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221
1221화 홀로 모든 걸 이루신 문주님
모두들 비석을 살펴본 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보다 못한 포명백이 한마디 했다.
“저 글씨……. 정말 못 봐주겠군요. 제가 열 살, 아니, 여덟 살 때 썼던 것보다도 더 못 쓰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소리!”
서천연이 곧장 반박했다.
“저 글씨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함이 담겨있습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경솔하게 판단을 내려선 안 됩니다.”
“그래서 다들 저 글을 누가 남겼다고 생각하나?”
한창 글씨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끼던 털보가 돌연 듯 물었다.
너무 심오해서 털보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영원의 연옥’이라는 글씨뿐이었다.
“비석의 모양으로 보아 결코 자연스럽게 생긴 건 아닌 듯합니다. 필적을 보아하니 여러 언어에 능통한 누군가 쓴 게 분명합니다.
가장 위에 적힌 인간의 언어는 지금 시대에 쓰는 언어지만, 바로 아래 적힌 요문은 십만 년도 더 전에 쓰던 언어입니다.
상고의 언어부터 현대의 언어까지 전부 정통하다니. 나이 많은 고수보단 현대 시대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한데…….”
여기까지 말한 서천연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흠칫 놀랐다.
“맞다. 이건 문주께서 남기신 거다.”
털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특히 저 지렁이 같은 글씨가 가장 큰 증거일세. 문파 내에 남아있는 암호 전적만 봐도 알 수 있지. 저 필적은 문주 특유의 필적이 확실하네.”
모두들 놀란 눈으로 비석을 바라보았다.
진양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의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인 걸까?
지난번에 봤을 땐 그다지 강한 기운은 느끼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진양은 일부러 이들 앞에서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글씨만 보고도 연옥을 떠올리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그 누구도 아직 비석의 내용에 대해 깊이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
털보조차도 영원의 연옥이라는 글씨만 이해한 게 전부였다.
“저기 비석 옆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들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엔 정말로 발자국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서 비석을 세운 다음 자리를 떠난 듯한 흔적이었다.
모두들 다시 한번 놀란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털보의 말이 맞다.
이들의 문주인 진양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사람이 분명했다.
한편, 서천연은 발자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문주께선 도대체 왜 이런 비석을 남기신 걸까요? 흔적만 보면 문주께선 이곳에 갇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일부러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비석을 남겨두신 걸까요?
그 말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 문주께선 이미 우리의 정체를 알고 계셨다는 뜻인데.”
털보는 문득 몽의가 조용히 그를 불러놓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양은 전도인의 말에 속아 도문에 들어오게 되었다.
때문에, 도문에 소속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 도문 사당에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의리를 매우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비록 말로는 도문에 정을 뗐다곤 했지만, 막상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주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일은 절대 도문에 손을 벌리지 않았다.
웬만해선 전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한 것이다.
털보는 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문주인데 도문의 거점조차 모르는 사람이 문주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닐 순 없는 법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이대로 모른 척할 수는 없다.
아무 대가도 없이 책임만 지도록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털보는 이번 일을 기회 삼아 큰마음 먹고 동문들을 이끌고 함께 망자의 세계로 온 것이다.
그는 언제든 진양이 필요할 때라면 그의 옆에 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진양이 남긴 비석을 바라보는 털보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진양은 이들의 정체를 알아본 게 분명하다.
겉으로는 모른척하며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이들이 걱정되어 일부러 이런 비석까지 남겨준 것이다.
다만 수많은 방법 중 왜 하필 비석을 세운 것인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석에서 흘러나오는 오묘한 힘은 산 자의 세계에선 찾아볼 수 없는 힘이다.
털보는 가부좌를 틀며 자세를 바로 한 뒤 비석에서 흘러나오는 오묘함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며칠 뒤.
털보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그렇구나!”
“조사님,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포명백이 물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의 오묘함은 문주께서 남기신 게 아닐세. 문주께선 영원의 연옥의 변화를 꿰뚫어 보시고 변화를 유도하여 영원의 연옥의 오묘함을 비석 안에 깃들게 만든 걸세.
비석이 품고 있는 힘은 곧 영원의 연옥의 힘. 즉, 진정한 망자의 세계의 힘이라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진정으로 망자의 세계에 속한 힘이란 말일세!”
털보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 일부러 두 번이나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들이 생전에 익혔던 공법은 이곳에선 대다수가 무용지물이다.
설령 이성이 깨어났다고 해도 계속해서 수련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산 자의 세계의 규칙과 산 자의 세계의 힘에 엮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양이 남긴 비석에 깃든 힘은 온전히 망자의 세계에 속한 힘이다.
