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58
158
일 년에 한 번 오는 그 날.
윌리엄에게 죽은 전대 투신의 성인은 무력만 앞세운 극단적인 무투파였다. 그래서 그는 윌리엄의 집요한 괴롭힘 끝에 죽었다.
전대 투신의 성인이 죽고 오르가가 새로운 투신의 성인으로 뽑혔을 때 누가 윌리엄에게 물은 적이 있다.
‘새로운 투신의 성인도 죽일 수 있겠냐?’
윌리엄은 대답했다.
‘나에게 목숨이 3개쯤 있다면 가능하다.’
힘의 차이가 3배라는 뜻이 아니다. 계략을 사용해 투신의 힘을 빼는 과정에서 세 번쯤 자신이 꼬리를 잡혀 죽을 거라는 의미였다.
투신의 신자는 전투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권능으로 가진다. 공간이동이 가능하고 광역 버프, 디버프가 가능하다. 싸움에 관련된 권능들은 말할 것도 없다. 투신의 권능은 만능에 가깝지만, 극한은 아니다.
권능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극에 닿은 하나는 없다. 그게 투신의 권능에 대한 평가다.
그리고 전대 성인과 달리 오르가는 다양한 권능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강풍이 불어 날벌레들을 날려 보냈다. 만 자리 숫자의 날벌레를 한곳에 모은 강풍은 회오리가 되어 하늘로 길게 뻗쳤다. 하늘로 올라간 오르가는 회오리를 내려다보며, 그 중앙을 향해 주먹을 질렀다.
회오리가 한 번에 사라지며 그 안에 휘말려 있던 날벌레들이 한 번에 터져나갔다. 착지한 그가 땅을 찍으니 땅에서 거대한 바위가 튀어나왔다. 오르가가 바위를 걷어차자 깨부숴진 바위 파편이 전차처럼 땅을 기는 거대한 애벌레들에게 틀어박혔다.
조율의 신자들이 현실을 왜곡해보려 했으나, 그들의 권능보다 오르가의 공격에 담긴 힘이 더 강력했다. 간단해 보이는 동작 하나하나에 투신의 성인은 적게는 세 개. 많으면 열 개가 넘는 권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신자들의 권능으로 막을 힘이 아니었다.
오르가는 싸울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을 상대로는 최선을 다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건 전투에 한해서이다. 자기 집을 뒤엎으러 온 무뢰배를 살려 보낼만큼 오르가는 위인이 아니다.
조율의 신자와 역병의 신자는 핏물이 되어 흙에 묻혔다.
***
현은 세상에 꽂아놨던 깃발을 뽑았다. 동시에 세계를 밀어내고 있던 의지 또한 거둬졌다. 현은 주저앉아 코피와 땀을 닦았다.
‘사흘은 꼼짝도 하면 안 되겠어.’
믿음의 강도를 조절하는 건 시간을 들여 천천히 해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다. 각성제의 힘을 빌려 억지로 믿음을 강화한 부작용은 각성제의 부작용과는 별개로 현을 따라왔다.
채 약화되지 않은 믿음이 현의 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죽일 놈이 모두 사라지니, 자신을 죽일 놈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현의 의지가 현 자신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이 서 있는 호르카에게 물었다.
“유령은 찾아봤나?”
“유령 말입니까?”
“아닌가 보군.”
유령의 은신은 교묘했다. 범인이 유령이라고 특정하고 찾지 않으면 보고도 지나쳤을 것이고, 현도 믿음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하거나 찾는 데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주술사들이 주술의 매개로 유령이나 원령을 쓰는 건 흔했고, 투신의 땅에서도 심심찮게 유령을 볼 수 있었으니까.
“범인이 유령이란 말씀이십니까?”
“진범인지, 아니면 매개체인지. 그걸 알아봐야지.”
마침 이성철이 유령을 끌고 왔다. 트롤 유령은 이매망량의 실에 묶여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매망량의 왕은 소모된 백을 순식간에 채워줄 정도로 혼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 능력은 이매망량의 왕이 자신의 일부를 떼어 만든 이매망량의 무기에도 이어졌다. 트롤은 처음 잡혔을 때보다 훨씬 힘 빠진 모습이었다.
