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48
848화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
응백과 진양은 마당 한쪽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양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하나는 도움을 요청드리고 싶어서 온 거고요, 나머지 하나는 이제 형수님도 어느 정도 이곳에 발을 붙이신 것 같으니 사람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실 때가 된 것 같아서요.
현재 대영 신조는 매우 약해진 상태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모습을 드러내실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하게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요.”
산귀는 일반적인 수도사와는 달리 공양을 받아야 한다.
사실 괴산에도 지금껏 공양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괴산에 바쳐진 것들이다.
물론 괴산의 산귀로서 응백은 그중 일부를 취할 수 있긴 했지만, 산귀묘를 세우고 직접적으로 공양을 받는 것과는 그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회적으로 받는 것보단 직접적으로 받는 게 효과가 더 크다.
진양은 현재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영 신조가 괴산에 지낼 제사에 대해서도 일부러 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다.
다만, 살펴보고 있다가 어딘가 이상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진양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상대가 공손하게 정성을 다한다면 상관없겠지만, 불손하게 나오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적어도 같은 편이 난처해질 만한 상황은 만들어선 안 되는 법.
그러자 응백이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전 그저 한 사람의 외부인에 불과한걸요. 각을 세운다고 해도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난처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 말은 곧 뭐 하러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을 챙겨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을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냐는 뜻이었다.
진양은 피식 웃어버렸다.
“나름의 뜻이 있으신 건 알겠습니다. 다만, 전 늘 이래왔던 사람이라서 말이죠.
어쨌든 산귀로서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절호의 기회입니다. 형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주시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죠. 그러니 상황에 맞게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 어떠한 것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진양은 기쁘긴 했으나 그래도 한참을 달래며 상황에 맞게 움직이도록 했다.
응백은 확실히 산귀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성격을 가졌다.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누구도 적의를 느끼지 않게 하는 성격이었다.
진양의 말을 들은 응백은 다소 감동한 모습이었다.
말로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곤 하지만, 사실상 이번 일로 이득을 보는 건 그녀다.
어느덧 괴산에 들어온 지도 며칠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떠나봐야겠군.’
진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응백은 괴산 변두리까지 진양을 배웅해 주었다.
응백과 짧은 인사를 나눈 진양은 곧바로 다시 가희의 진영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조왕의 제사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반드시 일이 잘못될 거라고 확신을 갖는 이유.
그걸 떠올릴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괴산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에 산귀를 빼놓는다니.
심지어 산귀낭낭의 사당조차 없다니.
그럼 도대체 어디에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물론 이전에까지만 해도 산귀가 없었으니 사당을 지을 필요도, 제사를 지낼 필요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 * *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제사를 올리는 날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조왕의 진영 내부.
함께 온 예부의 관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부의 상서인 이태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상황을 감독할 사람이 빠지게 된다면 분명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 문제를 두고 관원들이 한참 논의를 벌였으나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결국 조왕이 직접 나서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조왕도 제사 예절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조정의 녹을 먹은 관리들은 자신들이 예부 상서로서의 기질은 상당히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함부로 결정을 내리거나 책임을 지는 것도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대신 결정을 내리고 책임져줄 사람을 찾은 것이다.
조왕은 이런 관리들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흔쾌히 모든 것을 떠맡기로 결정했다.
육부의 수장 중, 이태현만큼 강한 힘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었고, 심지어 기세가 가장 드셌을 때는 다른 부의 수장들조차 그에게 예를 갖춰야 했을 정도다.
때문에, 예부를 제외한 다른 육부의 수장들 중 그 누구도 이태현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현재 이태현은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 연고 없이 수십 년이나 실종된 것이다.
이대로라면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상 예부 상서의 자리는 공석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제는 다른 이로 대체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의 확고한 의지에 다른 신하들은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렇게 수장을 잃은 예부는 과거 육부 중 으뜸이었던 부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몰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다른 부처에 협조를 구하는 것조차 비굴하게 나와야 될 정도였다.
조왕은 마음 같아선 이번 기회에 수장을 잃은 예부 사람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때문에, 예부 관원들이 자신에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제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번잡하다.
