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542
542화 참혹한 진상
진양은 곧바로 검둥이에게 물었다.
“너, 여기 들어왔던 입구 위치 어디 있는지 기억하고 있지?”
“갑자기 그건 왜? 그건 그렇고 왜 갑자기 이곳을 봉쇄시킨 거야?”
진양은 방금 있었던 일을 검둥이에게 얘기해주었다.
모든 상황을 듣고 난 검둥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진유덕, 빌어먹을 자식! 죽을 거면 혼자 죽지. 왜 괜히 나까지 이런 곳에 갇히게 만드는 거냐고!”
진양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됐어. 일단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자고.”
검둥이가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그래, 이젠 어떻게 할 건데?”
“어쩌긴. 일단은 한시름 놓은 거지. 적어도 대제가 무슨 일을 벌일지 가슴 졸이진 않아도 되잖아. 게다가 상대는 내가 입구의 위치를 완전히 잊은 줄 알고 있을 테니 상대도 경계를 한층 더 늦추게 될 거고 말이야. 일단 한동안 조용히 지내면서 상대의 경계심이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 수련이나 하면 돼.”
“일단 알았어.”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진양의 모습에 검둥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다소 귀찮게 굴거나 답답하게 굴 때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보아온 진양은 아무런 계획이나 확신 없이 함부로 싸움을 벌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목숨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당분간은 마수의 힘으로 내 육신의 표면을 뒤덮어줘. 괜히 생각이 흘러나가면 안 되니까. 그리고 혹시 일념의 바다나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뭔가 알아내는 게 있다면 곧바로 얘기해줘. 크건 작건 상관없으니까 생각나면 즉시 얘기해주면 돼. 알겠지?”
“알았어. 그 정돈 어려울 거 없지.”
진양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휴…….”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각오를 하긴 했으나, 정말로 기억이 사라지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양이 순순히 협조했으니 분명 후속 조치가 더 이뤄질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낯짝 두껍게 필요한 것도 얘기하고, 상대가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생각하게 하는 게 낫다.
다시 밖으로 나온 진양은 대제주가 남기고 간 책들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과연, 입구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검둥이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입구에 대한 사실을 몰랐을 것이고, 당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역시, 초면부터 히죽거리는 녀석치고 좋은 녀석은 하나도 없다니깐!”
대략 책 정리를 마친 진양은 백과사전 비슷한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이곳에 있는 각종 물건들이 기록되어있었다.
영약부터 광석까지.
전부 신정 관아에서 직접 정리한 것들로 외부에서는 결코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소저, 대제희님은 무사하시다니 더 이상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이곳에 꽤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 할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시간 있을 때마다 이곳의 원기를 이용하여 수련을 하도록 하세요. 이건 생각보다 드문 기회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앞으로 십 년 내에는 절대로 대제희님을 찾으려고 하지도 말고 찾아가지도 마세요.”
일단은 상대가 경계심을 내려놓기 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놀 수는 없다.
그동안 이곳에 널려있는 원기로 수련을 하거나 많은 것들을 배우며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십 년이나 지나고도 상대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면 진양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다.
놈들은 분명 감시자를 심어두었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곧 감시자의 실력이 적어도 자란보다 한 수 위라는 뜻.
하지만 겨우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두 사람을 감시하겠다며 이 정도 실력을 가진 강자를 십 년 이상 붙여두는 건 말이 안 된다.
‘좋아. 누가 먼저 지치나 한번 해보자고.’
읽을 책만 충분하고 할 일만 있다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집에만 박혀있을 자신은 있다.
그리고 이는 자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양은 우선 대제주가 남기고 간 책들부터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공법부터 여행기, 그리고 각종 물건에 대한 정보까지.
없는 것 빼곤 전부 다 있었다.
그렇게 진양은 금세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장 가희가 찾아올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눈앞에 쌓여있는 책들을 모두 읽기 전까지는 어디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편, 이번 일로 깨달은 점이 많다.
아무것도 모르면 일단은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점이다.
괜히 나섰다가 오히려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제주 그 녀석, 지금쯤 완전히 날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어차피 남아도는 건 시간이다.
일단 수첩에 적어두도록 하기로 했다.
그런데, 수첩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반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팔찌 주머니에 있나?’
결국 수첩은 찾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번에 중요한 걸 수첩에 적어둔 뒤 검둥이한테 맡겨두었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뭐, 어쩔 수 없지. 새로 하나 더 만들자.’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진양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얌전히 집에만 머물며 계속해서 공부만 했다.
