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790
790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
진양은 가희를 따라 붉은 천이 깔린 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양은 아마 도문 역사상 최초로 당당하게 궁으로 들어온 사람이 아닐까?
그러나 진양은 조용히 마음속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밖으로 밀어내 버렸다.
사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황궁에는 결코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궁으로 들어온 지 일 다경도 채 되지 않았으나, 이곳에 진양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금제가 열 개도 넘게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영제의 법신이 머물고 있는 곳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영제와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나 숨기고 있는 사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행동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건 영제와 절대로 대면하지 않고 그를 죽이는 것이다.
심지어 영제 스스로도 누가 깔아둔 함정에 걸린 것인지 모르고 죽도록 하는 것.
그보다 완벽한 결과는 없었다.
진양은 다른 수도사들과는 다르다.
굳이 숙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최후를 맞게 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만들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
물론 직접 만나 성불시켜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할 수 없더라도 큰 상관은 없다.
그렇게 진양과 가희는 아무 말 없이 긴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이 다경 정도 흘렀을 무렵.
가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와요. 조회는 두 시진 후에 끝날 겁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저보다 먼저 나올 수도 있으니 궁 밖까지 안내해 줄 사람을 대기시켜놓을게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내시가 다가왔다.
“진 대인,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양은 내시를 따라 동궁으로 향했다.
거대한 황궁 내에 사람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삭막함마저 들 정도였다.
이어서 한 궁전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그곳에 가득 찬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미 죽음이 문턱까지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내시는 진양을 입구까지만 데려다주었다.
“진 대인, 그럼 편안하게 볼일 보시면 됩니다. 소인은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있어 이만 먼저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진양은 그에게 영석 하나를 쥐여주었다.
내시의 눈이 반짝였다.
무려 육 품 영석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통이 큰 사람이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내시는 한층 더 공손해진 모습으로 진양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건 그렇고 혹시 제가 어떻게 호칭하면 좋을지요?”
진양이 웃으며 물었다.
“소인 곽 씨입니다. 편하게 곽 영감이라고 불러주시지요.”
“곽 영감님,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시는 황궁에 상주하는 사람답게 황궁 사정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건 없다.
황궁처럼 낯설면서도 곳곳에 위험이 깔린 곳에선 내부 사정에 밝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
괜히 잘못된 길로 안내하기라도 했다간 쓸데없는 소동에 휘말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재수 없게 영제라도 마주친다면?
생각만 하기도 싫었다.
약간의 돈으로 이런 상황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다.
그는 가희에게도 신임을 얻었고, 무엇보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그 누구도 그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거기에 대담하게 진양이 건넨 뇌물까지 받아들이다니.
누가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미리 관계를 잘 맺어둔다면 후일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법!
한편, 곽 영감은 진양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내시를 아랫사람으로 보지 않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고, 통 크게 베풀 줄 아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특별히 신경을 써 주기로 했다.
“소인은 이만 공무 때문에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제 수하를 이곳에 대기시켜두도록 하겠습니다. 볼일을 모두 보고 나오시면 안전하게 밖까지 모시라고 미리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잘됐네요. 사실 황궁에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 막막했거든요.”
과연, 헛돈을 쓴 건 아닌 듯했다.
‘돈값은 하는 사람이군.’
조용히 대전을 빠져나온 곽 영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손에 들린 영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유령 선장, 참으로 통이 큰 자로군.”
계단을 내려오니 멀리서 그의 수하가 대기 중이었다.
내시가 손을 들자 그는 곧바로 가까이 다가왔다.
“말씀하십시오.”
수하는 내시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 대인께서 나오시면 바깥까지 안전하게 모시도록 하거라. 혹여나 누군가 길을 막는다면 나의 영패를 꺼내 해결하도록 하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떠나려던 곽 영감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수하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누군가 태자 전하를 찾아온다면 자네가 미리 들어가서 이 사실을 진 대인께 귀띔해 드리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수하의 손에는 사예감(司禮監)이라는 글씨가 큼직하게 새겨진 영패가 들려있었다.
영패를 받고 나니 이번 일은 결코 대충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층 더 깊이 깨달았다.
