 원하는 건 자본주의다. 체제만 유지된다면 관리는 누가 하든 상관없다.”
이매망량의 왕의 입장도 비슷했다. 원하는 게 채워지면, 굳이 위험을 지고 윌리엄과 싸울 필요는 없었다.
“그럼, 본격적인 관리에 들어가기에 앞서 위원회 측에 하나만 양해를 구하고 싶군요.”
“무엇을?”
“감시 체제가 완성되기 전까지, 33일 하고도 8시간 정도 함선 한 대가 히름 상공에 체류했으면 합니다.”
윌리엄은 김 교수의 얼굴을 보았다. 안드로이드의 얼굴에선 웃음밖엔 읽을 수 없었다.
“1초라도 시간을 어기면 바로 격추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르면 일렀지 그보다 느릴 일은 없을 겁니다. 과학의 진리성에 걸고.”
그럼 지금부터입니다. 라는 김 교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르시스타 상공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시보다 커다란 함선에서 빛이 쏘아졌다. 지름 1cm도 안 되는 레이저 수백 개가 도시 전체에 골고루 떨어졌다.
“계급법을 어긴 사람에 대한 처벌을 조금 했습니다.”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에 김 교수가 머쓱하게 말했다.
***
윌리엄과 이매망량의 왕은 돌아갔다. 이매망량의 왕은 안개를 거두고 자신의 숲으로 돌아갔고, 윌리엄은 황족과 귀족을 직접 처단해 히름의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신위의 몰살도 있었다.
12신위 부대는 히름의 상징이다. 히름의 모든 권력자를 죽여도 그들이 살아 있는 한 히름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두 초월자가 맞붙은 여파로 하르시스타에는 커다란 공터가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공터를 주변으로 1번, 2번, 3번 부대 신위들의 시체들이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눈에 보이는 외상이 없었는데, 그래서 더 섬뜩했다.
“저건 어떻게 죽은 거야.”
“심장 마비, 놀라서 죽었어.”
“놀랐다고?”
“옛날이야기의 최종 보스를 본 건데, 심장 마비가 올 만도 하지. 이매망량의 왕은 힘만 센 게 아니야. 그놈은 모든 민담, 괴담의 집합체라고.”
“괴담에 나오는 귀신들의 능력을 모두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에이네가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못 끔찍한 일이다. 괴담에 어디 해괴한 게 한두 개던가. 사람의 상상력이 낳은 괴이한 이야기의 기괴함은 무궁무진했다.
“뭐, 레벨 높은 사람한테는 잘 안 걸리니까 무서워할 건 없고.”
“아니, 쟤들 두 번째 벽을 넘었잖아.”
에이네가 보란 듯이 죽은 신위들을 가리켰다.
“이매망량의 숲과 같은 환경에서 저 정도도 못 하면 왕 자리 내려놔야지.”
“민담에 나오는 귀신들의 힘이라. 안드로이드에게는 어떻게 먹힐지 궁금하군요.”
어느새 옆으로 온 김 교수가 신위의 시체를 분석하며 말했다.
“이성철하고 하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웃돈 주고 사겠다고 했는데, 거절하시더군요. 회귀자라면 돈에 연연할 위치가 아니긴 합니다만.”
“힘으로 뺏으면 못할 것도 없잖아?”
김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회귀자를 건드리는 건 저희도 사양입니다. 다음 회차 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다음 회차…… 과학에 그런 기술은 이제 없을 건데.”
과학의 기술은 시간조차 넘나든다. 과학의 세가 최고에 달했을 때 돌던 소문이었다. 실제로 과학은 몇몇 전투에서 미래를 읽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동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노발대발한 시간의 신자들이 대거 전쟁에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과학이 전쟁에서 패한 후, 시공간과 관련된 기술 대부분이 폐기되었다. 설령 있어도 에너지 문제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는 없습니다. 4차원 관측도 힘든데 시간을 넘본다니 어불성설이죠. 하지만 미래는 모르지 않습니까? 과학은 항상 모든 미래를 열어놓고 있습니다.”
“마력을 인정하는 미래까지도 말이지.”
“그걸 왜 날 보면서 말해? 내가 장담하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마력을 인정 안 해. 자기 이론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일 바에 자살할 놈들이야.”
에이네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마력을 연구하고 있는 과학의 신자들은?”
“그놈들은 정신 오염이 덜 됐으니까. 하, 내 머리를 까서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 사도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 알건데.”
에이네는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검지를 빙빙 돌렸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머리에 있는 자료는 전부 공식적인 것들이란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관리할 도시가 늘어 바빠졌으니 저도 이쯤에서 빠지겠습니다. 이 몸은 적당히 파기해 주시길.”
픽. 안드로이드가 앞으로 쓰러졌다. 에이네는 귀찮아하면서도 안드로이드를 아공간 주머니에 챙겼다. 사도의 의식을 담을 수 있게 설계된 안드로이드다. 안에는 버리기 아까운 귀한 합금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히름은 무너졌고, 이제 뭐해?”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그런데 뭐 하다 왔냐?”
“투기장. 빌어먹을 교수 때문에 시상식에도 참석 못 하고 왔지만.”
상금이 어쩌니 귀족이 어쩌니 에이네가 꿍얼거렸다.
“아, 맞다. 그리고 또 누가 나한테 왔었는데. 반군에 초대하고 싶다나 뭐라나.”
“누구였는데?”
“몰라. 인상이 희미한 남자였는데.”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어, 그래. 그 사람.”
에이네가 홀로그램으로 보여준 사람은 현에게 왔던 그 남자가 맞았다.
“반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는 안 꺼냈어?”
“전혀. 히름이 마음에 안 들 때 즈음 찾아오겠다고 하던데.”
인지도 이야기는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떠벌리고 다닐 말이 아니긴 했다.
“그럼 그쪽으로 찾아가. 반군 안에서 합류한다.”
“기껏 구해놓고 다시 반란?”
“경우에 따라선 그것도 고려해봐야지.”
막 주인이 바뀐 히름이다. 과학이 히름을 장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고, 그 시간은 반군에게 절호의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인지도라는 능력은 강력하다. 하지만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 능력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조사를 위해서라면 현은 기꺼이 반군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차피 성공 못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과학이다. 과학이 ‘관리’를 하겠다고 했다.
어쭙잖은 반군이라면 즉시 토벌될 것이고, 일부러 남겨둬도 된다. 외부의 적으로 내부의 단결을 꾀하는 건 예로부터 쓰여 온 전술이다.
“또 뭔가를 물고 왔나. 내가 할 일은 뭐지?”
이성철이 말했다.
“스파이. 주식 안 팔았으니까. 너 아직 계급은 그대로지?”
“과학이 계급에 손대지 않는다면 그럴 거다.”
“성가신 능력이 있어서 한번 실험해보고 싶거든. 상류층을 한 번 쥐락펴락 해줬으면 하는데. 할 수 있겠지?”
“정보만 충분하다면.”
이성철은 에이네를 보았고, 에이네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력과 재료, 그리고 공임만 주셔.”
“에누리는?”
“돈만 받는 걸 다행으로 알아.”
가벼운 농을 끝으로 세 사람은 각자 할 일을 위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