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16
1016화 이번에는 천화
천여 리 정도를 돌아갔을 무렵.
거대한 잎사귀가 절반 정도 남은 채 아슬아슬하게 가지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습득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런데 백여 리 정도 되는 잎사귀 너머로 온몸에 가시가 자란 송충이를 닮은 녀석이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의 머리에는 흑수정과 같은 눈이 여섯 개나 달려있었고, 모두 하나 같이 기분 나쁘게 진양을 주시하고 있었다.
녀석의 몸통은 절반 이상이 불에 그을렸다.
날카로운 보호 가시도 적지 않게 불에 타서 녹아버렸다.
심지어 고기 탄내까지 풍겨올 정도였다.
진양은 포권을 취한 뒤 잎사귀에 습득 능력을 사용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녀석이 덤벼들 리는 없다.
그건 위기 속에서 또 하나의 위기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
그때, 송충이가 진양의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진양의 머릿속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양,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어요.”
진양은 흠칫 놀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덩치만 산만 하지, 알고 보니 어린아이였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애초에 송충이는 성체가 아니라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나야 환영이지. 그래서 무슨 거래를 하고 싶은 건데?”
“무사히 강풍층을 지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대황에 도착하면 저를 지켜주세요. 물론 완벽하게 지켜달라는 건 아닙니다. 한동안 몰아닥칠 천겁(劫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면 됩니다.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 언제든 물러서도 좋고요.”
녀석은 조건을 내걸 때부터 상당히 저자세로 나왔다.
천겁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문득 돼지 녀석이 떠올랐다.
아무리 같은 천겁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급이 다른 법이다.
일반적인 요족의 경우 화형(化形)으로 인한 천겁이라고 해봤자 천뇌가 전부다.
현재 진양의 실력으로는 자면서도 막을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돼지 녀석이 마주했던 천겁은 조금 다르다.
불이나 번개가 내려온 건 아니다.
다만 재수 없는 일이 계속해서 따라다녔을 뿐이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가 없었고, 사전에 눈치채고 싶어도 아무런 징조가 없었다.
마치 온 세상이 작정하고 그를 못살게 굴려는 듯했다.
그렇게 그는 이곳저곳에서 온갖 봉인에 걸리게 되었고 결국은 재수 없게 붙잡히며 대영 신조의 천뇌에 갇혀 만 년에 가까운 고통을 받았다.
지금은 봉인을 풀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자진하여 탕의 재료가 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죽는 것만 못한 삶이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경우 모두 천겁이라고 부른다.
송충이 녀석은 거대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실력도 갖추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강풍층을 뚫고 지나가면서 교묘하게 이득을 취할 만큼 실력을 갖춘 허공 이족이기도 하다.
녀석에게 떨어질 천겁은 결코 번개나 불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돼지처럼 영문도 모른 채 봉호도군에게 무슨 일을 당할 수도 있다.
한참의 고민 끝에 진양은 거절하기로 했다.
“강풍층이라면 나 혼자서도 충분히 뚫고 지나갈 수 있는데. 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게다가 난 대황 사람이라고. 설령 강풍층을 강제로 뚫고 지나간다 해도 천겁 따위는 내리지 않을 거야.
아쉽지만 천겁은 누군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난 그럴 만한 능력이 없거든.”
진양의 말에 송충이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뇨? 분명 번개를 다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불이 내린다 해도 당신의 수하인 대일금오를 부려서 다스리면 되지 않습니까?
천겁을 완벽히 막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강한 천겁이 내린다 해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버틸 수 있지만, 대신 조금만 약하게 만들어달라 이겁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당신을 도와 추격수를 죽이길 원하십니까?”
진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웃기고 있네. 네가 지금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추격수 때문이잖아? 원한을 지고 있는 건 네 녀석인데 왜 내 핑계를 대려는 거야?
누가 누굴 돕는다고 그러는 건지. 기가 막히지도 않는군.”
아무래도 녀석은 ‘거래’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아니, 협상조차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녀석이 분명했다.
송충이는 한 풀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거래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럼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이쯤 되니 송충이는 아예 꼬리를 완전히 내려버렸다.
‘쯔쯧. 진짜 거래를 할 줄 모르는 녀석이네. 제대로 협상을 하기도 전부터 밑천을 전부 드러내다니.’
녀석은 그나마 공명정대한 진양을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번개나 불이 내려치는 천겁이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만, 이 외의 다른 천겁은 나도 속수무책일 수도 있어. 이건 확실하게 얘기해두도록 하지.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뭘 해 줄 수 있는데?”
“신수에게 수액을 채취하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수액은 무슨. 당장 말라 죽을 판인데 수액을 어디서 구하겠다고.”
송충이는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독 같은 건 못 뱉어?”
“그걸 독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신수족 녀석들은 단 한 번도 중독이 안 됐었어요.”
“그럼 평소에 싸울 땐 어떻게 싸우는데?”
“웬만해선 싸울 일이 없습니다. 신수족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없으니까요.
칠채조(七彩鳥) 녀석이 시비를 걸어왔던 적은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제는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더군요.
청사(青蛇)는 꽤 까다로운 상대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아예 마주칠 일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평소엔 그저 먹는 걸로 시간을 보냅니다.
