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33
33
광신의 재능
묘인, 호인虎人, 오크, 고블린, 리자드맨에 엘프, 심지어 마신의 권속인 마족까지. 황야의 팔레트에는 없는 종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에이네는 눈이 핑핑 돌았다. 색다른 문화에 처음 보는 종족들까지. 고양이보다 한술 더 뜨는 그녀의 호기심은 지칠 줄 몰랐다.
“그러다 싸움 난다.”
보다 못한 현이 에이네를 말릴 정도였다. 호기심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건 어떨지. 척 봐도 초행으로 보이는 에이네를 대부분은 훈훈한 얼굴로 봐주고 있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뭘 꼬라보고 있어?”
에이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남자의 등 뒤에 있는 건물이 신기해 보고 있었을 뿐. 지나가던 오크 하나가 그녀에게 시비를 걸었다. 오크라 단정하기도 힘들었다. 삐죽 튀어나온 어금니와 큰 덩치는 영락없는 오크였지만, 오크는 전신을 덮을 만큼 체모가 많지도 않고, 또 머리 위에 귀가 달려 있지도 않았다.
하프오크, 오크와 수인의 혼혈이었다.
“뭐야? 어디 구경났어?”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맹수와 같은 울림에 행인들이 슬슬 자리를 피했다.
‘유명한 놈인가.’
눈에 띄는 외견에 호전적인 오크의 성향, 시비도 많이 붙었을 것이라고 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건 저 오크가 그만큼 강하다는 이야기.
성큼성큼 다가오는 오크를 보며 에이네가 현에게 물었다.
“저거, 어떻게 해?”
“음.”
애매했다. 에이네가 먼저 종족 차별을 했다면 적당히 싸워주라고 했겠지만,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어온 이상 봐주는 건 없다. 그렇다고 죽이는 건 또 꺼려졌다. 윤리 때문이 아니라 귀찮음 때문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딱 받은 만큼만 돌려주라는 말에 에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이 선택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을 뿐.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한 도시에 오자마자 쫓겨나거나 구금당하는 건 에이네도 바라지 않았다. 다짜고짜 나갔을 주먹을 참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뭐라 씨불이는 거야. 종족 차별로 일어난 싸움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 알고 있겠지?”
오크의 몸에서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현도 에이네도 오크에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최후의 안드로이드. 성질 더럽고 마법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반푼이라도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오크가 마력이 가득 담긴 주먹을 질렀고, 에이네는 그걸 한 손으로 막은 다음 똑같이 오크에게 한 방으로 돌려주었다. 오크가 주먹에 담은 마력과 똑같은 양의 마력을 담아. 콰앙! 오크가 길 끝까지 날아가 뒹굴었다.
“죽였냐?”
“장기 몇 개가 터지는 것 같기는 했는데.”
“오크에 수인 하프면 죽지는 않겠네. 양쪽 다 끈질기기로 소문난 놈들이니까.”
일상이라는 것처럼 두 사람이 돌아서자, 내빼던 행인들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거리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일상이라는 것처럼, 현과 에이네는 짧은 산책 동안 비슷한 광경을 두 번 더 마주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수인이 엘프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냈고, 한 번은 고블린이 깔끔한 솜씨로 리자드맨을 독으로 중독시켰다.
돈 걱정 없는 현은 적당한 고급 여관을 잡았고, 둘은 여관 일 층에 대충 자리 잡았다. 이름은 여관이지만, 그 밖과 안은 여관보다는 지구의 호텔에 가까웠다. 둘이 앉은 자리는 호텔 로비에 마련된 작은 카페인 셈이었다.
“저기 또 싸운다.”
에이네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흑인과 백인이 서로 죽일 기세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종족 차별에 죄를 묻지 않으면, 인종 차별은 어떻게 되는 거야?”
“똑같아. 종족이나 인종이나.”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극단적인 것 같은데.”
