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35
535화 상고시대의 흔적
“뭐,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사과를 받았으니 됐습니다. 다들 너무 그렇게 숙이실 것까진 없습니다.”
진양은 감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이어서 대나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소저, 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정말 행복한 사람일 것 같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살펴 가시길.”
대나 덕분에 진양은 이번에는 무사히 무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오고 나서야 광폭 공법을 해제했다.
그동안 참아왔던 식은땀이 일순간에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았다!’
무덤이 있는 곳에서 한참을 벗어난 진양은 뒤를 돌아보았다.
꽤 한참을 걸어왔으나 여전히 우거진 숲 사이로 무덤의 모습이 보였다.
진양은 조용히 손에 들려있는 청옥 비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손에 들려있는 청옥 비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헛것을 보거나 꿈을 꾼 것은 아닌 듯했다.
“검둥아, 아직 살아있지?”
“그럼 죽었겠냐? 자꾸 귀찮게 굴지 말고 본론만 말하라니깐.”
“뭐야?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왜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난 또 내가 헛것이라도 본 줄 알았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괜히 거기서 기척을 내기라도 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단 말이야.”
“뭐라고? 그럼 녀석들이 네 정체를 느낄 수 있단 말이야?”
상당히 의외였다.
검둥이는 해안마석에 눌려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상태다.
심지어 진양조차도 그를 누르고 있는 해안마석을 치울 수가 없었다.
현재 진양이 그를 볼 수 있는 것도 진짜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힘을 외부로 뿜어내 만들어낸 모습에 불과하다.
“말했잖아. 이곳엔 네가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존재들이 잔뜩 있을 거라고. 그러니 날 발견할 수 있는 녀석들이 튀어나와도 전혀 놀랄 것 없다고.”
“근데, 방금 그 녀석들 정체가 뭐야? 귀신도 아니고, 죽은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사람도 아니던 것 같던데.”
“놈들은 정괴(精怪)다. 전부 다 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지. 특히, 중간에 있던 무서운 눈을 가진 그 여자가 가장 강한 녀석이다.”
검둥이의 목소리는 한층 더 진지해졌다.
“그 여자는 아마도 나의 존재를 느꼈을 거야.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그 여자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거다. 그래서 네게 선물까지 쥐여주고 조용히 풀어준 거고.”
얘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그나마 이곳에 있는 생명체들 중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났는데, 그게 하필 진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정괴들이라니.
그렇다면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은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들이란 말인가?
어두워진 진양의 모습에 검둥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까지 겁먹을 필요는 없어. 그냥 네가 재수가 좀 없었던 것뿐이니까. 상고시대에서조차 저런 정괴를 만나는 건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드문 일이거든. 심지어 나조차도 정괴를 실제로 만나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가진 여인은 아무리 온갖 기괴한 것들이 난무하던 상고시대라도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게다가 십 년도 채 되지 않아 무려 아홉이나 되는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다니. 나조차도 처음 들어보는 경우야.
어쨌든, 녀석들은 죽어서도 강한 집념에 의해 눈을 감지 못했고, 그러다 천지원기와 이곳에 존재하는 특수한 힘에 의해 정괴가 되어버린 거다. 만약 그 집념이 풀리지 않는다면 영원히 저런 상태로 살아가겠지.
무엇보다 그들은 집념 그 자체로 이루어진 존재인 만큼 스스로 생각하고 납득하여 집념에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지. 그들이 왜 널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을까? 또 그 여자가 왜 네게 이런 보물을 선물로 줬을까? 잘 생각해 봐.”
확실히 검둥이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상고시대에 대한 내용은 거의 모르는 게 없었다.
‘녀석, 은근히 이럴 때마다 도움이 된단 말이지.’
하지만 비녀는 무식할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보물이라고?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그건 아마 이 보물을 만들어낸 사람만 알겠지. 정 아니면 가서 그 여자한테 물어보던가. 뭐, 걱정할 건 없어. 그건 확실히 보물이 맞으니까. 게다가 네게 해가 될 일도 없는 보물이기도 하지.”
큰 문제가 없는 물건이라는 검둥이의 말에 진양은 곧바로 그것을 연화시킨 뒤 자신의 머리에 꽂아두었다.
진양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멀리서 보이던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양은 멀찍이 떨어진 산봉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멀리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로 추정되는 곳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불빛은 마을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사람의 목소리조차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검둥아, 아무래도 또 헛걸음을 한 것 같은데.”
“글쎄. 나도 딱히 느껴지는 건 없긴 한데.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패방(牌坊), 저건 전형적인 상고시대의 흔적이야. 게다가 패방 위에는 옥으로 만든 부적까지 붙여져 있지? 이곳이 부족에 의해 보호를 받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그건 곧 이곳에서 엄청난 인재가 나왔었다는 뜻이거든. 여기도 상고의 천정은 있어. 아니, 아마 네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신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야.”