어쩌면 이번 일만 잘 마친다면 동궁을 탈출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진양은 자신이 방금까지 만난 사람이 궁 내의 내시들 중 가장 강력한 권한과 권력을 가진 사예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진양은 사방에 깔려 있는 짙은 죽음의 기운을 느껴며 궁전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동궁 내 다소 외진 곳에 큼직한 대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온몸에서 죽음의 기운을 내뿜고 있는 누군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면에 다소 색이 바랜 누군가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예전에 영제의 잘려 나온 기억 속에서 본 적이 있다.
과거 태자비의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였다.
진양이 가까이 다가왔으나 태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진양은 그를 지나쳐 초상화 앞에 놓인 향로로 향했다.
그리고 영향 한 개를 꺼내 불을 붙였다.
태자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 태자를 바라보았다.
진양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 뒤 들고 있던 영향을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뒤돌아 태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태자는 힐끔 진양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진양은 씨익 웃으며 한쪽에 놓여있는 포단을 가져와 태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태자 전하, 큰 깨달음을 얻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이제 보니 아직 남아있는 게 있으신 모양이군요.”
진양의 방자함에도 태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한마디 했다.
“확실히 이제 곧 죽음을 앞둔 몸이긴 하오만.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오? 아니면 본궁이 고통의 눈물이라고 흘리길 바라는 것이오?”
“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마음도 없고요. 큰일을 앞둔 상황에서 적막하실 것 같아 위로차 담소 몇 마디 나누려고 찾아온 것뿐입니다.”
“돌아가시오. 난 할 말이 없소.”
태자는 마치 고요한 호수와 같은 모습이었다.
진양은 아무 말 없이 앉아 태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한참 뒤.
진양이 입을 열었다.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하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죠. 일생의 집념에서 이리도 쉽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줄 알면서도 죽는 순간까지도 집념을 버리지 못하겠습니까?
모두들 전하께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덤덤하게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직접 확인하니 맞는 말 같긴 합니다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전하께선 그저 죽음을 원하시는 것뿐입니다.”
태자는 여전히 무표정은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러건 말건, 진양은 계속해서 할 말을 이어갔다.
“모두들 그러더군요. 태자 전하의 재능이나 능력은 조왕보다 못한 수준이라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전하께서 이토록 오랜 시간 태자의 자리를 지키실 순 없었을 겁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비록 전하께서는 다른 수도사들에 비해 경험은 부족하시겠지만, 아마 궁에서 보고 들은 건 그 누구보다도 많을 겁니다.
전하께선 결코 철두철미한 바보가 아니라는 사실은 저는 알고 있습니다.”
태자가 눈을 뜨며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진양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전하께서 덤덤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계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건 아무런 가치가 없을뿐더러 전하께선 본인의 실패를 철저히 받아들이시진 못하고 계시단 말입니다.
지금처럼 평온을 유지하고 계신 건 그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가치를 찾기 위한 것에 불과하죠.”
태자는 다소 놀란 눈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놀라실 것도 없습니다. 이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요.
전하의 장례식에 대제께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건 단연 전하뿐만이 아닙니다. 조정의 모든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전조의 세력들까지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죠.
모두들 전하의 죽음을 기다리곤 있지만, 이대로 죽으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하께서 떠안고 계신 신조의 기운, 거기에 최소 법상에 이르는 경지까지. 생기가 소멸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심지어 무덤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많은 자들이 전하를 쉽게 눈감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할 것입니다. 모두 상당한 골칫거리들이죠.
이대로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사건의 도화선이 되고 나면 만족하실 것 같습니까?”
진양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는 동안 태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죽음의 기운은 조금씩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용히 시냇물처럼 흘러나오던 기운은 어느새 강한 바람에 흔들리며 조금씩 거칠어지고 있었다.
태자의 마음이 혼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태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양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묻겠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아뇨.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시면 안 되죠. 태자 전하께서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반문을 던진 진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마 조용히 영면을 취하고 싶으신 게 전부일 겁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이죠. 그 후에 일어날 혼란은 전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 테니까요.
만일 이것이 전부라면……. 좋습니다. 전 상대가 죽으면 그 은원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일에 대해 세세히 따지지도 않겠습니다. 그동안의 일들이 태자 전하의 명에 따라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아랫것들이 전하께 잘 보이기 위해 벌인 것인지도 더 이상은 따지지 않겠습니다.
전하께서 죽으신 뒤에 제가 직접 염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전조 세력이 절대로 전하의 시신을 이용하여 어떠한 일도 벌이지 못하게 막아드리겠다고, 전하께서 무사히 영면에 취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약조드리겠습니다.”
진양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전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