“이렇게라도 해야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지구라는 작은 동네에서도 피부색 가지고 전쟁까지 일어나는데 종족이 다른 근원 세계의 종족 차별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동맹의 분위기를 흐리는 놈들을 일일이 잡아 족치기에는 인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온 게 종족 차별로 인한 살인은 무죄라는 규칙이었다. 억척스러운 규칙이지만 약간의 효과는 있었고, 그게 과학과의 전쟁이 끝나고 암묵적인 세계 공통법이 되었다.
“오, 흰 놈이 이겼다.”
싸움에서 이긴 백인이 뭐라 뭐라 외쳤지만 그는 갑작스레 뒤에 나타난 트롤의 주먹에 머리가 터져 죽었다. 차별에 의한 싸움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누구도 트롤을 나무라지 않았다. 한 명의 차별주의자가 죽었다. 그뿐이었다.
“스펙타클하다고 할까. 카오스하다고 할까. 신서울하고는 다르게 엄청 야만적이네.”
시체를 보며 비위도 좋게 음료를 마시는 에이네에게 현이 대답했다.
“괜히 다양성의 도시가 아니니까. 종족이 많으면 차별도 많을 수밖에.”
그 자리에서 차별주의자 백인의 시체를 짓이긴 트롤이 친구로 보이는 흑인의 시체를 들고 사라졌고, 인간의 형상을 찾을 수 없는 핏덩이를 초록색 옷을 입은 청소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청소했다.
그 혼란한 광경을 보며 현은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듯한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고 무슨 일도 벌어질 수 있는 세상, 근원 세계. 이게 이 세계의 일상이었다.
***
호텔을 가장한 여관은 객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10층짜리 여관 꼭대기, 영화처럼 한 면이 통짜 유리로 된 거실 벽에 붙어 에이네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정은 또 그대로야? 적당히 수련하다가, 우리 위치를 적당히 흘리고, 그다음 도주.”
“커다란 변화가 있을 때까지는 그게 최선이지.”
머리가 좋지 않은 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현은 이 방법을 그렇게 악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공간이동은 잔존 마력만 지워지면 추적이 불가능한 마법. 수천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던 추적법이 생겨나지 않는 한 유용한 방법이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암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만 버티면 된다. 현은 제법 자신 있었다. 혼자라면 모르되 그에게는 최후의 안드로이드가 있었다.
“신서울에서처럼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서너 달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도시 구경할 시간도 꽤 생길 테고.”
“어, 음…….”
에이네가 좋아할 것 같은 말을 해줬지만, 정작 그녀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에이네는 어이없음과 떨떠름함이 반씩 섞인 얼굴로 창밖 아래를 가리켰고, 현이 일어나 창으로 다가갔다. 에이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회귀자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거리를 가로지르는 이성철이 있었다.
현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져, 에이네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지긋지긋하다, 진짜.”
“음, 직접 보는 건 두 번째지만, 나도 앞으로 지긋지긋해질 거 같아. 저거 위에 인공위성 띄워버릴까? 감시 전용으로.”
“초고화질 위성사진을 구하는 거 보면 과학 쪽으로도 끈이 있을 거야. 안 하는 게 좋을걸.”
“회귀자라 죽일 수도 없고. 아으, 짜증나.”
평화로운 일상의 종말이 길 건너 인파로 섞여드는 것을 보며 에이네는 짜증 잔뜩, 불만 잔뜩, 분함 약간을 담아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건 현도 비슷했다.
‘사건이 일어날 걸 아는 이상 그냥 도망갈 수도 없고.’
하아. 믿음 때문에 도망도 허락되지 않은 현이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 도망쳤다간 자신의 믿음이 자신을, 현을 죽일 놈으로 만들어 힘을 빼앗는다. 평소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 약화는 역병의 사도와 싸우기 위해 믿음을 강화해둔 현에게는 강하게 작용했다. 도망가려는 생각만으로 마력 대부분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일단 믿음부터 원래대로 돌려두자.’
투덜투덜, 터덜터덜 침대로 가 가부좌를 튼 현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
“빌어먹을 회귀자.”