여기에 연옥의 힘을 빌려 실체화시킨 것이다.
공법은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참고할 만한 게 있었으니까.
도문 사람들은 무언가를 참고하여 자신에게 알맞은 공법을 만들어내는 데 특화되어있다.
“그렇군요. 문주께선 저희를 대신하여 발을 붙일 곳을 찾아주시고, 또 공법을 만들어 주실 생각이셨던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 비석을 세우신 거죠.”
새로운 곳에서 세력을 세우고 전승을 이어나가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적합한 장소가 필요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영원의 연옥은 세력을 세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둘째, 기반으로 삼을 만한 공법이 필요하다.
비석 안에는 영원의 연옥에 가장 알맞은 공법이 깃들어있다.
이것은 전승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공법도 있고, 충분한 장소도 있고, 거기에 사람까지 충분했으니.
이곳만큼 발붙이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보아하니 문주께선 이미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준비해 주신 모양입니다. 문주께서 자유롭게 연옥을 드나드실 수 있었던 건 영원의 연옥에 가장 잘 맞는 힘을 손에 넣고 그에 상응하는 공법을 만드셨기 때문이 분명합니다.
만약 저희도 이것을 깨닫고 익힌다면 단순히 망자의 세계의 공법만 손에 넣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이곳을 드나들 수도 있게 됩니다.
영원의 연옥은 천연 함정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천연 요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망자의 세계의 변화를 고려해 보면 이것보다 더 완벽한 계책은 없을 것 같습니다.”
서천연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양은 겉보기엔 약해 보이고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진양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찼다.
털보도 이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했다.
확실히 비석에는 영원의 연옥과 잘 어우러지는 오묘한 힘이 서려 있다.
이를 통해 연옥의 공법을 깨닫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아니, 현재 이들의 능력으론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연옥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이곳을 지나는 다른 이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면서 비석에 있는 것들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적합한 공법을 깨닫기 위함이었다.
* * *
몇 달 뒤.
더 이상 이곳을 지나가는 외부인은 아무도 없었다.
털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또 다른 힘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죽음의 기운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기운은 마치 연옥의 힘과 같았다.
그의 뒤로 거대한 인간의 허상이 나타났다.
그 아래로는 거대한 수레바퀴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곳에선 순환이 반복되며 오묘한 변화들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거대한 허상은 털보의 몸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털보의 몸에 있던 죽음의 기운은 반복되는 순환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힘이 되어갔다.
훨씬 더 강하면서도 훨씬 더 다루기 쉬운 오직 자신에게 속한 힘이었다.
무엇보다 연옥의 기운과도 상당히 잘 어우러졌다.
몸을 일으킨 털보는 진지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며 연옥 안으로 향했다.
순간 연옥 내부에 털보의 일상이 환영이 되어 나타났다.
그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나갔다.
조금씩 모든 환영이 수축되었고, 그의 체내에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 안으로 흘러들었다.
모든 환영들은 수레바퀴 안에서 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것들은 더 이상 털보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연옥 안에 있던 힘도 털보를 향해 빨려들어 갔다.
그는 공법과 연옥이 완벽하게 어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공법을 조절했다.
이때, 털보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연옥을 빠져나왔다.
“기초 공법은 모두 깨달았네. 이름은 그냥 ‘영원의 지옥’이라고 부르도록 하지. 모두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나가게. 난 계속해서 공법을 온전하게 보전해 나가겠네.
문주께선 홀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빈틈이 있을지도 모르는 법. 그분께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으니, 우린 그것을 온전하게 만들어 다시 문주께 바치도록 할 것이다.”
“조사님의 분부를 받듭니다.”
더 이상 이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의심하는 이도 없었다.
과연 문주는 상상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굳이 이들이 나설 것도 없었다.
문주는 이미 공법부터 산문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 둔 것이다.
이들은 그저 뒤를 지키는 게 전부였고, 그 사이 진양은 홀로 모든 것을 마쳤다.
* * *
한편, 진양은 이미 연옥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 와있었다.
한 무리의 도문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 덕분에 진정으로 망자의 세계에 속한 첫 공법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그들은 위험한 영원의 연옥을 자신들의 새로운 문파 거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진양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양은 한참 동안 쭈그려 앉은 채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는 강을 살펴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선구자가 되는 게 크게 득이 될 게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대지의 핵심이 되는 곳엔 반드시 엄청난 보물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강은 마치 수은과 같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소설책에 적힌 바에 따르면 이곳을 날아서 건너는 건 불가능했고, 그 무엇보다 강에선 떠오르는 게 불가능했으며, 들어가는 즉시 녹아버린다고 한다.
전설로만 듣던 약수(弱水)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