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87
87
일곱째 날.
다섯째 날. 숲이 구슬프게 울었다. 숲에 설치한 함정이 반 이상 뚫렸고, 현을 노리는 자들 또한 반 이상 숲을 공략했다.
현은 느꼈다. 화이트 메시아가 숲에 들어왔다. 인공위성으로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숲에 발을 들이면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현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듯했다.
“배신은 조금 당황스러운데요.”
호르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위성 화면으로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는 볼 수 없었다. 그가 본 건 이성철과 화이트 메시아가 대화하고, 둘이 함께 숲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가 이끄는 인종차별주의자들, 그리고 이성철이 끌고 온 천에 달하는 인원과 함께.
누가 봐도 배신이었다.
일단 숲을 배회하는 사냥개들에게 이성철도 사냥 대상에 포함하라고 전달하긴 했으나 그게 통할지는 호르스로서도 미지수였다. 특수부대는 리센의 개인 부대, 위원회의 권위가 통하지 않았다. 또 사냥개들이 나선다고 화이트 메시아의 보호를 받는 이성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현은 무덤덤했다. 이성철의 행동은 분명 의외였지만, 그게 특별한 가치를 가지지는 않았다. 여기는 근원 세계고, 이성철은 근원 세계에서도 특이한 존재인 다회차 회귀자다. 이성철이 당장 자살을 해도 현은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회귀자가 보는 세계를 일반인의 시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현은 그걸 세이브 로드 능력자인 시즈를 보며 배웠다. 시즈는 그 행동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았을 뿐, 현이 본 사람 중 손에 꼽는 미친놈이었다.
“배신할 거라면, 내 뒤에서 목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지. 별일 아니다. 저놈이 있으니까.”
집 밖 나무에는 여전히 검신 이재운이 앉아 있었다. 그가 등을 기댄 나무는 파릇하던 잎들이 떨어져 가지만 남아 앙상했다. 청록색 잎들은 반듯하게 반으로 잘려 나무 아래에 잔뜩 떨어져 있었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도 나뭇잎이 쌓여 있었다. 검신은 어제부터 조금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잎이 소리 없이 잘려 가지에서 떨어졌다. 검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신이 도와주리라 보십니까?”
호르스는 평정을 가정하고 물었다. 위원회 내부에서 대외적으로 검신은 윌리엄의 파벌이었다. 그리고 저번, 휘헌의 증세를 봐주는 것의 대가로 현에게 위원회 내부의 사정을 말해줄 때도 호르스는 그렇게 말했다.
대외적으로 그가 검신의 의중을 알아선 안 되었다.
“저놈이 원하는 게 내가 죽는 걸 보는 거라 가정해도, 검신은 저놈들하고는 싸워야 한다. 저쪽이 먼저 저놈을 공격할 테니까.”
“무슨 악연이라도 있습니까?”
“자길 메시아라고 자칭하는 미친놈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게 나랑 저놈이다. 완전히 변한 내 얼굴보다는 저놈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겠지.”
나무 하나를 발가벗겨 놓은 검신이 일어나 그 옆에 있는 나무에 앉았다. 사락. 사락. 나무에 달린 나뭇잎이 반으로 갈라져 하나씩 떨어졌다. 장난이나 치는 게 아니라 저게 다 수련이었다. 검신은 어제부터 쉬지 않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독한 놈.”
나뭇잎을 하나씩 베어내는 검신을 보며 현이 혀를 찼다. 저 멀리서 검신의 대답이 돌아왔다.
“너한테 듣는 거니 칭찬으로 듣지.”
검신은 다시 나뭇잎 베기에 집중했다. 나무의 속살이 천천히 드러났다.
***
여섯째 날, 집은 조용했으나 밖이 시끄러웠다.
***
이성철은 길잡이로서 쭉쭉 전진했다. 리센이 직접 설치한 함정이지만, 이성철은 함정을 피하는 것과 해체하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몸이었다. 숲을 나오며 함정을 한 차례 살펴본 것도 도움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발동한 함정은 화이트 메시아가 처리해버렸다. 이성철은 그냥 전진하기만 하면 되었다.
자잘한 분쟁이 몇 번 있었다. 앞서가는 무리를 견제하고 안전한 길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싱겁게 끝났다. 그레이엄, 화이트 메시아의 위상은 이천 남짓한 무리 안에서 독보적이고, 절대적이었다.
