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32
1032화 낯짝 두껍게 행동했던 이유
어린 시절부터 또래에 비해 두각을 드러내던 추격수는 아버지의 기대와 함께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사요(妖邪)의 소굴에 던져진 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서 돌아오는 훈련부터 시작하여 의지를 단련하기 위해 마두의 소굴에 던져진 적도 있었고, 심지어 천마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던 적도 있었다.
설령 누군가와 원한을 진다고 해도 윗사람들 중 그 누구도 관여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이름 날린 고수라고 해도 그저 방관했고, 무리 지어 몰려와 추격수를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조용히 상황만 지켜보았다.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을 수밖에 없다.
싸움의 세계는 냉정한 법.
공평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약하면 잡아먹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추격수는 어린 시절 내내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대단한 공법을 배운 것도 아니었고, 홀로 구석에 처박혀 폐관을 하며 큰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다.
오직 실전을 통해서만 많은 걸 깨닫고 배워갔다.
이러한 훈련 덕분인지 추격수의 실력은 무섭게 성장했다.
그렇게 매일 생사를 오가며 긴장된 삶을 살아가던 중 한 특별한 친구를 사귀게 된다.
그에겐 한 황무지 대지 조각에 있는 비밀 거점이 있는데, 어느 날 목숨을 건 싸움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온 그는 거점에 있던 아무 바위에 푸념하는 글을 적은 적이 있다.
그러나 다음에 돌아왔을 때 그가 적었던 푸념 글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새로운 글이 나타나 있었다.
놀란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새롭게 글귀를 새겼다.
그렇게 바위에 글을 새기는 일은 소년 추격수의 유일한 취미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매번 전투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와 새로 남겨진 글을 확인하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추격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자신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영제라는 강자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것이다.
그날 처음으로 대황이라는 곳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외층 공간 말고도 대황이라는 진정한 대세계가 존재하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큰 혼란이 외층 공간을 휩쓸었다.
추격수 일족도 추살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평소 추격수 일족을 노리고 있던 자들도 가세하여 추격수 일족을 노렸다.
애초부터 머릿수가 많지 않았던 추격수 일족은 빠르게 사라져갔고, 결국 추격수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조용히 자신의 비밀 거점으로 도망친 그는 마찬가지로 바위에 글을 새겼다.
마지막 인사였다.
이번에는 꽤 빠르게 새로운 글이 나타났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이곳에 숨어있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이곳을 찾아냈다.
다만 실력이 낮은 탓인지 대놓고 바위에 기대어있는 추격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이날부터 추격수는 생존을 위한 길고 쓸쓸한 싸움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대지 조각에 몸을 맡긴 채 외층 공간 이곳저곳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오늘날 모두가 알고 있는 추격수가 마침내 나타나게 되었다.
추격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리고 그의 몸에 기생하는 생명체의 머릿수와 종류도 점점 더 많아졌다.
얼굴 한 번 마주친 적 없고 직접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필우(筆友)와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 외에 수많은 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고, 상대에 대해서도 한층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그녀가 육신 없이 대지 조각의 핵심에 봉인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봉인을 풀 방법을 찾았으나 시도해 볼 엄두를 못 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매우 특수한 존재였다.
봉인에서 나온다고 해도 숙주로 삼을 대상이 없으면 이성이 금세 소멸되어 버린다.
그러나 지금처럼 봉인되어있으면 차라리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
추격수는 그녀에게 자신을 숙주로 삼으라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힘을 품고 있었는데, 때문에 추격수를 숙주로 삼게 된다면 죽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추격수는 한 이족의 행방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자신의 조부와 부친의 시신을 가져가 재료로 만들어버린 이족이었다.
추격수는 계략을 짜서 고수들을 밖으로 유인한 뒤 몰래 근거지로 숨어들어 가 이 이족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조부와 부친의 남아있는 시신을 수습하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는 남은 뼈를 이용하여 한 채의 궁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대지 조각의 봉인을 파괴하여 자신의 오랜 필우를 구해내고, 그녀가 궁전에서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로써 추격수는 본격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다니기 시작했고, 외층 공간에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점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를 찾아와 영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소식을 들은 추격수는 새로운 계획을 품게 되었다.