“상고시대에 상고 천정과 상고 지부 외에 또 다른 것도 있었어?”
“있긴 있었지만 전부 천정과 지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 대부분의 범인들은 천정과 지부에 예를 갖춰야 했어. 그래야만 위험한 이 세상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어딘가 이상해. 상고시대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아.
일단 위험할 건 없어 보이니까 직접 가서 돌아보도록 해. 아마 범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 같긴 한데. 만약 이곳이 상고시대가 맞다면 이상할 것도 없어. 그 당시에는 감히 늦은 밤에 단체로 모여 무언가를 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잠이 드는 것. 이러한 습성은 상고시대부터 지금까지 인간들의 핏줄에 새겨져 온 것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라니.
그렇다면 간단한 정보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들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패방에 달린 부적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진양을 비추었다.
검둥이는 진양의 몸 표면을 뒤덮고 있던 마수의 힘을 잠시 거두었다.
빛은 진양을 한번 훑고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통과인 건가?’
진양이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검둥이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이곳으로 들어오려는 자가 인간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부적이다. 물론 부적의 힘으로 마을로 들어오려는 존재를 막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괜히 걸렸다면 일이 복잡해졌을 거야. 자, 앞으로 남은 건 네가 알아서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
진양은 마을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문 앞에 붉은 초롱불이 걸려있었다.
은은한 연기가 마을에 있는 모든 집을 뒤덮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알 수 없는 힘이 마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때, 시선을 느낀 진양이 어느 한 집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순간 진양을 몰래 쳐다보고 있던 누군가 쏙- 하고 숨어버렸다.
그리고 등잔불도 꺼졌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사방에서 온갖 농기구를 든 농부들이 몰려나와 진양을 중간에 에워쌌다.
“웬 놈이냐!”
남자들은 잔뜩 긴장된 얼굴로 진양을 노려보았다.
농기구를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진정들 하세요. 전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요. 그냥 밤도 깊고 해서 하루만 묵어가려고 온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 황야를 돌아다니면 위험하잖아요.”
이어서 진양은 은 주괴를 하나 꺼내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노인의 손에 건네주었다.
“많이 놀라셨죠? 사양 말고 받아주시지요. 사과의 의미입니다.”
과연, 어느 시대든 뇌물은 통하는 법이었다.
은 주괴를 받아든 노인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별일 아니니까 이만 다들 자러 가보도록 해.”
그렇게 모든 이들을 물리고 난 노인이 진양을 향해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진양은 노인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노인은 곧바로 자신의 아들에게 별채에 자리를 깔도록 했다.
그러자 진양이 그를 말렸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뭐, 그렇다면 편하게 하시오.”
이어서 노인은 진양을 본채로 데려갔다.
그리고 닭을 한 마리 잡아 탁주와 함께 상을 차려왔다.
“남의 돈을 받았으니 소홀히 대접할 순 없는 노릇. 허나 술상이 변변치 않은 점은 이해해 주었으면 하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상에 놓인 음식과 술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침까지 꼴깍거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한밤중에 소란을 피워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어르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와서 함께 한잔하시지요.”
진양은 괜찮다는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일전에 사둔 술을 한 병 꺼냈다.
그다지 독하지 않은 술로 범인들도 충분히 마실 수 있는 술이었다.
“수련자였군.”
노인은 놀란 듯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뀌어있었다.
“별것 아닙니다. 저 역시 한낱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니까요. 어르신, 일단 한 잔 드시고 천천히 얘기를 나누도록 하시죠. 저 역시 궁금한 게 많습니다만. 어차피 밤은 길지 않습니까?”
노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진양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는 척 술을 받아먹었다.
꿀꺽-!
술을 마시고 나자 노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오호, 참으로 훌륭한 술이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몇 병 남겨두고 가겠습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많이 있거든요.”
그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의 술을 더 마시고 나니 노인은 완전히 경계가 풀어진 모습이었다.
진양이 묻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망설임 없이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대단한 걸 묻는 것도 아니었고, 스스로를 산에 수련을 하기 위해 들어온 자라고 소개했으니 더 이상 의심할 것도 없었다.
한 시진 뒤.
노인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진양이 앉아있었다.
머릿속에서 노인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조정? 여기서 꽤 먼 곳에 떨어져 있소.’
‘산속은 위험하오.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산에 사람을 잡아먹는 괴수들이 득실거린다오. 게다가 이 앞에 또 어떤 괴물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름이 뭐더라…….’
‘조정? 그게 무슨 말이오?’
‘국호가 뭐냐고? 어……. 뭐더라. 무슨 영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대영이었던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