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14
214
꿈.
세계의 끝에 드래곤들이 모였다. 지평선이 없는 초원, 드래곤 로드 홀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그 장소에 수만의 드래곤이 날개를 접고 앉았다. 헤츨링을 제외한 모든 드래곤이 모인 건 대전 때도 없었던 일이다. 그때는 최악을 대비해 일부 드래곤들이 헤츨링을 돌보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강제 성장 마법으로 헤츨링을 일제히 전력으로 만들 계획까지 가지고서.
이번처럼 순수한 회의를 위해 모인 건 역사에도 몇 번 없던 일이었다.
근원 세계의 총인구는 과학이라도 측정 불가능하다. 요정의 탄생은 규칙성이 없었으며,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은 그 목숨이 바람 앞 촛불과 같아 죽고 태어나는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소환자들은 그야말로 갑작스레 나타난다.
고무줄처럼 늘고 주는 터라 근원 세계의 인구를 파악하는 건 드래곤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최소로 잡아도 수백억 단위에 육박하는 인구수에 비하면 2만 남짓한 숫자의 드래곤은 너무 적었다. 그래서 드래곤은 항상 바빴다.
드래곤 로드의 근처에는 열 명의 드래곤이 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마법의 사도였다. 마법의 상징인 드래곤이 마법의 사도 자리를 차지하는 건 한편으로 당연했다.
“로드, 이 소집이 뜻하는 바는 역시 그것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묻는 그대도 이유를 알고 있을 텐데. 이 전쟁은 재앙이 아니다. 단순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이다.”
“하지만 그 규모는 이미 재앙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재앙은 아니지.”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로드가 마력을 방출했다. 드래곤 로드, 드래곤이 모든 생물의 정점이라면, 드래곤 로드는 정점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생물이다.
평야 끝까지 퍼져나간 마력에 모든 드래곤이 입을 다물었다.
“규칙에는 예외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드래곤의 규칙에 예외란 없다. 한 번의 예외가 불러온 참사를 모르는 자가 여기 있는가?”
“없습니다.”
바벨 이후 쭉 드래곤은 세계의 수호자를 맡아왔다. 드래곤은 역사의 뒤에서 묵묵히 수호자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딱 한 번 드래곤이라는 종족 전체가 잘못된 선택을 내린 적이 있다.
네 번째 재앙, 마법이 발호했을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드래곤 중 하나가 화신으로 선택됐고, 다수의 드래곤이 마법의 신자가 되었다.
시간의 재앙 이후 드래곤들은 지배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시간은 말 그대로 시간의 흐름을 휘둘렀고, 그건 드래곤들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기적처럼 시간에게 승리하긴 했지만, 시간은 겨우 세 번째 재앙에 불과했다. 드래곤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재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힘을 합쳐야 했고, 그를 위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드래곤들이 생각한 구심점은 드래곤이었으며 그 끝에 있는 자는 드래곤 중의 드래곤인 드래곤 로드였다.
마법의 화신이 된 드래곤에게 대응하기 위해 드래곤들은 로드를 뽑았다. 그리고 로드를 중심으로 드래곤이 모든 종족을 힘으로 통치했다.
드래곤들은 마법의 화신을 상대로 승리했다. 그리고 압제의 대가를 받았다.
반수가 넘는 드래곤이 사냥당했고, 당대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의 개체수를 제한하고 수호자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조약을 바벨에 진리로 새김으로써 종의 멸종을 막았다.
모든 드래곤이 필수적으로 교육받는, 드래곤이라는 종족 전체의 흑역사이자 지울 수 없는 치부였다.
네 번째 재앙 이후 드래곤이 세상사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일부 별종을 빼면.
“그러면 어째서 그걸 묻지?”
“정신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능이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습니다. 이건 이미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빠른 조치가 필요 합니다.”
사도들을 필두로 한 드래곤들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대답도 단호했다.
“정신의 화신이 관측되었나?”
답하는 드래곤이 없었다. 드래곤이 한 사태를 재앙으로 간주하는 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재앙의 화신이 나타나고, 화신이 세력을 형성하면 그게 바로 재앙이다.