대황으로 가서 자신의 오랜 친구를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그녀는 오직 이성만 있고 영혼과 육신은 전부 대황이라는 세계에 봉인되어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면 대황으로 가서 봉인된 육신과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었다.
그렇게 추격수는 새로운 계획을 짜며 준비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녀 역시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이들의 이성을 왜곡하고 소리 없이 정보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추격수는 자신을 찾아온 자에게 협력을 제공했고, 상대는 중요한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녀의 육신에 대한 단서를 손에 쥐게 된다.
유령호라는 해적선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진양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유령호의 사정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유령호가 어느 한 봉인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지키고 있는 것이 과거 외층 공간에서 대황 세계로 날아든 무언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단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졌고, 협력자는 진양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양을 필두로 한 대황 진출 계획이 완성되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은 채 준비를 이어나갔다.
설령 그 결과가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대황에 도달하여 그녀를 손에 기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장 중요한 첫걸음을 뗀 셈이었으니까.
그다음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 * *
그 뒤의 일은 진양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검둥이의 왼손으로 오지분뇌주를 사용하여 추격수를 순식간에 소멸시켜버렸다.
다만 진양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어떻게 도군에 버금가는 추격수를 순식간에 소멸시킬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검둥이의 왼손과 오지분뇌주의 상성이 좋아 큰 위력을 낼 수 있었던 덕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추격수가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인 덕분일 수도 있다.
물론 양쪽 모두 해당될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만 이야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굵직한 내용들이 전부였다.
진양이 정말로 궁금한 세부적인 내용들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추격수의 협력자의 정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살펴본 진양은 곧장 옥간을 하나 꺼내 그곳에 있는 내용을 전부 탁본했다.
추후에 다시 천천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탁본까지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법상서를 돌려주며 물었다.
“혹시 추격수에게 협조하신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저도 깨어나고 나서 알았습니다.”
왕백강은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대로 휴식을 취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졸음이 몰려오는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더군요. 깊게 자고 깨어나면 다른 사람의 일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경험, 기억, 그리고 감정까지. 모든 게 머릿속에 나타나게 되죠.
전 아주 오래전부터 나 자신이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강자의 일생을 경험했을 때는 제가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법상 경지에 오르며 법상서를 만들어냈고, 마침내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법상서가 제가 경험한 새로운 일생과 모든 기록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강자의 일생을 경험했을 경우 이렇게 해야만 이성을 회복할 수 있죠.
아마 이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게 물으셔도 대답할 수 있는 게 얼마 없습니다. 아마 진 대형보다 많은 걸 알고 있진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전 깨어나자마자 모든 기억을 법상서로 흘려보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새로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지 혼란이 와서 미쳐버릴 수도 있거든요.”
일단 지금까지의 상황만 봐선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왕백강은 첩자가 아니다.
그는 그저 우연히 진양과 마주하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정체는 여전히 묘연했다.
“무슨 질문이 하고 싶으신 건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 정체에 대해 궁금하신 거죠? 그 질문이라면 저 역시 제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해왔습니다.”
왕백강은 고개를 떨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도 제 자신에 대해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제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평범한 수도사로서 살아가다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며 영혼과 이성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더군요. 제 법상서에 적힌 모든 주인공들이 영혼과 이성이 날아가는 최후를 맞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매번 깊은 잠에 들 때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누군가의 일생을 경험하게 된다는 건 어쩌면 내가 겪었던 나의 일생도 나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생일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죠.
그렇다면 전 과연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그 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 기억에 남아있는 바로는 전 왕백강이 확실합니다. 심지어 그가 평생 경험했던 모든 경험과 기억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만 빼고 말이죠.”
어느새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운과 이성 모두 점점 더 강한 혼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진양은 곧바로 그의 뒤통수를 때려 기절시켰다.
바닥에 쓰러진 왕백강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왕백강은 이전에 마주했던 낯짝 두꺼운 그 왕백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그토록 낯짝 두껍게 행동했던 이유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낯짝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일단 안신향을 하나 피워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만들어온 탕을 꺼내 왕백강의 입에 흘려 넣어주었다.
우선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혹여나 놓친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추격수와 흑포 여인의 시신을 습득하지 못해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왕백강으로부터 중요한 단서를 입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