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052
1052화 더 생각하면 안 될 거 같다
흑림해의 길은 수백 리 넘게 쭉 뻗어있었다.
중간에 산봉우리나 숲이 우거진 곳이 있었으나 전부 무시하고 길이 뚫려있었다.
길 끝에는 무언가 부딪친 듯한 흔적도 남아있었다.
아마 누군가 싸움을 벌이다 한 사람이 충격에 의해 날아가며 길이 만들어진 듯했다.
갑자기 길이 만들어진 탓인지 길 양쪽으로 천 리 내에는 단 하나의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전부 몸을 피한 듯했다.
어느 대담한 자는 길을 따라 올라가 거대한 강을 찾아냈다.
전설로만 듣던 황천인 듯했다.
생각 없이 강제로 강을 건너려다가 강에 빠져 골로 가버린 사람도 있었고, 배를 발견했으나 선뜻 오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흑림해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보고서를 모두 살펴보았으나 황천 위를 걸어 다니는 소녀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이상하군. 어디로 가버리기라도 한 걸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꽤 큰 싸움이 있었던 듯했다.
강한 제약이 존재하는 곳에서 이 정도의 파괴력을 내뿜고, 심지어 그 힘이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정도라면 결코 실력이 약한 자가 한 짓은 아닐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도군 정도 되는 실력을 가진 자일 듯했다.
정황으로 보아 그에게 당한 사람은 살아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꽤 강한 실력을 가진 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녀가 없다면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미리 내둔 뱃삯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황천에 있는 상고 지부 조각도 살펴볼 수 있고, 또 다른 곳을 통해 갈 수 있는 상고 지부 조각도 살펴볼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그곳에서 한 신목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 전설로만 존재하는 상고 지부의 명령신목(冥靈神木)과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진양은 지기진체, 원자진체, 만수진체를 모두 익혔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지기지체, 원자신환, 그리고 만수지신도 모두 익혔다.
이어서 이화접목 신통력과 그에 맞는 목속지체(木屬之體)를 익혀야 한다.
한 번에 목령지체에서 진체를 만들어내려면 많은 양의 특수한 자원이 필요하다.
현재 대황에 떠돌고 있는 신목 조각은 종류도 제한적이고 등급도 그저 그런 수준이었으며 수량도 매우 적다.
여족의 성수는 등급은 충분하지만 진양과는 별로 상성이 좋지 않다.
게다가 진양은 많은 양의 자원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남의 성수를 베어버릴 순 없는 노릇이다.
외층에서 날아든 신수는 상성은 좋지만 양분으로 삼을 만한 능력이 되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만약 능력만 있었다면 진작 양분을 삼았을 것이다.
새로운 단서를 발견하게 되니 진양은 온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상황만 지켜보고 들어가진 말까? 그 소녀가 사라졌다면 다른 지부 조각부터 살펴보는 게 더 좋을지도.’
생각을 마친 진양은 밖으로 나왔다.
송충이는 열심히 잎사귀 조각을 씹어 삼키면서도 시선만은 닭에게 향해있었다.
나름 닭의 열띤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직 새로 털이 자라나지 않은 칠채조는 그 옆에서 함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는 몰라도 열심히 배운 내용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돼지 녀석은 늘 그렇듯 성실하게 탕을 끓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묵양을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군.’
녀석이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고기 방패로 사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묵양, 나랑 흑림해 좀 다녀오자. 아마 상고 지부 조각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를 거야.”
“알겠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묵양은 다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녀석은 보기 드물게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진양을 붙잡았다.
“진양,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묻고 싶은 게 있다고?”
진양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뭔데? 얘기나 해봐.”
“외층 공간에서 돌아오는 길에 벼락과 천화를 겪었는데, 천마와도 마주쳤었거든…….”
“천마라고?”
“그래. 꽤 괜찮은 녀석이라 한참 동안 대화도 나눴었거든.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 온 게 있었는데,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던 참에 녀석이 그걸 생각나게 도와줬었다. 다만 녀석이 탈사를 시도하면서 얘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죽어버려서 말이야. 아쉽게 되었지 뭐야. 그래서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어.”
진양은 진심으로 크게 놀랐다.
그러니까 그는 석상처럼 멍하게 서 있던 게 아니라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묵양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 진심으로 반성했다.
“말해봐.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그때 천마 녀석과 대화를 할 때, 난 영혼도, 육신도, 감정도 없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생명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했었다. 내가 어쩌다 일념의 바다라는 곳에 생겨난 것인지, 어쩌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된 건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도 했었지.
