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55
855화 조왕의 몰락
영제가 황자에게 이토록 긴 얘기를 늘어놓는 건 매우 보기 드문 일이다.
그가 처음 황위를 계승 받았을 때 아들은 죽은 태자 한 사람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사방으로 원정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삼만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얻은 아들은 지금 그의 앞에 앉아있는 조왕 한 사람뿐이었다.
천부적인 자질, 근골, 깨닫는 능력, 성품까지.
조왕은 모든 방면에서 태자를 능가했다.
태자가 황위를 계승할 그릇이 못 된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영제는 조왕을 눈에 두고 있었다.
일만 년 전, 그의 본존은 일념의 바다로 떠나기 전에 조왕은 충분히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충분히 대영을 번성의 길로 이끌어갈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설령 영제가 일념의 바다를 탈출한다고 해도, 신조의 발목에 감겨있는 쇠사슬을 끊어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이 필요한 건 여전하다.
영제는 태자와 조왕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고를 생각이었다.
태자는 그가 대제의 자리에 오르기 한참 전에 태자비에게 얻었던 자식이다.
그러나 조왕은 그로부터 삼만 년이 지난 후 만난 또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자식이다.
단순히 이러한 사실만 본다면 태자가 황위를 계승 받을 가능성이 가장 커 보였다.
그러나 태자는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판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대황 제일 신조의 태자인 그는 결국 수명이 다하여 죽는 우스운 결말을 맞고 말았다.
차자(次子, 둘째 아들)인 조왕은 자질도 충분했고, 깨닫는 능력도 탁월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태자의 그림자에 가려져 살았다.
그로 인해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막상 손을 써야 할 때는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혜로웠으나 결단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오늘날, 태자 자리를 노리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한심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스스로 실력을 충분히 갖추었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면 그 누가 감히 그와 태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일 수 있었겠는가?
조왕은 이 중요한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조왕은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진노와 호된 꾸짖음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영제는 의외로 차분하게 그에게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
만감이 교차했다.
씁쓸함이 몰려왔다.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분함과 억울함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일생 동안 그토록 바라며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리였는데.
그저 스스로를 계속해서 발전시켜나가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오는 자리였다니.
깨달음을 얻었지만 때는 너무 늦고 말았다.
조왕은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잘못했습니다…….”
울먹임은 곧 대성통곡으로 이어졌다.
어렸을 때 황궁에 있던 황자는 단 두 사람.
죽은 태자와 조왕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사이도 상당히 돈독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성장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황자로서 황위를 계승 받을 기회가 충분하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태자가 가진 위엄은 동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본심을 드러내면 태자는 가차 없이 그를 짓눌러버렸다.
성장한 그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왕으로 책봉되기 무섭게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세력을 불려나갔다.
세력의 규모는 점점 더 커졌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그리고 그의 지위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 태자가 호되게 대신들을 꾸짖는 것을 보며 자신 역시 동등한 자리에 오르길 바라며 동경했던 모습.
그런 건 잊혀진 지 오래였다.
조왕은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대성통곡했다.
영제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자지간의 정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건 깊은 실망뿐이었다.
차라리 조왕이 꿋꿋이 자신의 결정을 지켜내길 바랐다.
결코 자신이 전조 세력과 결탁한 것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쨌든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굴한 그의 모습은 오히려 영제의 분노를 일으켰다.
자비롭게 편안한 죽음을 내리려던 마음조차도 사라져버렸다.
영제가 팔을 휘두르니 조왕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영제는 그를 궁성 감옥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조왕은 그곳에 완전히 봉인된 상태로 갇혀버린 것.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본존이 사라진 지도 벌써 만 년이 흘렀다.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순히 정세만 변한 게 아니라 사람도 변했다.
영제는 조용히 보좌에서 일어나 대전 밖으로 나섰다.
그는 조용히 괴산 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본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길래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단 말인가?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 버렸다.
더 이상 법신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전조 세력이 점점 더 성급하게 구는 것도 본존이 돌아오기 전에 일을 해치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 * *
소식을 전해 들은 진양은 크게 놀랐다.
조왕이 이토록 빠르게 몰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현재 이도는 조왕에 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조왕이 전조와 결탁했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정천사에 의해 밝혀졌다.
이로 인해 조왕은 친왕 자리를 박탈당하고, 영원히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소문을 퍼뜨린 건 누가 봐도 대국공의 짓이었다.