책에는 꽤 쓸모 있는 것들이 많이 기록되어있었는데, 그중엔 특히 영제에 관한 내용이 가장 흥미로웠다.
만여 년 전, 영제는 혼란을 바로잡고 신정을 세웠다.
연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맥황(貘皇)과 妖帝(요제)를 베어 넘김으로써 마침내 혼란하던 천하는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진양은 이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이 보였다.
만여 년 전이라면 아마 대영 신조가 초조를 멸망시켰을 때일 것이다.
그때부터 영제는 정벌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하게도 그가 이곳을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몰라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이족 강자들은 죽인 것이 아니라 전부 가두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념의 세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강자를 제외한 나머지 강자들은 전부 다 영제에 의해 제압당한 것이다.
그리고 신정과 외부 세력 사이의 정벌전은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매년 이름난 강자들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를 따라 살펴보다 근대까지 오고 나니 외부 세력과 싸우다 죽은 인간 강자를 제외하고는 영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강자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요사(妖師)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요족을 모았고 신정을 공격해왔다. 이에 분노한 영제가 직접 나서며 번개로 요사를 처치해버렸다.’
이것이 책에 기록된 대략적인 내용이다.
요사는 한 인간 강자로 요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혼자서 수만에 이르는 요괴를 다스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혼자만으로도 강대한 세력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본래의 힘도 매우 강력했기 때문에 인간 중에서는 거의 손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의 강자였다.
단지 영제가 오기 전에 요사는 이족들을 잘 설득하고 연합하게 하여 인간들이 화살받이가 되지 않도록 했었다.
그러나 영제가 온 뒤로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인간은 패권을 잡게 되었고, 영제는 인간이 아닌 모든 이들을 이족으로 정의하며 자신의 길을 막는 모든 자들을 베어버리는 책략을 펼친다.
시간이 흐르고 정벌전이 지속될수록 원한과 마찰은 점점 더 쌓여갔고, 모두가 영제의 책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외부에서 이족과 만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싸움을 벌였다.
인간은 이족을 경계해야 했고, 반대로 이족 역시 인간을 경계해야 했다.
때문에, 서로를 만나면 반드시 한 쪽이 죽어야 끝나는 상황은 밥 먹듯 벌어지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진양은 조용히 책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달리 하는 사람과는 서로 의논하지 말아야 하는 법.
요사가 정말로 인간을 대상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영제가 그를 죽게 만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어차피 역사는 승리자가 써 내려가는 것이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전에 검둥이가 ‘영제는 해탈하여 영생을 얻고자 했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아마 이곳에 있는 모든 강자들을 전부 베어 넘겨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더 이상 그를 막을 사람조차 없게 되면 최종적으로 일념의 바다를 목표로 삼을 것이다.
신명이 남긴 일념의 바다라니.
그렇게 되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과거 삼신도군이 했던 것처럼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육체를 빌려 자신의 도를 이루려 할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삼신도군은 너무 부주의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그는 만인의 화살받이가 되어버렸고 결국 적어버렸다.
하지만 영제는 다르다.
그는 먼저 정의로운 편에 서서 사람들을 보호했고, 영웅이 되어 칭송을 받고 있다.
인간 강자를 죽이고도 역사를 남겨 모든 사람들을 세뇌시켰다.
진상을 알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그들은 판을 뒤집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이쯤 되자 진양은 돌연 듯 참혹한 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미 그가 이곳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만회할 수 없는 국면이 된 것이다.
영제는 그 누구도 떠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이곳의 비밀을 알기에 떠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설령 그가 자신의 입구가 어디인지 알고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해도 대황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만회할 수 없는 국면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려면 자신의 입구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진양조차 영제에게 자신이 입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들키게 된다면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진양이 다른 이에 발설할 리는 없다.
그저 조용히 책이나 읽으며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어느덧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식사도 거르고 잠자는 시간까지 아낀 덕분에 진양은 마침내 모든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이젠 이 세계에 대해 웬만한 토박이들보다도 훨씬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책을 탁- 덮고 눈을 비비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오랜 시간 누적된 피로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진양은 장향각에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자신이 어디 있었는지, 또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 이성이 회복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진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도 다른 사람에 의해 강제로 꿈속으로 끌려오게 될 줄이야. 다 알고 있으니까 숨어있지 말고 이만 나와요. 이래도 안 나오면 저 그냥 갑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눈을 감은 평범한 외모의 노인이 술주전자와 술잔 두 개를 가지고 진양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