정신의 화신은 여태 나타나지 않았고, 정신이 세력을 이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 규칙 때문에, 과학과의 대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기술을 발전시킬 시간을 주지 않았다면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습니다.”
“과학이 재앙이 아니었다면, 새로운 기술 하나를 매장시키는 결과를 낳았겠지.”
둘 다 맞는 말이었고, 그래서 정답이 없었다. 정답이 필요한 사안에서 정답이 없는 주제로 논쟁하는 건 비생산적이었다.
대화가 멈췄다.
“드래곤은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건 로드로서의 명령이다.”
로드의 결정은 통보였고, 반론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의 끝을 가득 채우던 드래곤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모든 드래곤이 사라진 세계의 끝에 로드 혼자만 남았다. 로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계의 끝. 진리와 가장 가까운 장소. 역대 드래곤 로드들이 지켜 온 진리로 이어지는 길.
이 자그마한 세계 안은 로드의 영향권이다.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근원 세계에서도 로드의 허락 없이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자는 없었다.
“마지막 조건이 맞춰졌군.”
“조건은 아직 조건일 뿐이죠. 길을 열어가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선이 이곳에 있는 것 또한 분명 로드의 뜻이었다.
***
“실험이요?”
엘로렌은 자신과 인연이 없는 단어를 듣고 의문을 표했다. 에이네가 엘로렌에게 말했다.
“밈으로 내 술법을 무효화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건 그냥 못해요. 술법은 체계가 있으니까. 마법도 마찬가지. 그 둘은 분명 밈이지만, 발동 과정에 밈이 개입하지는 않아요.”
“그건 대충 아는데, 특별한 술법이라면 모르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밈이 주술을 무효화 할 수 있는 건 그게 밈으로 이루어진 정신을 기반으로 발동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정신 내부에서 이론을 쌓아 올려 발동하는 술법과는 다르다. 이건 마법에도 해당하는 사항이며, 그렇기에 밈은 술법과 마법에 간섭할 수 없다. 그것들의 근본이 되는 밈을 바꿔도, 마법사와 술법사 안에서 이미 마법과 술법의 이미지가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 번 해봐.”
엘로렌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녀는 발동하는 기술의 기반이 뭔지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무공과 과학만 사용하던 에이네가 보여주려는 술법은 무엇일까?
“준비됐어요.”
“그럼 간다.”
에이네가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피 대신 사철이 새겨져 있다는 것만 빼면 그건 훌륭한 부적이었다. 에이네가 부적을 던졌고, 움직임에 맞춰 엘로렌이 권능을 사용했다.
파직. 부적에서 한 차례 번개가 튀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죠?”
에이네가 사용한 건 마법이면서 술법이고, 주술적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엘로렌도 처음 보는 종류의 기술이었다.
“내 입으로 내 밑천을 까발리라고?”
에이네는 부적을 회수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엘로렌도 입을 다물었다. 남의 기술에 관해 묻다니, 사람에 따라선 칼부림으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을 질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현이 부적을 고치고 있는 에이네에게 다가갔다.
“술법은 언제 배웠어?”
“자칭 내 사부한테.”
“이선?”
전에 로테와 이선을 에이네의 가정교사로 붙여줬을 때, 이선이 에이네를 제자라 칭한 것이 기억났다. 곤륜에는 무당파가 있다. 우가혁의 무공 수집에 어울릴 때 곤륜에 잠깐 머무르며 곤륜에 대해 몇 가지 들은 게 있었다. 그 특이한 제자 문화에 대해서도.
‘그거 때문에 배분이 너무 꼬여서 무당파에서도 배분 문제를 포기했다던가.’
일흔 노인이 스물 청년에게 사형이라 부르고 장문인이 막 입문한 제자보다 배분이 낮아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그냥 나이순으로 고쳐버렸다고.
무당만이 아니라 곤륜에 터를 잡고 집단을 이룬 문파 대부분이 그랬다.
“사부로 인정은 안 했어도, 유용한 지식을 받았으면 유용하게 써먹어야지.”
