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54
854화 진심으로 실망했다
일 다경 뒤.
서남생이 굳은 표정으로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는 심성낙에게 허리를 숙여 극진히 예를 갖추었다.
“심 대인, 어떻게 감사 인사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 대인,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시신은 밖으로 반출할 수 없다는 점만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오랜 시간 국가의 녹을 먹은 자입니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가능하면 최대한 시신을 온전하게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손 닿는 데까진 해 보겠습니다.”
* * *
대국공의 저택.
대국공과 허공진경 전수자는 서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희생이 클 텐데요.”
허공진경 전수자의 말에 대국공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피식 웃었다.
“아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세.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적으니 말이야.
내가 어째서 조왕 그 인간에게 맹약을 맺으라고 했는지 알고 있나? 그가 그 자리를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기 때문일세.
허나 그는 담이 너무 작다네. 죽음도 두렵고, 패배도 두렵고, 무언가를 잃는 것도 두려고, 책임을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그래서 나와 맹약을 맺은 걸세.
하지만 애초부터 그가 짊어져야 할 대가에 대한 부분은 크지 않았다네. 처음부터 맹약을 파기할 생각으로 그런 게지.
아마 대제의 자리에 등극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맹약을 파기할 걸세. 어차피 감수해야 할 희생도 크지 않으니 말이야.
허나 놈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이 맹약을 파기했을 때의 대가만을 생각했을 뿐, 공평 맹약이 어째서 공평 맹약인지는 간과하고 말았다네. 얻는 이득이 크고, 대가가 적을수록 내가 치러야 할 대가도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법일세.
이번 맹약은 애초부터 파기되기 위해 맺어진 맹약일세. 놈이 파기하려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파기하려는 거라 이 말일세.”
대국공은 옥간을 하나 꺼냈다.
그것에 힘을 불어넣자 어떤 장면이 투사되었다.
조왕과 대국공이 맹약을 맺을 당시 했던 말과 상황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었다.
“이걸 위흥조에게 넘기도록 하게나. 가능하겠지?”
“물론입니다.”
허공진경 전수자는 옥간을 들고 조용히 사라졌다.
대국공은 제자리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어떤 희생이 있을지…….”
* * *
이도, 위흥조의 저택.
허공진경 전수자는 위흥조가 잠시 외출을 한 사이 몰래 서재로 들어가 옥간을 두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서재로 돌아온 위흥조는 자신의 책상에 못 보던 옥간이 하나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흥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게 뭐지?’
옥간을 이리저리 뒤집어 살펴보니 평범한 기록용 옥간이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진원을 불어넣었다.
위흥조가 옥간에 진원을 불어넣는 순간, 내부에 담겨있던 장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수십만 리 떨어진 곳에 있던 대국공은 쿨럭-하고 기침을 했다.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순간, 이마에서 한 줄기의 빛이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기린의 형상을 하고 외뿔을 가진 이수의 허상이 만들어졌다.
이수는 대국공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대국공의 얼굴은 더욱 창백했다.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하하하! 무엇이든 이루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어찌 고통 없이 얻는 게 있겠나!”
조왕은 오직 단 것만 취하고 쓴 것은 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속은 것이다.
대국공은 자신의 최종 목표를 위해서라면 이익도 포기할 수 있었고, 희생도 충분히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조왕은 대국공이 이러한 사람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 * *
조왕부.
조왕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태자 책봉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을 때.
갑자기 조왕의 미간에서 한 줄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공평수의 허상이 만들어졌다.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국공이 맹약을 파기한 게 분명했다.
대국공이 자신을 찾아왔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맹약을 맺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애초부터 파기를 고려하며 맹약을 맺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용 따위는 크게 살펴보지도 않은 것이다.
“소인배! 감히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치다니!”
조왕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순간, 어떤 식으로 상대가 맹약을 파기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조왕의 절규와 함께 공평수의 허상은 사라졌다.
대신 대국공의 앞에 나타난 공평수의 입을 통해 조왕의 절규가 들려왔다.
그의 절규는 한 글자씩 실체화되어 대국공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고, 강하게 그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글자가 날아들고.
이번에는 공평수가 대국공의 머리 위로 날아가 앉았다.
실체화되었던 글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일 척이나 되는 긴 모자가 생겨났다.
공평수가 포효성을 내지르는 형상이 새겨진 모자였다.
대국공의 목이 심하게 꺾였다.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다.
