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883
883화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어
저택으로 돌아온 주왕은 심어둔 첩자들을 통해 새로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처형장에 갔던 정천사의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식이었다.
모두들 멀쩡히 돌아오긴 했으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들은 살아있는 게 확실했다.
정천사 내에는 이들의 혼등이 보관되어있었는데, 첩자가 모든 혼등이 멀쩡히 켜져 있는 걸 직접 확인하고 온 것이다.
이어서 외부에 풀어두었던 부하들에게서도 새로운 정보가 날아들었다.
그와 전조 세력이 현장으로 보냈던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살아남은 사람 없이 깔끔하게 전멸했고, 심지어 번개를 불러왔던 조력자 이족들조차 전부 죽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이쯤 되니 주왕도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뭐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기이한 분위기가 계속해서 흘러갔다.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진양은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 * *
지금은 주왕 따위를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달려들어 상대를 물어봤자 기껏해야 따끔 하는 정도의 피해밖에 입히지 못할 테니 말이다.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된 때를 기다렸다가 파도처럼 휘몰아치며 단숨에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
진양의 세 번째 밀실.
진양은 허공에 둥둥 뜬 채 벽에 가득 붙어있는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한 번씩 붓을 들어 자료와 자료를 긴 선으로 잇기도 했다.
자료들은 길고 짧은 여러 선으로 서로 이어져 있기도 했고, 어떤 선은 중간에 가다가 끊어져 있기도 했다.
한창 골머리를 앓으며 자료를 살펴보고 있을 때.
십 대 소년의 모습을 한 장정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진양의 앞에 자신의 키보다 훨씬 더 높이 쌓인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사형, 이제 한참 몸이 자라고 있는데 무덤 도굴을 시키시다뇨. 그 바람에 몸이 자라는 속도가 훨씬 느려졌지 않습니까? 혹여나 재수 없게 실수라도 했다간 다시 죽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장정의는 한숨을 푹 쉬며 벽에 가득 붙어있는 자료를 바라보았다.
“사형, 벌써 몇십만 명 째란 말입니까? 이 정도 자료로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뭐 하러 그걸 또 직접…….”
“안 돼. 핵심적인 곳에서 연결이 끊어졌다고. 사람들의 무덤이 전부 다 대형 세력의 묘지 안에 있는데, 너 말고 또 누구한테 시킬 수 있겠냐?”
이어서 진양은 어딘가 이상했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 도굴이라니? 물건을 훔치길 했냐? 아니면 무덤을 박살 내기라도 했냐?”
“물론 아무것도 훔치지 않긴 했습니다만…….”
“그럼 된 거지. 우린 그냥 신분만 확인하는 것뿐이라고. 묘지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확인만 하는 것과 무덤을 파헤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일인걸. 이건 절대 도굴이라고 표현해선 안 돼.”
말을 마친 진양은 계속해서 자료에 집중했다.
장정의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어째 사형께선 점점 더 뻔뻔해지시는 것 같단 말이지.’
진양은 새로 입수한 자료를 한 장씩 살펴보며 허공으로 던졌다.
허공으로 던져진 자료는 스스로 벽 위로 날아가 알맞은 자리에 붙여졌다.
현재 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료가 빼곡하게 붙어있었다.
시대별로 서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끼리 함께 붙어있었는데, 앞으로 갈수록 빈 자리가 많았고, 뒤로 갈수록 빈자리는 적었으나 사람의 수는 배가 되었다.
진양은 한숨을 쉬며 자료들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눈이 어지러웠다.
진양의 머리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을 정도다.
“집중해야 되니까 앞으로 일주일 동안은 방해하지 마. 괜히 건드렸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나도 보장 못 한다.”
장정의는 두말없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장정의가 자리를 떠난 뒤.
진양은 진원과 기혈을 소모시키며 사자결을 시전했다.
그러자 생각하는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무수히 많은 자료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자료들이 환영이 되어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며 새로운 조합을 이루었다.
진양은 혈맥 이외에는 대국공이 주왕에게 이토록 헌신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혈맥, 보기엔 단순한 개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그 무엇보다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혈맥이다.
현재 진양은 주왕의 혈맥을 철저히 조사하며 전조 황실 혈맥과의 연관성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수만 년 동안 복잡하게 뻗어나간 혈맥을 전부 다 합한다면 천문학적인 수에 도달한다.
온갖 방법을 모두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완전한 연결점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다.
하지만 진양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분명 그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진양의 예상이 맞다면 전조는 이미 오래전부터 뒷일을 대비해두었을 것이다.
과거 전조 황실의 사람들은 전조가 멸망하며 전부 다 죽고 없었다.
만약 그들이 뒷일을 대비해두었다면 분명 어떤 방법으로든 혈맥이 이어지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누군가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다간 쉽게 발각될 수도 있다.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아마 범인(凡人)은 아닐 것이다.
범인을 통해 혈맥을 이어나간다면 근본을 찾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변수도 많아지고 위험 부담도 그만큼 커진다.
혈맥을 이어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멸족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명 수도사를 통해 그 혈맥을 이어나가고 있을 게 분명하다.