“말은 걸어봤고?”
현이 이성철에게 물었다.
“실을 풀어주면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하더군.”
“풀어라.”
조율과 역병을 모두 정리하고 돌아온 오르가가 말했다. 땅이 흔들리는 전투를 벌이고 왔는데도 그는 땀 한 방울 흘리고 있지 않았다.
“풀면 도망갈 텐데.”
이매망량의 실이니 유령을 잘 묶고 있지. 유령이 가진 힘은 작지 않았다. 대주술의 매개로 쓰이거나 주술사 가문의 수호령이 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은 나다.”
“그래, 까라면 까야지. 협박당해 끌려온 입장에서 뭘 하겠어.”
현이 실을 풀었다.
-잘 있어라! 멍청한 놈들!
획 하고 유령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하고 현이 이매망량의 무기를 쓰려는데 오르가가 돌연 허공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손을 빼니 그 손아귀에는 유령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유령에게 오르가가 명령했다.
“멈춰라.”
말에 담긴 기묘한 울림. 단순한 권능의 행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현은 저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뤼필에게 배우면서 딱 한 번 들어봤던 울림이다. 바로 종족의 언이다.
-크크크! 세뇌 같은 걸로 내 자유 의지를 억압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날 성불시켜라!
하지만 트롤 유령은 종족의 언에 전혀 영향을 받는 모습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오르가를 비웃기까지 했다.
종족의 언은 몸과 영혼에 새겨진다. 그러니 영혼이라 하더라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투신의 성인은 참으로 전사답게 움직였다. 일단 트롤 유령을 주먹으로 팼다. 마력도 없는 맨주먹이었지만, 그 주먹에는 마력보다 무서운 권능이 떡칠해져 있었다.
-크억!
그것도 유령에게 치명적인 권능들이. 주술사와 죽음의 신자들과도 싸워야 하는 투신의 신자들에게 영체를 때리는 권능 하나 없을까.
오르가는 트롤 유령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는 막무가내가 아니었다. 엄연히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도출한 답으로 유령을 때리고 있었다.
아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적군 스파이를 잡았다. 이쪽은 적이 단수인지 복수인지, 목적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선택은 하나다.
잡은 스파이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뜯어낸다. 고문은 정보를 얻어내는 데 따라오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이게 뭔 일이야?”
오르가의 싸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한발 늦게 도착한 에이네가 말했다. 강 중에서도 극강을 추구하는 에이네에게 있어 노련하게 힘으로 상대를 박살 내는 오르가의 싸움은 귀중한 데이터였고, 그걸 다각도에서 저장, 분석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행동하는 본인이 제일 잘 알 테니 본인한테 물어.”
“인질을 고문하는 중이다.”
-이게! 어디가! 고문이야! 그냥! 쥐어패고! 있잖아!
작은 바위 같은 주먹에 얻어맞으며 할 말은 따박따박 하는 걸 보면 유령이 되어도 트롤은 트롤이었다.
오르가의 주먹에 담긴 힘이 더 강해졌다. 투명한 몸이 희미해져 사라질 지경이 되자 트롤 유령이 소리쳤다.
-그만! 항복! 항복이다. 이 지독한 놈! 그래도 내 짬밥이 얼만데 젊은 놈이 선배 대우를 이따위로 해!
“난 투신의 성인이다.”
그리고 투신의 성인은 모든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의 정점이다.
헤… 트롤 유령이 입을 벌렸다. 그리곤 고개를 거세게 털어냈다.
-투신의 성인은 게오그란데 아니었나?
“그놈은 죽었다. 인간 하나에게.”
-어떻게! 그 전사 중의 전사가 고작 인간에게!
“말해야 하는 건 그게 아닐 텐데.”
오르가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유령의 영체가 더욱 투명해졌다.
-묘슈한! 나는 대주술사 묘슈한이다! 물어봐라! 날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은 있을 거다!
트롤 유령이 몸을 비틀었다. 영혼이 소멸할 지경이 되자 진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오르가가 호르카에게 눈짓했고, 호르카가 사라졌다. 오르가는 묘슈한의 머리통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에이네가 이성철에게 귓속말했다.
