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15
1015화 상상만 해도 역겨운 놈들
신수의 줄기 부근에 있던 큼직한 잎사귀들은 전부 사라져버렸고, 남은 건 새까맣게 그을린 가지뿐이었다.
신수의 뒤쪽을 뒤덮고 있던 죽음의 기운도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번개의 바다를 지날 때 번개의 힘을 버텨내느라 소진되어버린 것이다.
신수의 상태는 상당히 호전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법.
대황의 힘을 빌어 일부 죽음의 기운을 씻어내는 것도 불가능했고, 다시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배가 크면 쉽게 뱃머리를 돌릴 수 없다.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먼저 강풍층을 뚫고 나아가 신수를 멈추고 다시 방향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진양은 멀리 돌아와 조심스럽게 신수 위에 착지했다.
번개의 바다는 지나갔다.
남은 건 미세한 번개 줄기뿐이다.
이어서 또 다른 무언가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이토록 광활한 번개의 바다를 대황에서 느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강풍층의 힘은 지금까지 상대적 평행을 이룬 상태였다.
아무 이유 없이 광활한 번개의 바다가 이곳에 모여있을 리는 없다.
아마 과거 검둥이의 본체와 해안마석이 함께 추락하며 이러한 반응이 일어난 듯했다.
검둥이의 손과 해안마석이 추락할 땐 그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검둥이와 해안마석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강풍층을 뚫을 때 강풍층에 모여있는 힘을 끊임없이 흡수했을 것이다.
검둥이가 뚫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속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뒤 모여있던 힘이 동시에 반응을 일으킬 순 없다.
특히 비교적 먼 곳에서 모여든 기세들 역시 동시에 흩어질 리 없다.
검둥이가 뚫고 지나간 뒤 모여든 힘들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잠잠해지며 힘은 조금씩 진정되었고, 상대적으로 평행을 이룬 상태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검둥이가 뚫고 지나간 길, 혹은 그 부근에 흩어져있는 힘들은 분명 다른 곳의 힘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준일 것이다.
거대한 신수는 처음에는 오색빛깔의 고리까지 더해져 무려 수십만 리에 달하는 공간을 차지했었다.
이 정도면 손쉽게 흩어져있는 힘을 한곳에 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신수가 이 힘들을 전부 한 곳으로 밀어냈을지도 모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뒤로는 훨씬 더 위험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일단은 잠시 쉬면서 숨을 돌리자.’
두 사람은 상당량의 힘을 소모했다.
설령 한 달 정도의 여유를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회복되진 못할 것이다.
진양은 신수 가장자리를 돌아다니며 보이는 번개를 전부 회수했다.
그리고 신수에서 떨어져나온 재료들이 없는지도 살폈다.
새까맣게 탄 숯덩이조차 대황을 떠돌고 있는 신목에 비하면 훨씬 좋은 물건이었다.
찢긴 거대한 잎사귀도 전부 회수했다.
예전 같았으면 온전한 거대 잎사귀를 베어내는 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회수 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니 신수의 뿌리가 드러났다.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인 범위도 크게 줄어있었다.
돌아다니며 살펴보던 중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뿌리 한 줄기를 발견했다.
간신히 힘겹게 그것을 잘라 회수하려는 순간.
수관(樹冠) 쪽을 바라보았다.
수관 밖으로 붉은 노을이 피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노을은 급속하게 밝아지기 시작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이 나타났다.
이어서 화염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열기의 파도가 덮쳐왔다.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진양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새까맣게 탄 가지의 잔해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잔해는 아무런 까닭 없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자 주위에 있던 영기가 왜곡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마치 일렁이는 물결처럼 보였다.
이어서 불의 파도가 수관의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화염의 장막이 되어 수관 전체를 뒤덮었다.
천화(天火)가 일어난 것이다.
진양은 주변의 변화를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어쩔 수 없지.’
사실 이 정도 위험한 상황에 대해선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화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순식간에 타 죽는 것만 아니면 어떻게든 버티며 적응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만 느껴봐도 알 수 있었다.
들어가는 즉시 눈 깜짝할 틈도 없이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을.
진양의 육신으로는 천화를 버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녀석을 말려 죽이겠다는 계획을 포기할 순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호양보종을 꺼냈다.
안에서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진양은 종을 두드려댔다.
“닭? 자?”
닭은 호양보종 밖으로 머리를 쏙 내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곧바로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진유덕, 드디어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강풍층에 뛰어든 거야? 게다가 이 천화는 또 뭐야? 대일진화랑 거의 맞먹을 수준이잖아!”
“그래서 말인데, 넌 대일금오잖아. 뭐 하나만 부탁 좀 하려고 하는데…….”
“안돼!”
진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닭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정신 좀 차리라고. 뭐든 다 해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줄 알아? 저런 걸 해안에 집어넣었다간 해안 전체가 숯덩이가 되어버릴 거라고.