놈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니 진양은 기가 찼다.
“대국공! 감히 내 계획을 망치려 들다니. 그것보다 이 자식, 상당히 뻔뻔한 놈이잖아?”
자신이 먼저 찾아가 상대를 꾀어놓고, 이제 와서 상대가 먼저 자신과 결탁했다고 소문을 퍼뜨리다니.
조왕은 진양이 손 쓸 틈도 없이 몰락해버렸다.
물론 조왕은 죽지 않았다.
대신 영원히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습득 능력을 사용하여 정보를 얻으려던 진양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무엇보다 조왕이 몰락하게 되면 이제 남은 건 단 한 사람, 주왕뿐이었다.
현재 모든 상황이 주왕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마땅히 용서받지 못 할 만한 죄를 짓지도 않았다.
이건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주왕은 분명 전조 세력과 손을 잡은 게 분명했다.
* * *
조왕이 몰락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조왕이 몰락하기 무섭게 많은 이들이 주왕의 발밑으로 몰려들었다.
심지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남생을 맹렬히 공격하던 자들까지도 완전히 태세를 전환했다.
죄를 지은 건 서남생이 아니라 그의 손자일 뿐이고, 현재로서 이부 상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서남생 한 사람뿐이라며 그를 변호하고 나선 것!
이대로 서남생을 사건에 끌어들이는 건 가혹한 처사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뿐만 아니라 서남생은 오히려 정천사와 형부에 적극 협조하며 관련된 자들을 색출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말까지 나왔다.
호부 상서 운야목, 병부 상서 추굉심, 그리고 형부 상서 심성낙까지.
육부의 수장들 중 무려 세 사람이 이번 사건은 서남생과 무관하며, 산더미처럼 쌓인 공무를 충분히 수행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서남생뿐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호부 상서는 본래 조왕의 사람이었다.
조왕이 몰락한 현재 일단 상황이라도 면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서남생이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병부 상서 추굉심은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
하지만 더 이상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왕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지 이미 답은 나온 상황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현 상황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낸 것은 오직 형부 상서 심성낙 한 사람뿐이었다.
공부 상서는 쥐 죽은 듯 아무런 주장도 펼치지 않았으며, 예부 상서는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주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로써 주왕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심성낙마저도 지금껏 입장을 확실하게 하지 않던 대제희가 확실하게 입장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영제는 서남생에게 내렸던 정직 명령을 다시 거둬들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종결되는 대로 곧바로 복귀하여 밀린 공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조회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신료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부터, 아쉬움이 가득한 자들까지.
물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도 있었다.
선택지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면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
괜히 망설였다가 밉보이는 것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조정에는 전대미문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팽팽하게 흐르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더 이상은 서로 날을 세우고 싸우지도 않게 되었다.
* * *
진양은 대제희부를 찾았다.
그리고 가희에게 오늘 조회에서 있었던 일과 함께 심성낙이 어떤 말을 했는지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혹시 무슨 영향이라도 갈까 봐 그런 건가요?”
잠자코 듣고 있던 가희가 문득 물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심성낙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 이 이상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소저도 최대한 말을 아끼도록 하세요.”
진양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제 대국공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에요.
만약 제가 대국공이었다면 아마 주왕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을 겁니다.
태자의 자리가 오랜 시간 공석이 된다면 국운에도 영향이 끼치기 마련이죠. 이러한 사실을 이용하려면 기회는 지금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대국공이 주왕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주왕이 전조 세력과 결탁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지겠죠.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던 확실한 건 우리 모두에게 더 이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럼 이젠 뭘 어떻게 할 생각이죠?”
“지금부터는 제가 아니라 소저가 움직여주셔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괴산으로 가서 응백 소저를 만나도록 하세요. 마침 사당의 일도 있으니, 지금으로서 유일하게 산귀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소저라면 충분히 의심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대국공의 저택은 괴산 내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주변의 지형이 어떻게 생겼는지가 전부입니다. 게다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것마저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고요.
지금쯤이면 응백 소저도 공봉을 받아 어느 정도 실력이 늘어났을 겁니다. 괴산에 대한 통제력도 한층 더 강력해졌을 거고요. 가서 찾아봐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아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부탁을 마치면 곧바로 돌아와 이 사실을 영제에게 알리도록 하세요. 산귀는 비록 대영과 전조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나, 소저와의 친분을 생각해 얘기해 주었다고 둘러대면 충분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