녀석은 한층 더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진양은 황당하다는 듯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못해도 법상 경지는 되는 녀석이 이제껏 제대로 된 싸움이라곤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뭘 먹는데?”
“당연히 나뭇잎을 먹지요.”
“그럼 이것 좀 떼봐.”
진양은 지금 밟고 있는 반쯤 남은 잎사귀를 가리켰다.
송충이는 곧바로 날카로운 이빨로 잎사귀를 단숨에 떼었고, 뗀 잎사귀를 물어 진양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불쌍한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잎사귀의 단면에는 작고 세밀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진양은 반나절이 지날 동안 베지 못했던 잎사귀를 송충이 녀석은 마치 종이를 잘라내듯 잘라버린 것이다.
송충이 녀석의 입을 살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달려있었다.
“좋아. 그럼 힘닿는 데까진 도와주도록 할게. 대황에 도착하면 어디 쓸데없이 새지 말고 딱 붙어있어.
대황은 사방에 고수가 깔린 곳이야. 괜히 한눈 잘못 팔았다간 눈 뜨고 목 베일 거라고.”
진양은 새롭게 동료가 된 송충이와 함께 줄기 부근을 돌아다녔다.
천화에 의해 손상이 된 잎사귀가 보일 때마다 송충이 녀석을 시켜 전부 베어내도록 했고, 녀석이 작업을 마치면 곧바로 습득 능력을 사용하여 챙겨 넣었다.
그러다 보면 운 좋게 작은 가지도 함께 챙겨 넣을 수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쓸만한 녀석이군.’
그렇게 보름 정도가 흘렀다.
송충이는 단 한시도 쉬지 못하고 진양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며 착취에 시달렸으나 크게 지치거나 불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중간에 몇몇 이족과 신수족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은 사방에서 뻗쳐오는 천화를 피해 어쩔 수 없이 활동 범위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화가 폭포처럼 쏟아지며 수관에도 마침내 불이 붙었다.
불은 어느덧 줄기 근처까지 옮겨붙고 있었다.
화마가 점점 커지자 진양도 물러서기로 했다.
그런데 송충이 녀석은 갑자기 방향을 꺾어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집에 좀 다녀오려고 합니다.”
진양은 송충이를 따라 줄기 근처로 향했다.
이어서 줄기 위로 틈이 벌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대한 송충이 녀석은 몇 장 되지 않는 틈을 미끄러지듯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 보니 내부엔 꽤 큰 공간이 뚫려있었다.
입구만 좁고 내부는 상당히 넓었던 것이었다.
진양은 곧바로 호양보종을 소환했다.
멀리서 천화를 다루느라 정신없던 닭도 진양의 부름을 느꼈다.
어느새 신수는 천화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닭은 호양보종을 챙겨 천화를 뚫고 곧장 진양이 있는 쪽으로 날아갔다.
* * *
뿌리 부근.
추격수의 궁전이 허공에 둥둥 뜬 채 대부분의 천화의 힘을 막아내고 있었다.
대전 가장자리에 서 있는 흑포 여인은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시체처럼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강풍층을 만만하게 보았다고 생각했을 뿐, 누군가 일부러 자신들을 노린다곤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설령 진양이 살아있다고 해도 천화로 자신들을 노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흑포 여인은 많은 힘을 소모하며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그건 추격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느덧 기혈을 거둬들이고 육신의 힘만으로 천화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 바람에 새까만 숯덩이가 되어있었다.
* * *
한편, 닭은 호양보종을 챙겨 진양이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
진양은 호양보종을 입구에 걸어두고 천화를 막도록 했다.
진양과 닭, 송충이는 나무 구멍 안에 피신한 채 천화가 지나가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 * *
같은 시각.
신수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도 상황이 썩 좋진 않았다.
신수족은 줄기에서 뻗어 나온 한 가지에 그동안 모아둔 재료를 이용하여 요새를 쌓아 천화를 막아내고 있었다.
거대한 뿔이 달린 사슴벌레 괴수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사기가 드리우지 않은 뿌리 부분에 딱 붙어있었다.
등딱지로 천화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섯 개의 다리는 전부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어느새 배도 불타올랐다.
그렇게 녀석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청사는 탈피를 거듭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죽을 이용하여 천화를 버텨내 보려는 것이었다.
적당히 막다가 가죽이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 싶으면 또다시 탈피를 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탈피를 거듭할수록 녀석의 몸집은 점점 작아졌다.
살아남기 위해 뼈를 깎는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 비참한 이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칠채조였다.
천화가 아직 신수에 옮겨붙기 전에는 날아서 피할 수라도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신수에 옮겨붙기 시작하니 도무지 피할 곳이 없었던 것이었다.
일곱 빛깔의 깃털은 전부 타서 사라지고 없었다.
녀석은 탈이 전부 뽑힌 채 구워지는 닭과 같은 꼴로 고통스러운 듯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의 힘으로 천화의 힘을 버텨내기엔 상당히 무리인 듯했다.
칠채조는 안간힘을 쓰며 몸을 피할 곳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진양 일행이 숨어있는 나무의 틈을 발견하고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