그가 종족차별을 일삼아도, 그의 기분에 따라 하루 수십 명이 죽어 나가도 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무리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화이트 메시아는, 막상 주도권을 쥐게 되자 폭군으로 변했다. 그는 떠나는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노예는 주인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법이다. 너희 노예들에게 돌아갈 곳은 내 발아래뿐이다.”
무리에서 이탈하려는 자는 모조리 숙청되었다. 화이트 노블리스 오블리주 소속의 백인들은 탈주자를 십자가에 매달고 군기처럼 흔들며 낄낄댔다. 매달린 자들의 반은 숨이 끊어졌고, 반은 숨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는 쾌락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메시아가 다스리는 악마의 군세가 숲을 가로질렀다.
이성철은 화이트 메시아를 등에 진 선봉장이었다.
다섯째 날. 숲에 비명이 울렸다. 그리고 종일 습격이 없었다. 전날 습격해 온 암살자들을 화이트 메시아가 직접 십자가에 매달았다.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 중 반은 리센의 부하로 추측되는 암살자들이었다.
여섯째 날. 숲에 비명이 울렸다. 십자가가 타올랐다.
‘앞으로 하루.’
이성철이 숲을 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리센이 무슨 수를 써 이 자리에 이들을 모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시작은 그레이트 다운타운에서 나온 소문이었다.
-일주일간 김우현을 가둬두었다. 지구 최강을 죽이고 싶은 자 여기로 오라.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었지만 믿는 바보도 있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은 범죄자들의 수용소, 거기에는 위원회의 추격을 피해 도망친 자들도 있었다.
위원회는 그들을 방치했다. 위험한 쓰레기들이 서로 견제하고 죽이며 자체적으로 수용소를 유지해주면 위원회로서도 이득이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게 되었다. 그들은 능력 있는 쓰레기였고,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쓰레기도 있었다.
김우현을 죽이는 건 무리지만, 일주일 정도 가둬둘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법도 했다.
소문에 끌린 사람들이 모였고, 입소문을 타고 사람이 늘었다.
리센이 짠 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변수다. 얼마나 변수를 차단할 수 있느냐. 생겨난 변수에 얼마나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 그런 면에서 리센의 계획은 무계획적이면서 계획적이었다.
우선 소문에 낚여 누가 나타날지 모른다. 화이트 메시아만 해도 근원 세계 먹이사슬 최정상에 있는 포식자였다.
다른 방향에서 숲을 공략하고 있는 쟁쟁한 조직들도 많았다. 위원회에 가맹한 집단까지 모습을 바꾸고 찾아와 있다면 그 수준을 설명하기 쉬울까.
초월자와 세계 최상급의 부대들이 모였다. 이성철은 이들을 현에게 안내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배신? 아니다. 그는 현을 배신한 적이 없다. 자신과 현은 운명으로 묶여 있다. 이성철은 다음 생을 위해서라도 그 끝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현의 곁에 붙어서 얻어먹을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이성철은 악마가 이끄는 군대의 선봉에 서서 숲에 길을 열었다.
일곱째 날. 숲이 열렸다.
***
첫째 날. 에이네에게 마법을 가르치기로 했던 리센은 난관에 부딪혔다.
에이네의 지식이 지나치게 자세했기 때문이다. 현이 한 차례 에이네에게 지적했던 문제였다.
과학적 상상에 기반한 마법이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으로 펼치는 마법이다. 필요한 건 마법사 자신의 이미지며, 과학 이론은 부차적인, 이미지를 돕는 도구에 불과하다. 과학 이론을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리센이 가진 지식은 두루뭉술했고, 그래서 리센은 강했다.
반대로 에이네가 가진 지식은 너무 구체적이었고, 에이네 본인도 과학에 대해서만큼은 논리적이었다. 리센이 아무리 대충 생각하라고 해도 에이네는 꼭 구체적인 부분을 걸고넘어졌다.
둘째 날. 진전이 없었다. 고민하던 리센은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리센은 에이네에게 자신에게 과학을 가르치라고 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에이네였으나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의미를 깨달았다.
“좌표의 질량에 따라 공간 곡률이 정해진다면, 왜 그 반대는 안 되는 거지?”