괴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 역시 늘 하던 것처럼 괴산 내에 숨어있는 이름 모를 여러 종족의 고수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웃끼리 안부를 주고 묻는 그런 행위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때문에,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제물이나 과정도 그때의 상황에 맞게 조정되는 법.
현재 영제의 본존은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전조 세력이 대놓고 존재를 드러내며 날뛰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가장 철저하게 짓밟히며 멸망했던 초조의 잔당마저도 날뛰고 있다.
게다가 제사를 올리러 온 것도 조왕뿐이다.
즉, 모든 상황이 이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사의 과정부터 시작하여 제문에 사용되는 언어까지 대대적으로 조정이 필요하다.
이태현의 공석으로 아랫사람들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건 결코 이상할 건 없다.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 결정을 모두가 따르게 만들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진행되었고, 어느덧 제사 당일이 되었다.
괴산 변두리에 구십구 장이나 되는 높은 제단이 지어졌다.
그곳에는 각종 제기들이 준비되어있었다.
조왕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제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계획대로 이어졌다.
그가 제문을 낭독하자 황금빛 글자가 허공에 떠오르며, 괴산 멀리 날아가며 모습을 감추었다.
제사는 무려 세 시진이나 이어졌다.
조왕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자세를 마쳤다.
그를 보좌하는 예부 관원부터 제사를 보조하는 다른 태감들까지.
모두가 큰 문제 없이 자신의 맡은 바를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신조의 힘이 전혀 미치지 않는 천여 리 떨어진 곳에선 하얀 원숭이 비슷한 이수가 조각상처럼 산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조각상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눈에는 제물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제문을 모두 읽은 조왕이 이어서 다음 순서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원숭이 괴수 이수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쌩- 하며 제단 쪽으로 몸을 날렸다.
녀석은 매우 빠른 속도로 제단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방출된 원숭이 이수의 기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조왕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감히 괴산에서 제사 중인 신조 사람을 누가 습격한단 말인가?
조왕의 표정이 다소 굳어졌다.
‘대요다. 요기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족 고수일 가능성이 크다.’
영제의 생사도 불분명하고, 무엇보다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 상황이라 그런 걸까?
어쩌면 대영에게 새로운 것을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튀어나온 게 분명했다.
조왕은 손을 뻗어 그 누구도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한 채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무려 천 장이나 되는 거대한 원숭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처럼 제단 앞쪽 땅을 강타하며 박살 내버렸다.
이로 인해 일어난 돌풍으로 부서진 돌조각과 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돌풍은 곧장 제단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나 은은한 빛무리가 피어오르며 제단을 중심으로 방원 백여 장 이내에는 그 어떠한 위력도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냈다.
조왕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기서 상대를 공격했을 때의 결과와 공격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생각해 보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직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반응했다.
원숭이는 제단 위에 서 있는 조왕을 내려다보며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조왕이군! 진정하시게. 결코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니. 난 그저 좋은 마음으로 당신에게 전해줄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뿐이야.”
“백원왕(白猿王). 대영이 만만하더냐!”
조왕이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그의 뒤쪽 진영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한 곳으로 몰려들며 거대한 쌍두사의 형상을 이루었다.
마치 엄청난 고수가 강림한 듯한 기운이 사방에 풍겼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조왕은 한 손에는 친왕의 도장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결인을 맺었다.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백원왕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백원왕은 기괴한 웃음과 함께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진정하라니깐. 말했지 않은가?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라고. 정말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려고 온 걸세.
이번에 괴산에 새로운 산귀 대인께서 나타나셨다네. 이미 괴산의 절반 이상이 그분의 지배하에 들어갔지.
대영 신조를 대표하여 괴산에 제사를 지내러 온 자가 산귀 대인을 빼놓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큰일이 일어나겠지.
우리는 대영 신조를 두려워하지만, 산귀 대인께서는 결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분일세. 당신들이 괴산을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백원왕의 말에 조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이다.
심지어 정천사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한 눈치였다.
대영과 괴산은 서로가 서로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서로를 몰래 살피지 않기로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수만 년 넘게 양쪽 모두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철칙이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왕은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관성대(觀星臺)의 내감부터 예부, 정천사의 사람들까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천사의 사람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입을 꾹 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