이성철을 저주하며 현은 눈을 감았다.
아무리 신기한 게 있더라도 3시간 동안 같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 질리기 마련이었다. 에이네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현의 주변을 서성였다. 현이 나가도 좋다고 한 적이 없으므로 스스로 밖에 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현에게 말을 걸었다.
“또 해? 대체 뭘 하는 거야?”
“내 믿음이 별거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중.”
기대하지도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에이네의 걸음이 사뿐사뿐에서 깡충깡충으로 변했다.
“왜? 믿으면 좋은 거잖아?”
“개새끼는 죽어야 한다고 광적으로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자기가 개새끼라는 걸 알았다.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현의 정신은 반면반성半眠半醒의 상태에 있었다.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에이네의 질문에 나직하니 답했다.
에이네는 척, 재주 좋게 발끝으로 멈추더니 머리에서 정보를 찾았다. 그리고 답했다.
“인지부조화를 일으켜 자신이 개새끼는 아니라는 억지 믿음을 형성하거나, 아니면 그냥 자살하나?”
“그래, 그렇게 되겠지.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이 틀린 게 되어버릴 테니까. 내 신념도 살짝 비슷해서 말이야.”
현은 자신의 좌우명이며 신념인 믿음을 강하게 믿을 수 없다. 그래선 안 된다. 현 스스로가 자신을 죽일 놈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이 생각하기에 자신보다 더한 놈을 상대할 때는 괜찮지만, 다른 모든 생활에 족쇄가 걸린다.
그래서 현은 신념을 가짐과 함께 자신은 그 신념을 믿지 않는다는 믿음을 함께 가졌다. 그 인지부조화가 정신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믿어 버리면 죽거나 내 믿음에 내가 당하는 꼴이 되거든.”
“그 믿음이 뭔데?”
“죽일 놈은 죽이고 죽을 놈은 죽는다. 하나 추가 하면 살 놈은 살아야 한다?”
에이네는 그 말을 분석, 하나의 답을 내놓았다.
“요컨대, 너는 죽일 놈이다?”
“그래, 내 믿음을 고수하면 난 내 믿음에 깔려 죽을 테니까.”
“그딴 걸 왜 믿어?”
발끝으로 재주 좋게 균형을 잡고 있는 에이네를 보며 현은 쓰게 웃었다. 정말로 왜 그랬을까. 믿음이 힘이 된다면, 좀 더 부작용 없고 강력한 것들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믿음에 대해 몰라서? 아니다. 그 전에도 현은 믿음의 힘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원인이 있다면 아마…….
‘스승님.’
달리 영향을 받을만한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을 마음으로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아마 로망이 아니었을까.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되었다면 좋겠다는 어린 치기.”
그러나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권선징악은 없다. 세계는 힘의 원리로 회전하며, 회전의 방향에 선악은 없다. 힘의 뒤편에는 어둡고 칙칙한 진실이 둥둥 떠다녔다. 입에 담기에도 꺼림칙한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르겠어.”
“평생 모르는 편이 좋은 거야.”
자신의 무시하는 듯한 발언에 에이네는 화를 내려 했지만, 어딘가 아득하고도 구슬픈 울림이 그녀를 침묵하게 했다.
에이네는 쇼파 하나를 창가로 옮기고, 거기에 양반다리로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시계추처럼 일정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몸이 시간의 경과를 알리고 있었고, 저 멀리 두 개의 달이 차올랐다.
“지랄 맞게 좋은 밤이 될 것 같네.”
밤이 되며 행인이 변하고 황야의 팔레트는 밤의 모습으로 단장했다. 간판마다 불이 켜지고 저 멀리서 들리는 건배사와 건배음이 유리창을 건너 고막을 때렸다.
초침처럼 몸을 흔들며, 초점 없는 에이네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믿음.
영혼과 뇌는 인간의 것이지만 그 내용물은 안드로이드의 그것인 에이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개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