게다가 네 몸이 천화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조금이라도 새어 나왔다간 새까맣게 타버릴걸.
설령 몸이 버텨준다고 하더라도 천화를 거두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니까 그만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진양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라는 거야. 내가 아무거나 막 주워 담는 사람인 줄 알아? 그게 아니라 다른 부탁이 있어서 그래.
저기 옆에 이족 연체 수도사가 둘 있거든. 대략 법신 정도 되는 녀석들인데 얼마 전까지 많은 힘을 소모하는 바람에 아마 실력이 크게 줄었을 거야. 녀석들은 아마 천화 속으로 달려들 엄두도 못 낼 거야. 설령 타죽지 않는다고 해도 궁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을 거고.
궁전 안에는 내 몸과 혼을 뺏으려던 녀석이 있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 모양이더라고. 강한 녀석이긴 하지만 궁전을 못 벗어날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천화를 거두어달라는 게 아니야. 네가 천화를 이용해서 저 망할 녀석들을 바싹 구워줬으면 해. 완전히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어. 힘만 빼놔도 되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닭은 한숨을 푹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건드려도 강한 녀석들만 건드리는 거야? 저 정도면 최상의 상태일 경우 족히 도군 정도의 힘을 낼 수 있는 녀석이잖아.”
“어허,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언제 아무 이유 없이 먼저 시비 거는 거 본 적 있어? 녀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데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어쨌든, 녀석들이 죽거나 내가 죽거나 하는 상황이니까 대답부터 먼저 해줘. 네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너 요즘 해안에만 박혀있어서 그런지 살이 꽤 찐 것 같다? 좀 나와서 활동도 하고 그래라.”
“흥! 살이 찌긴 무슨. 구경이나 하셔.”
닭은 발로 호양보종을 꽉 쥔 채 날개를 펄럭이며 수관에서 늘어져 내려온 천화를 향해 날아갔다.
천화에 가까이 다가간 닭이 큰소리로 울음소리를 내자 몸은 황금빛 화염으로 휩싸였고, 곧바로 천화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거대한 천화 가운데 황금빛 점이 하나 찍혔다.
이어서 조금씩 크기가 불어나며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천화는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밝은 황금색 태양이 천화 가운데 떠올랐다.
뜨거운 태양 속에서 황금빛에 둘러싸인 채 닭은 날갯짓을 했다.
태양은 조금씩 떠오르며 늘어진 천화를 따라 화염에 휩싸인 수관 쪽으로 움직였다.
한편,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진양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법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꾸준히 제련을 해줘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진원이 고갈될 때까지 매번 제련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하지만 해안에는 닭이 마음껏 쓰고도 남을 만큼 진원이 쌓여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제련을 한 덕분일까?
그러나 닭의 변하는 옛날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물론 호양보종 자체가 강화되진 않았다.
하지만 강력한 천화를 눈앞에 두고도 닭은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어쩌면 훗날 진정한 대일금오의 모습을 갖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격수가 자리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떠났다고 해도 자리를 옮기는 게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더 이상 옮길 만한 자리는 없다.
* * *
하루 뒤.
마침내 천화가 신수 전체를 감쌌다.
사방에서 뜨거운 화염이 줄기를 향해 뻗어왔다.
그와 동시에 추격수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궁전에서도 강력한 보호의 기운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진양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닭 녀석, 제법이잖아!’
단 하루 만에 천화를 안쪽까지 유도해오다니.
그러나 추격수는 궁전을 전혀 거둬들일 수 없는 듯했다.
게다가 궁전 자체적으로도 방어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진 않은 듯했다.
지금 상황만 봐도 그렇다.
이 때문인지 흑포를 입은 여인을 잠시도 궁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노릴 수 있는 틈이 많아진다.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 역시 훨씬 더 간단해진다.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천화의 힘은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었다.
천화는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뒤덮고 있었다.
아마 과거 검둥이의 손이 추락하며 이곳을 지날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진양은 먼 길을 빙 돌아 줄기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가는 김에 쓸 만한 물건을 주울 수 있을지도 유심히 살폈다.
이대로 가다간 강풍층을 모두 통과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잎사귀는커녕 숯덩이가 되지 않은 나뭇가지를 찾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물론 굵직한 가지들이야 전부 살아남겠지만, 이건 베고 싶어도 진양의 능력으로는 벨 수 없는 것들이다.
반대편으로 향하는 도중 신수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진양은 그들을 최대한 멀리 피해갔다.
지금은 신수족 녀석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은 첫인상부터가 굉장히 좋지 않았다.
추격수를 대변이라고 비유한다면 신수족은 소피라고나 할까.
상상만 해도 역겨운 놈들이었다.
그동안 백여 나무 인간 백아농이 보여주었던 좋은 인상들을 신수족 녀석들이 몽땅 갉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지. 연못이 커지면 별별 물고기들이 다 있는 법이니까. 백아농은 그저 이 무리에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