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10
310화 그래도 나름 안심되는군
“쳇.”
검둥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저건 논(論)이라는 거다. 개관정론(蓋棺定論,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은 뒤에 결정된다)의 논 말이야. 살아있는 사람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고, 죽은 사람에 대해서만 개관정론을 내리는 거지.”
“살아있는 사람을 세뇌시킨단 말이야?”
“비슷하지. 죽은 사람이 개관정론을 당하면 살아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고정관념처럼 박히게 되는데, 심지어 가족조차도 다시 생각을 바꿀 수 없지.”
“뭐야? 그럼 별거 아니잖아. 그냥 심통 부리는 게 전부잖아.”
“심통 부리는 게 전부라니? 논은 상고 천정의 비전 보물 중 하나라고. 상고시대 때조차도 매우 귀하게 여겨졌던 보물이라고. 넌 아직 약해서 모르겠지만, 진짜 강자들은 결코 힘만으로 강자의 자리에 오른 게 아니라고.
일부 특수한 공법을 익힌 강자들은 죽어도 완전히 죽는 게 아니야. 설령 육신과 이성이 모두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강자는 원력(願力)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되지.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개관정론을 당한 사람은, 특히 ‘간영소인’과 같은 논에 당한 사람은 절대로 부활할 수 없게 돼.
심지어 나조차도 이 정도로 원한을 산 적이 없는데 장해도군 그 녀석, 진짜 재수가 없었나 봐. 원한을 품은 상대가 공백 논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진양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세뇌쯤이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자신을 노리고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장해도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쪽지를 받을 때, ‘자소도군 이 인간은 어린애도 아니고 죽어서까지 남을 욕하는 쪽지를 남기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단순히 소심하게 남의 험담을 적은 쪽지를 남긴 게 아니다.
죽일 듯 미워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장해도군이 부활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전에 차단해버리기 위했던 것이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쓸데없는 짓을 벌인다고 생각하다니.’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이제 자소도군의 부탁은 모두 들어준 셈이니까.
게다가 방금 전 노란 종이가 날아들었으나 석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역시 좋은 일이었다.
만약 장해도군의 이성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면 결코 노란 종이가 탑에 붙어있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었다.
노란 종이의 정체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서려 있는 힘과 필적은 전부 자소도군의 것이었다.
장해도군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자가 발작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된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습득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진양의 계획은 조금이나마 순조로울 듯했다.
뜻하지 않게 알게 된 사실이었으나, 상당히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검둥아, 고맙다. 역시 배운 사람은 다르네. 앞으로도 모르는 게 있으면 종종 물어볼 테니까 잘 부탁할게.”
비록 가끔씩 까다롭게 굴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녀석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진양으로부터 뜻밖의 칭찬을 받게 된 검둥이는 의심부터 했다.
단 한 번도 진양의 말을 겉으로 드러나는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지?’
그러나 진양은 별다른 꿍꿍이 없이 깔끔하게 떠났다.
“이봐, 닭. 진양이 방금 했던 말, 무슨 뜻으로 한 거야? 지금 나 욕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그렇지 않을까? 진유덕 저 녀석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는 건 본 적이 없거든. 분명 널 비꼬려는 게 틀림없어.”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검둥이가 이를 부득 갈며 씩씩거렸다.
“진양, 이 자식! 이젠 욕까지 빙빙 돌려서 하는구나.”
한편 좋은 정보를 얻게 된 진양의 발걸음은 한층 더 가벼웠다.
그렇게 이틀 정도를 더 걸었다.
검은 석탑과의 거리는 어느새 손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콰광-
커다란 굉음이 비경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늘 위로 새까만 실금이 가더니 쩍- 하고 틈이 벌어졌다.
수백 리 너머로 벌어진 틈 너머로 밤하늘이 펼쳐졌다.
밤하늘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틈이 점점 크게 벌어지며 유성우가 되어 지면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의 가장자리로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번갯불이 번쩍였다.
흉포한 번갯불의 바다에 별로 가득 찬 바다가 나타났고, 그 중심으로 하늘을 절반 이상 뒤덮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양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 현상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이, 이건……. 다보천륜(多寶天輪)!’
자소도군의 다보천륜이 확실했다.
하지만 분명 허공으로 흘러가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던가?
순간, 진양의 머릿속으로 한 줄기의 빛이 번쩍이며 지나갔다.
진양의 시선이 검은 석탑에 붙여진 노란 종이쪽으로 향했다.
