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08
1008화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법상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천마왕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부분들이 있지만, 말이나 글로 전달을 하려는 순간마다 누군가 저를 감시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에도 이 편지를 남기는 건 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지겠죠.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추격수는 이미 이성을 잃고 폭주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직접 추격수를 찾아가 끝장을 보려고 합니다.
직접적으로 기록을 남길 순 없기에 간접적으로 남깁니다.
진 선생께서 꼭 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외에 온전하지 않은 수많은 단서들, 그리고 여러 공법의 이름들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이 남겨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주작이 목숨을 걸고 추격수의 궁전으로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다만 정황상 단순히 자결을 하려고 간 것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편지의 마지막에는 ‘주작이라는 이름은 불패를 의미합니다’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일을 만회하겠다는 뜻이었다.
한편, 청우마는 안절부절못하며 심각한 표정의 진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 선생?”
“그런 눈으로 쳐다볼 필요 없습니다. 도와드릴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청우마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추격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수많은 이족들이 그의 손에 의해 멸족을 당했다.
때문에, 진심으로 두려웠던 것이었다.
* * *
신수족 노인은 신수의 뿌리와 가까운 줄기 위에 서 있었다.
어느덧 줄기에는 검은 반점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검은 반점이 넓은 범위로 퍼지기 시작하며 죽음의 기운도 조금씩 위로 퍼지고 있었다.
노인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격수 그놈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는데. 다 내 불찰이로구나.”
신수에 문제가 생기면 단순히 신수족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신수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어쩌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게 되는 건 신수에 기생해서 사는 생명체들일지도 모른다.
짙은 죽음의 기운이 퍼지게 된다면 신수가 죽기도 전에 신수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먼저 죽게 될 것이다.
강력한 죽음의 기운을 견뎌낼 수 있는 생명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죽음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면 신수를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충분히 강한 실력을 갖췄다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존재들은 마치 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것이다.
신수족 부족원들은 전부 줄기 근처로 모였다.
이 외에도 지성을 갖출 만큼 충분히 강력한 몇몇 생명체들도 함께 모였다.
지금까지는 서로 간의 마찰이나 은원으로 인해 등을 돌리고 살았으나, 공통된 문제 앞에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신수족은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작금의 위기에 놓기에 된 것은 신수족이 추격수의 말을 믿고 거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추격수가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신수족 덕분이다.
녀석의 힘으로는 절대 허공 궁전까지 함께 챙겨 신수 안으로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크게 문제가 될 것 없는 거래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추격수가 떠나기 무섭게 골치 아픈 문제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신수족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조금씩 줄기 곳곳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죽음의 기운을 바라보았다.
문득 추격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황을 치려면 기회는 지금뿐이오. 수만 년 동안 대황을 휘어잡고 있던 영제는 죽었고, 대황 전체를 통틀어 제대로 된 봉호도군조차 하나 없소.’
허공 이족 중에 대황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족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허공의 환경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대황의 평온한 영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황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족도 있었다.
예를 들면 추격수처럼 말이다.
과거 추격수 일족은 온 힘을 모두 끌어모아 대황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거의 정점에 올랐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외층 공간에서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대황에는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영제가 있었다.
강력한 영제의 힘에 의해 추격수 일족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당시 추격수는 어렸기에 전장에 나가지 않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사건으로 큰 힘을 잃은 추격수 일족은 외층 공간의 모든 이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해 추격수 일족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살아남은 건 추격수 한 사람뿐이었다.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에 추격수 일족의 이름이 그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일화가 있기 때문에 추격수가 보복을 하기 위해서라도 대황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건 크게 이상할 게 없다.
추격수 다음으로 대황에 가고 싶어 하는 건 신수족이다.
신수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황을 갈망해왔다.
신수가 대세계에 뿌리를 내리기만 한다면 그 힘은 온전해질 것이고, 신수족 역시 작금의 위태로운 국면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수족과 신수 모두에게 큰 이득이 되는 것.
추격수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거래를 하러 찾아온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대황 침공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며 신수족 전체를 꼬드겼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은 애초부터 추격수의 음모였던 게 확실하다.