그는 최대한 버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기운은 빠르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법상 최고봉에 수준에서 어느덧 법상 초입 경지까지 떨어졌다.
이쯤 되고서야 그는 간신히 머리를 들고 모자의 무게를 버틸 수가 있었다.
경지를 크게 줄이며 희생을 한 덕분에 모자의 무게와 압도적인 힘을 버텨낼 수 있게 되었던 것.
만약 모자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싶다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경지를 포기해야 한다.
모자 위에는 기이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큼직한 글자가 눈길을 끌었다.
‘소인배’
저택 내부에 있던 자들은 그것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화가 치밀어올랐다.
어떤 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아버렸다.
“하하하하!”
대국공은 재미있다는 듯 큰소리로 웃었다.
“소인배? 조왕, 아무래도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한 모양이구나.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느냐!”
대국공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멈춰 섰다.
겨우 이 정도 희생으로 거의 반쯤 보좌에 앉은 조왕을 끌어낸 건 오히려 이득이다.
영제의 성격상 조왕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도 결코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조왕은 끝이다.
사실 이는 조왕이 대국공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간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벌어질 결과나 다름없었다.
누군가의 핑계를 댈 것도 없었다.
사실상 이건 조왕의 문제다.
분명 어딘가 미심쩍다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품은 건 애초에 조왕이었으니 말이다.
대국공은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높이 솟구친 모자에서 강한 압력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수련 경지가 낮아지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눈을 감은 채 최대한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조식 수련을 통해 힘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다스리려고 노력해 보았다.
이대로 경지가 완전히 바닥을 치도록 놔둘 순 없었다.
어떻게든 법상 경지만은 유지해야만 했다.
재수 없게 도궁 경지까지 떨어지게 된다면 앞으로의 일들은 더욱 복잡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 * *
옥간의 내용을 살피는 위흥조의 표정은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큰일이구나!’
뒷일 따위 고려할 여유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영제에게 알려야 했다.
위흥조는 곧장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영제의 앞에 옥간을 내려놓았다.
영제는 옥간에 힘을 불어넣었다.
옥간에 기록된 내용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조왕과 대국공이 맹약을 맺는 장면이 흘러나오는 순간.
영제가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왕을 들라 하라.”
영제는 손을 흔들며 위흥조를 물러가도록 했다.
그렇게 대전 내부에는 영제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잠시 뒤.
불안한 표정의 조왕이 궁성에 나타났다.
대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대전 내에 영제 한 사람만이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보좌에 앉아있는 그를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느껴졌던 모든 공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영제가 자신을 불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이대로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자비를 구하고, 최대한 상황을 부인하고, 최대한 자신 역시 피해자인 것을 강요하려 했었다.
그러나 영제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마음이 바뀌었다.
그의 발목을 굳게 잡고 있던 무언가 깔끔하게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조왕은 앞으로 나아가 영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자, 폐하를 뵙사옵니다.”
영제는 아무 말 없이 조왕을 바라봤다.
한참 뒤.
영제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안타깝구나. 네가 미련하든 총명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태자 자리에 대한 미련만 버렸다면 천하의 그 누구보다 더 앞선 기점에서 시작하여 안정이든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을 텐데.
허나 황자가 태자의 자리를 탐내는 순간 여느 황족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악랄하게 굴든지, 아니면 자비롭게 굴든지. 패악 무도하게 사람을 베든지, 아니면 조용히 인내하든지. 대담하든지, 아니면 소심하든지. 어떤 식으로 행동하건 그건 네 스스로에게 달렸다.
허나, 절대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사리 분별이옵니다.”
조왕은 엎드린 채 조용히 대답했다.
영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엔 실망이 가득했다.
“틀렸다.
사리 분별이란 힘이 부족할 때나 지켜야 할 것. 허나 얼마나 많은 힘을 쥐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게 있는 법. 바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짐은 지난 삼만 년 동안 천하를 다스려왔다. 내겐 아들이라고 해봤자 너와 네 형 두 사람뿐이다. 네 형은 비록 태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한낱 법상 경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짐이 위엄으로 온 천하를 압도할 수 있는 이유. 결코 신조의 강력한 병력 덕분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나 스스로의 힘! 세 봉호도군을 능가할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너희들은 멀리 볼 줄을 모르는구나.
너희는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는 권력만을 좇았다. 그리고 이 모든 권세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잊고 살았다.
미련한 녀석! 감히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다니. 짐은 진심으로……. 실망했노라.”
영제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