반드시 이름 있는 가문이나 세력을 통해 이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실력 있는 산수들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일단은 이러한 조건에 따라 지금까지 모은 수많은 자료들을 일 차로 분류했다.
그 결과 절반 이상이 걸러졌다.
설령 이름 있는 가문이나 문파를 배경으로 삼는다고 해도 위험 부담이 큰 건 마찬가지다.
수도사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혈맥을 잇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선 흔히 모든 것이 남자의 위주로 돌아간다.
여인의 몸으로 혈맥을 이어나간다면 그다음 대에는 다른 가문에 속하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쉽게 숨길 수도 있게 된다.
잠시 고민하던 진양은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했다.
최우선은 혼인을 한 여인이고, 이 외에도 실력이 부족하거나 전투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여인들도 포함시켰다.
그렇게 또다시 절반 이상의 자료들이 걸러졌다.
진양은 다시 자료를 정렬했다.
수많은 선들이 눈앞에 나타나며 각 자료로 이어졌다.
그렇게 이 다경 정도 지났을 무렵.
구 할 이상의 자료가 한쪽으로 걸러졌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팔백 장뿐이었다.
하나의 선이 가장 위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뚫고 가장 아래로 향했다.
진양은 그제서야 사자결을 해제했다.
머리에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한 시진 정도 머리를 비우고 휴식을 취하니 다시 정신이 맑아졌다.
물론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아마 며칠 동안은 후유증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당분간은 집에 머무는 게 좋을 듯했다.
한편, 진양은 마침내 완성된 긴 연결점을 보며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피곤했는지 곧장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졌다.
* * *
며칠 뒤.
맑은 정신으로 잠에서 깨어난 진양은 미리 준비해둔 두루마리에 내용을 옮겨적었다.
그러나 이걸로는 부족했는지 세 개를 더 복제했다.
그리고 아무 문제 없다는 걸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서야 자료를 챙겨 저택을 나섰다.
옥련에 오른 진양은 곧장 정천사로 향했다.
진양이 정천사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지기는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이내 조용히 손을 내려놓았다.
사건으로 인해 주변의 분위기가 다소 뒤숭숭하긴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체포 명령이 하달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 대인께 진양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세요.”
잠시 뒤.
한안명이 허둥지둥 밖으로 뛰어나왔다.
진양을 발견한 그의 얼굴엔 곧바로 복잡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야, 한 대인! 대인도 여기 계셨군요.”
진양은 곧장 그의 팔을 붙잡고 안쪽으로 향했다.
“진 대인, 도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중죄인을 빼돌렸다는 게 정말 사실입니까?”
한안명은 그동안의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듯 질문을 쏟아냈다.
사실 내막이 있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도대체 어떤 내막이 있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
“어허, 이렇게 감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체포 명령이 떨어지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저와 위 대인이 협력하며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걸요. 설마 그것도 못 알아본 겁니까?”
진양은 한안명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위흥조의 집무실.
“대인, 주왕을 고발하러 왔습니다. 그자는 전조 황족의 잔당입니다.”
“우선 그 전에 묘지기는 어떻게 하였소?”
위흥조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가 중죄인을 납치해 도망간 지 오늘로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적지 않은 압박을 받아왔다.
“말도 마시죠. 전 그냥 조용히 질문 몇 개만 하려고 했는데, 글쎄 그 망할 녀석이 갑자기 저를 습격하려 들지 뭡니까? 태도를 보아하니 순순히 불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죽였습니다.
아, 혹시 시신이 필요하신 겁니까? 그럼 시간 날 때 가서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일부는 남아있을 거예요. 남아있으면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건 됐소.”
위흥조가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게요? 아무리 주왕이 당신을 노린다 해도 이런 식으로 증거 없이 덤벼드는 건…….”
“그런 건 걱정하실 필요 없고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조회에서 작정하고 판을 뒤집을 생각입니다.
만약 제가 충분한 증거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친왕 모독죄로 처벌하셔도 좋습니다. 달게 받도록 하죠.”
진양은 자기가 할 말만 한 뒤, 가져온 자료의 복제본을 놓아두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위흥조에게 미리 말을 한 건 대제에게도 미리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수장인데 가장 마지막에 알아서는 안 되는 법.
그게 충신의 본분 아니겠는가?
* * *
며칠 뒤.
단 한 번도 제대로 조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던 진양은 오늘만큼은 이례적으로 관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했다.
조회에 참석하기 전,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도문, 일념의 바다 등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잘라내어 몽경으로 만든 뒤 따로 보관해두었다.
만일을 위해서였다.
마침내 조회가 시작되었다.
일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모든 이들이 자리했다.
붉은 망포를 입은 주왕은 한참 동안 진양을 응시했다.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영제는 이미 진작부터 그때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전부 허락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일종의 함정이었던 것.
하지만 이제 와서 알아봤자 너무 늦고 말았다.
한편, 진양 역시 대놓고 주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쉽군. 어쩌면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어.’
진양은 눈을 감았고, 명상을 하며 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