‘젠장! 그랬구나. 저건 지표였던 거야!’
진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소도군, 이 인간도 참. 죽을 거면 그냥 곱게 죽지. 뭐하러 이런 개고생을 사서 하는 거냐고? 설마 다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거야? 기껏해야 비경을 빼앗은 게 전부잖아.
장해도군은 이미 죽었고, 개관정론까지 했으면서 뭘 또 직접 찾아오려는 건데?’
이렇게 되면 진양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기게 된다.
괜히 장해도군의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습득 능력을 사용하려던 진양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이었다.
자소도군은 엄청나게 속이 좁은 인간이 확실했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장해도군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쩔 셈인 건데?’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진양 자신까지 이용을 당했다는 사실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소도군은 결코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다.
과거 그가 가졌던 힘을 생각해 보면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소도군에 대해 가졌던 인상도 장해도군과 연관되어있지 않는 한 상당히 온화했던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엄청난 착각이었다.
자소도군은 끝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장해도군에게 개관정론까지 가하며 그가 부활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완전히 밟아놓았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자소도군이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훨씬 더 커 보였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분명 전공 공법으로 자소도경을 택할 것이다.
수많은 경전 중 기초를 두고 논하자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완벽한 절세의 도기를 갖기 위해선 반드시 선천 홍몽자기가 필요할 것이었다.
이 정도 되는 선천지물은 다른 대세계라면 몰라도 이곳 대세계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걸 포기할 리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니 진양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최악의 상황을 두고 고려한다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물론 자소도군은 지금까지 진양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벌인 적은 없긴 했다.
진양에게 선천지물을 선물로 주었고, 길까지 인도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단순히 장해도군이 묻힐 만한 곳이 없도록, 그가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미 충분히 이루지 않았던가?
어째서 진양을 이용해 지표까지 설치하도록 했단 말인가?
자소도경은 들어오는 방법부터 매우 기괴했다.
아홉 마리의 피를 흘리는 마룡이 비경의 길을 이루고 있었다.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아홉 마리의 마룡이 밧줄처럼 얽히고설켜 자소도경이 허공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상태였으니 대세계의 가지에 붙어있진 않으나 완전히 떨어지지도 않았다.
거기에 구 층 검은색 석탑까지 도궁의 정중앙에서 비경의 기맥 핵심을 진압하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자소도군이 지금 이 순간에 오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비록 자신이 만들어낸 비경이긴 하지만 스스로도 자소비경을 찾지 못한 것이다.
과거 끝없는 허공으로 들어왔을 때, 스스로를 추방하여 영원한 잠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시기를 노려 끝없는 허공에서 편리하게 자소비경으로 들어오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이러면 말이 된다.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실마리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었다.
이 모든 것이 과거의 지도부터 능침의 출현까지 전부 하나의 판국이었다면?
생각할수록 의문은 늘어갔다.
‘지도는 도대체 어디서, 누가, 왜 만든 거고, 어떻게 퍼지게 된 걸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간담이 서늘해졌다.
지금까지 달려오는 동안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의 말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처음에 자소도군이 자신에게 왜 자소도경을 익히지 않느냐며 의아하게 여겼다가도, 나중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었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판국에서 짜여진 일이라면 자소도군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현재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장기말이 되기 적합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진양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문질렀다.
더 이상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생각할수록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마음을 안정시킨 뒤, 아직 허공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다보천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구 층 석탑을 바라보았다.
‘젠장.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순 없잖아? 장해비전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그것부터 일단 확인하고 보자고.’
설령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해도.
장해비전이 최고로 적합한 비전이라는 말이 가짜라도 해도.
어쨌든 하나 얻어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등에 업힌 소녀는 오히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이상 진양이 죽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말은 반대로 그녀를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름 안심되는군.’
진양은 부지런히 석탑을 향해 움직였다.
석탑 가까이 도착했을 무렵, 새까만 쇠사슬이 석탑에서 늘어지며 도궁 위로 떨어졌다.
석탑 아래로 아홉 층의 옥으로 만든 탑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의 세월을 그대로 맞은 것처럼 광택 하나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위로 높게 뻗어있는 검은색의 석탑은 심연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빛을 뿜어내지 않고 있었지만 보기엔 눈이 부셨고, 마기 하나 풍기지 않고 그저 우뚝 서 있는 것이 전부인데도 마음속에 공포심과 경의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