추격수는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신수에 수작을 부렸다.
신수족은 지난 며칠간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심지어 목숨을 내걸고 죽음의 기운 안쪽까지 들어가 살펴보고 나오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은커녕 문제가 있는 부분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
하나는 과감하게 신수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죽음의 기운이 완벽하게 퍼지기 전까지는 족히 수십 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그때까지 준비를 마치고 군락지로 삼기에 적합한 곳을 찾으면 된다.
또 다른 선택지는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대황으로 신수를 옮기는 것이다.
물론 강풍층을 뚫고 지나가며 심각한 손상을 입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신수의 뿌리가 죽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대황의 대세계에 뿌리를 내리기만 한다면 언젠간 다시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두 번째 선택지는 결정을 한 번 내리고 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대가를 치른 뒤일 것이다.
물론 대가를 치른 만큼 미래는 보장될 것이다.
하지만 패배한다면 신수는 물론이고 일족 전체가 날아가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모험은 신수족의 입장에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가진 모든 것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령 힘겹게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대황의 원주민들의 배척을 견뎌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수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사실상 답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첫 번째 선택지를 택한다면 잠시 연명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결국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두 번째 선택지가 희망이 있어 보였다.
불구덩이인 줄 알면서도 들어갈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신수를 움직여 대황으로 향해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신수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을 때 강풍층을 뚫어야 성공할 확률도 올라간다.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처음부터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신수족과 생명체들은 상의를 하기 위해 한 곳에 모였으나 크게 상의를 할 것도 없었다.
이들의 의견은 곧바로 신수를 대황으로 옮기자는 쪽으로 일치되었다.
* * *
같은 시각.
거점으로 돌아온 진양은 혈란과 함께 주작이 남긴 편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살펴봐도 여전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모든 것은 계획의 일부에 불과하고 핵심 내용은 따로 존재하긴 하나 감시자가 있어 기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양은 문득 자신을 노려보던 두 눈이 떠올랐다.
적의 기억을 살펴볼 때마다 어디선가 두 눈이 나타나 마치 자신을 감시하듯 쳐다봤었다.
만약 기억을 완전히 잘라내지 않았다면 감시자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작이 말하는 감시자는 아마도 이것을 말하는 듯했다.
적의 핵심 계획이 무엇인지는 추측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작이 추격수, 혹은 추격수의 궁전에 무슨 짓을 하려는 것만은 확실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보니 그녀는 자신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진양처럼 대몽진경이나 어면안신곡을 익히지 않았기에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누군가와 상의할 시간도 없었고, 고민해 볼 시간도 없었다.
심지어 편지조차도 직접 전해줄 여유가 없어 청우마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외층 공간의 이족들 중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건 청우마뿐이었으니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었다.
이 정도로 무언가를 추측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한편, 외층 전장은 또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추격수가 순천사의 거점을 공격하려는 순간 돌연 듯 사라져버린 것이다.
진양은 곧바로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 사방으로 보냈다.
일부는 외층 전장 곳곳에 흩어져있는 조각을 회수하도록, 나머지는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한 달 정도가 흐르자 흩어졌던 분신들이 하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땅히 쓸만한 정보를 들고 돌아온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이족들은 원래 살던 곳을 버리고 이미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주해버렸다.
외층 전장에서 살아가던 수십 개의 이족들 중 일부는 멸족해버렸고, 살아남은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버렸다.
그렇게 겨우 몇 개월 만에 외층 전장은 황무지가 되어버렸다.
주변에 떠다니는 조각마저 모두 회수하고 나니 진짜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만 남게 되었다.
* * *
허공 궁전 내부.
어둠 가장자리에 서 있는 추격수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둠 깊은 곳에선 고통스러운 신음과 포효가 연신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주작의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촉수가 되었고, 이족을 하나씩 감싸며 그들을 마른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죽음의 기운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으나 한 줄기의 생기가 검은 기운과 연결되어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그림자 가운데 검은 기운의 원천이 있었다.
마른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의 주작은 그곳 중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