“저거 무거울까?”
“아니. 그래도 대주술사의 영혼이라면 무게를 조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진짜 저 유령이 범인인가?”
“아마도? 본인도 찔리는 게 있으니 저러고 있지 않겠어.”
완전히 드러누운 현이 대답했다.
호르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용병단의 단주급들이 묘슈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대 투신 휘하에 있던 대주술사가 맞습니다.”
놀란 건 묘슈한이었다. 그가 통나무만한 팔다리를 휘저으며 소리쳤다.
-뭣이라?! 나는 과학과의 전쟁에서 한 축을 담당하던 대장군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모두, 묘슈한은 과학과의 전쟁이 끝나고 일어난 혼란기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10년도 더 된 일입니다.”
-10년…?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군. 그전에.”
오르가가 주먹을 올렸다.
-이, 이만하면 된 거 아니냐?
“투신의 성인에 대한 예를 갖춰라. 그리고 나는 아직 입을 연다는 말을 받아내지 못했다.”
묘슈한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오르가의 주먹이 묘슈한을 두들겼다. 묘슈한은 영파를 이용해 의도를 전달한 후에야 겨우 무자비한 폭력에서 벗어났다.
묘슈한을 고분고분하게 만든 후,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 오르가가 한발 물러섰다. 호르카도 그에 한 발 빠졌다. 딱 자신이 할 일만한다. 오르가가 영악한 점이었다.
현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고, 에이네에게 권능과 관련된 대화는 무리였다.
소거법으로 대화는 이성철의 몫이 되었다.
“용병들을 나태하게 만든 건 당신이 맞다는 거군.”
-그들에게 진짜 인생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 끝에 있는 게 참수였나?”
-너희 인간들은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곧잘 떠들더구나.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들어서는… 그때는 그럴 때기도 했다. 지구인의 특수성이 밝혀지고 지구에 과학이 발전했다는 게 알려지자 능력 있는 지구인들이 대거 등용됐을 때였다.
이성철은 그때 근원 세계에 없었지만, 당시의 인사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기록으로 알고 있었다.
입만 잘 터는 무능한 인물이 터무니없는 위치까지 출세해 군대를 말아먹을 뻔한 기록 몇 개는 그 혼란의 역사에서도 중요 자료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성철은 본격적인 질문에 들어갔다.
“어떻게 유령이 권능을 사용하는 거지?”
-권능은 원래 영혼에서 나온다. 영혼이 써도 이상할 건 없지.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다.”
-보아하니 네놈도 짬밥 좀 먹은 것 같은데, 근원 세계에서 예외가 나오는 건 이상할 것도 없다는 건 알 거 아니냐.
한 마디도 곱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묘슈한을 보고 현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의 근처에 두 명 정도, 정확히는 한 사람과 한 안드로이드 정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왜, 왜. 뭘 봐?”
“아무것도 아니다.”
한 마디가 아니라 시선 하나도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최후의 안드로이드만 아니었어도…….
“당신은 10년 정도 기억의 공백이 있는 것 같군.”
-거기까지만 말해도 된다. 뭘 묻고 싶은지 다 알 것 같으니. 과학의 화신이 죽고 승기가 기울었을 때였다. 그걸 기점으로 상당수의 초월자들이 전장을 이탈해 고향으로 돌아갔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공간이동으로 한 번에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새삼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래서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묘슈한에게 유희라는 걸 가르쳐줬다. 술과 마약, 그리고 도박. 묘슈한도 향락이 뭔지는 알았다. 전사들에겐 쉬는 것도 일이다. 투신의 휘하에도 유희를 즐기는 사람은 있었지만, 푹 빠져 사는 사람은 없었다.
묘슈한은 자신이 배운 유희를 남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다 기억이 끊어졌고, 현에게 잡히며 정신을 차렸다.
“…… 하나만 묻지.”
누워 있던 현이 몸을 일으켰다. 현은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묘슈한에게 물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프라그하. 그녀 또한 뛰어난 주술사였지.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술꾼이며 도박사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