나의 과거의 기억이 어디로 간 건지 알고 싶다. 내 스스로 과거의 기억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 속에 잊혀져 버린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기억이 없던 건지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이 된 건 내가 스스로 이런 모습으로 변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알고 싶다.
나라는 존재를 인간, 혹은 하나의 생명체로 볼 수 있을까?”
묵양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처음이었다.
진양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사실 이 문제들은 진양조차도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묵양이 큰 고민에 빠진 걸로 보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질문을 들어보니 과거의 사건이나 기억에 대해 궁금해한다기보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욱 알고 싶은 듯했다.
자신이 인간인지, 아니면 평범한 생명체인지, 아니면 조금 특별한 생명체인지 말이다.
지금까지 보았던 묵양의 모습을 다시 돌이켜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녀석은 인형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 꺼리고 혈육 위장 상태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하는 듯했다.
‘망할 천마 녀석, 괜히 묵양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흐려놓다니. 살아있었으면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어줬을 텐데 말이야.’
진양은 한 걸음 다가가 묵양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 없어. 과거가 어땠는지 뭐가 중요해?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굳이 얽매일 필요 없어.
하지만 지금의 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명체가 확실해. 넌 상고 인간 십이사 중 한 사람인 인형사잖아. 물론 짝퉁이긴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넌 사람이야. 단지 유별나게 강한 것뿐이지. 하지만 인간 강자들도 그건 마찬가지잖아. 유별나게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한 사람도 있고 말이야.
그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 없어. 앞으로 누구든 네가 인간이 아니라고 헛소리를 한다면 그건 그냥 널 욕하려는 것에 불과하니까 망설이지 말고 죽여버리도록 해.”
“날 욕하는 거라고?”
“그래. 그냥 면전에 대고 욕을 한 거지. 그럼 녀석이 너랑 마음을 터놓고 진심으로 얘기라도 한 줄 알았어? 그럴 리 없지.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어.”
“그렇군. 진양, 고맙다. 덕분에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의문이 풀렸다.”
다행히 녀석은 과거의 일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듯했다.
진양은 몰래 안도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묵양의 문제에 깊이 빠지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묵양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일념의 바다에서 윤회의 고리가 반복될 때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생명체들은 기억을 잃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선 크게 의문이 없다.
하지만 묵양의 모습에 대해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묵양이 여러 차례의 윤회를 겪는 도중 세계의 본질과 윤회의 존재에 대해 깨닫게 되어 조금씩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면 이상할 건 없다.
그러나 처음 일념의 바다에 존재할 때부터 이런 모습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는 곧 묵양이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간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세계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복되는 윤회의 고리 속에 점차 자신이 본래 알고 있던 것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 속에서 조금씩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의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이미 참고가 될 만한 사례도 있다.
바로 가짜 몽사였다.
그 역시 세계의 본질을 깨달았었다.
게다가 일념의 바닷속에 또 다른 가짜 십이사는 없는 듯했다.
가끔 소문이 떠돌긴 했으나 실제로 존재하진 않았다.
당시에는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
일념의 바다는 본래 진짜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일부만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할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를 물며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묵양이 정말로 일념의 바다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외부에서 온 존재라면, 과연 누가 이토록 강인한 인형 몸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냈단 말인가?
답은 단 하나, 진짜 인형사뿐이다.
어째서 일념의 바다에 들어온 것일까?
어째서 끝없는 윤회를 경험했던 것일까?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
세월이다.
일념의 바다에선 끊임없이 윤회가 반복된다.
수만 년을 살아갈 수 있는 강자에겐 시간이 멈춰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한한 세월을 얻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묵양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대담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쩌면 묵양이 진짜 인형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생각은 계속해서 한쪽으로 기울었다.
자기 자신으로 위장을 한다면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가짜로 여기게 된다.
사실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는 꽤 있다.
예전에 풍수사의 땅에서 묵양에게 남겨진 문구를 발견한 적이 있다.
당시 그곳에서 각종 언어와 문자에 대한 지식을 손에 넣기도 했었다.
돌이켜 보니 당시 풍수사가 남긴 문구에선 묵양이라고만 언급을 했지 진짜 묵양인지, 아니면 가짜 묵양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게다가 묵양의 인형 몸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 여러 상황을 겪었지만 묵양은 단 한 번도 버텨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진양은 세상 태평한 모습인 묵양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곤 재빨리 고개를 흔들며 복잡한 생각 속에서 빠져나왔다.
왠지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러다간 건드려선 안 될 비밀에 접근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묵양이나 십이사 중 다른 사람을 들쑤실 필요도 없다.
일념의 바다만 떠올려봐도 자연스럽게 다른 추리 결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