“그야 공간 곡률 자체가 좌표의 질량에 따라 정해지는 거니까.”
“그럼 공간 곡률이 있다면 질량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아니, 곡률 자체는 모든 질량에 존재하거든. 항성, 최소한 태양 정도 되는 질량이 아니면 측정이 힘들뿐이지.”
“측정이 힘들다면 평소에는 곡률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뜻이군.”
“그렇지.”
“관측되지 않는 곡률이 어딘가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고.”
“이상한 게 아니라 그게 당연하거든. 애초에 항성 정도가 아니면 측정이 힘들다니까.”
“그럼 이런 것도 되겠군. 관측하지 못하는 곡률이 이 종이에 있다.”
리센이 떨어뜨린 종이가 직선으로 떨어졌다. 종이는 강철 책상을 박살 내고 땅에 박혀 연기를 냈다.
“뭐한 거야?”
“관측하지 못하는 곡률을 상상해서 이 종이에 부여했다. 생각보다 효율이 좋군.”
막 새로 만든 마법의 성능에 리센이 고개를 주억였다. 에이네는 황당해 입을 벌렸다.
“곡률을 임의로 부여했다고?”
“관측이 안 되면 값이 변해도 알 방법이 없다. 그러면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거 아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론이냐 궤변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요점은 ‘그럴듯하냐?’ 다. 상상이 그럴듯하고 마력이 충분하다면 마법은 발동한다. 측정값이 1이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게 1인지 100인지 모른다. 나는 임의로 이 종이의 곡률의 관측값이 100이라고 이미지했다. 그리고 종이는 100에 해당하는 질량을 가졌지.”
질량에 따라 곡률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곡률을 바꿈으로써 종이가 무거워졌다는 말이었다. 완전히 선후 관계가 바뀌어 있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는 일은 아니다.
과학도 실험에 실패할 때가 있고, 관측 값을 잘못 계산할 때가 있다. 수긍하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에이네는 리센이 자신에게 가르치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결과부터 생각하고, 그 뒤는 그냥 그럴듯하게 끼워 맞춰라?”
“과정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니 머리가 거부하는 거다. 결과부터 생각하고 나머지는 억지로 끼워 맞추기만 하면, 마법은 적당히 발동한다.”
“적당히라니…… 아니,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으면 현 그놈은 왜 나한테 안 알려줬어?”
무안함과 괜히 치미는 억울함에 에이네는 애먼 현을 욕했다. 그런 에이네를 리센이 비웃었다.
“그놈이 배운 마법은 전혀 다른 학파의 것이니까. 그리고 과연 이게 쉬울까? 방법을 알려줬으면 이 이상은 혼자서도 되겠지. 이제 혼자서 해봐라.”
에이네는 리센의 말대로 혼자서 마법을 연습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결과를 상상하는 건 된다. 그러나 과정을 끼워 맞추는 단계에서 어김없이 그녀의 논리적 본능이 끼어들었다. 머리에 주입된 그녀의 지식들은 본능이라 불러도 되는 영역에 있었다.
에이네는 본의 아니게 자신의 본능과 싸우게 됐다.
셋째 날. 에이네는 공간 곡률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날. 성과 없음. 에이네는 그냥 리센에게 마법서를 달라 했다.
리센은 아직 부족하다며 거부했다.
여섯째 날. 에이네는 공간 이동의 기초를 익혔다.
약속한 마지막 날, 두 사람이 머무르던 안전 가옥이 포위됐다.
리센은 에이네에게 마법서를 건넸다.
“지금 익혀라. 내가 옆에 없으면 발동하지 않는다.”
에이네는 마법서를 익혔다. 천마신공 때와 같았다. 지식은 머리에 들어왔지만, 그걸 모두 사용할 수는 없었다. 무공에 무지했던 그때와 달리 에이네는 최후의 안드로이드고, 리센은 과학 기반 마법으로 초월자에 달한 사람이다. 두 개의 지식이 충돌하며 에이네는 뇌가 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에이네가 고통에 머리를 싸맸다.
리센이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가옥을 날려버렸다. 사방을 포위한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위원회 요원들을 거느린 윌리엄이 있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건 리센이 평소 축출하려던 자들, 세력만 가진 무능한 자들의 부하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실각했소.”
일곱째 날, 리센이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