사철로 부적을 수리한 에이네는 부적을 햇빛에 비춰보았다. 빛이 투과되는 종이 안에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회전하고 있었다. 현도 처음 보는 형태의 부적이었다.
“밈에 걸릴 정도면 실전 활용은 조금 더 걸리나.”
에이네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쩔 거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현은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바로 알지 못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김우현.”
현이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보자, 젭크가 유감이라는 듯 자신의 일행을 보았다. 엘로렌과 로한이 항의했지만, 젭크는 무시했다.
“저 둘은 계획성이란 게 없다. 로한은 전투, 엘로렌은 권능. 자잘한 일들은 주로 내 일이었다. 숙박 계획 같은 것들.”
“그 얼굴로 말하면 농담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진심이다.”
젭크가 대책 없는 이인조를 보았고, 대책 없는 이인조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지?”
휘헌을 포함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에이네를 뺀 나머지가 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현은 그들의 기대에 답해줄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없어.”
“뭐?”
“전쟁이든 전투든 시작은 이해득실이나 감정적 관계다. 따질 이해득실도 없고, 해소해야 할 감정적 관계도 없는 나는 그럼 뭘 해야 하지? 없는 원수를 만드나? 자랑은 아니지만, 되살아나고 나서 내가 내 의지로 움직인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도 안 돼.”
현의 행동은 항상 수동적이었다. 되살아난 직후에는 몰라서 그랬고, 그 후에는 능동적으로 움직일 이유가 없기에 그랬다. 현이 자기 의지로 움직였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몸에 연결된 65개의 추적술을 없앨 때.
그걸 제외하고 현은 먼저 움직인 적이 없었다. 모두 사건이 일어나거나 사건의 단서가 주어지고 나서부터 행동을 시작했다.
젭크가 짜증 반 황당함 반으로 물었다.
“그래서, 일이 터질 때까지 가만있겠다는 소리인가?”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어. 얼마나 퍼질지,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전쟁에서 초반부터 힘 빼서 뭐하게?”
현은 아예 자리에 드러누웠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윌리엄이 세계 대전을 언급했다. 세계 대전이 어떤 것인지 아는 지구인이 그 말을 했단 말이다.
과학과의 전쟁은 대강 15년 정도 이어졌다. 마신과의 전쟁은 초동 대처가 좋아 2년 안에 끝났지만, 대가로 북대륙 문명이 사라졌다.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수백억 인구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
그건 틀림없이 현이 경험한 적 없는 종류의 대전이다. 그 앞에 기다리는 것 또한, 경험한 적 없는 것이겠지.
조급해하면 지는 거다. 조금씩, 확실하게 꼬인 매듭을 풀어가는 게 중요하다.
피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익숙한 바람이었다.
***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고, 익숙함은 지루함으로 탈바꿈한다. 몇 개나 되는 루프를 클리어했을까. 10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성철에게 루프는 지겨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려달란 사람도, 피 묻혀가며 싸우는 자신도. 모두가 지루했다.
“좀 더 잘 처리할 순 없었나?”
“루프는 해결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너라면 세 명은 더 살릴 수 있었을 거다!”
“그 대가로 내 마력을 낭비했겠지.”
이런 대화도 익숙함을 넘어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아키아는 늘 그에게 최선을 요구했다. 그녀의 최선이란 더 많은 사람의 생존이었다. 하지만 이성철의 최선은 효율이었다.
최선의 충돌로 아키아는 항상 이성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이성철은 지겨운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다음으로 가시기 전에 잠깐 주무시겠습니까?”
“그러지.”
메시스의 제안에 이성철이 몸을 뉘었다. 밤이지만, 피곤하지는 않다. 루프 안에 들어가면 밤과 낮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된다. 그래도 잠을 취하는 건, 최근 꾸는 꿈 때문이다.
매연 가득한 공기와 신발 너머로 느껴지는 아스팔트의 감촉. 꼭 쥔 왼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이성철이 눈을 떴다.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그리움마저 삶의 풍파에 녹아 사라져 딱딱한 감상밖에 나오지 않게 된 공간.
‘다시 여기군.’
꿈속에서 이성철은 지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